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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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 넘는 책을 읽은 지가 오래라
끝까지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까가 도전처럼 느껴졌었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며칠간 푹 빠져 있다가 마지막 장이 다가올수록 시원섭섭해졌다.

이야기 속에 나의 이름이, 너의 이름이 없어서 처음엔 좀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이야기를 하는 '나'가 하루키인지 나인지,
내가 안부를 궁금해하는 '너'가 하루키의 너인지 나의 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17세의 내가 그토록 애달아하는 너에게는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냥 너의 삶을 살게 되어 나를 잊은 것이길, 사고나 병으로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그 불확실한 벽 너머의 도서관에 널 만들어 둔 게 아닐까.
나에게 큰 의미가 되던 누군가가 갑자기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게 사라지면
삶에 정말 큰 공허함이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거나 마음을 주는 것도 내 마음을 뜨듯하게 데우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렇게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그 도시로 들어가서 진짜 너를 만나는 순간
마음이 함께 너무 설렜더랬다.
당연스럽지만 너는 나를 모르는 것은 너무 슬펐고...
그림자를 내보내는 선택을 했는데 내가 나와져 버린 거 같아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시골마을 도서관 관장으로 가게 되고 고야스 씨를 만나면서
너를 잊어가는 것처럼 점점 너를 생각하거나 너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서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 도시에서 나와버린 후로 너를 잊어버린 거야?'하고 섭섭함에 책 속 나에게 말을 건네 보기도 하고...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나도 점점 너를 놓을 준비가 되는 것 같았다.
고야스 씨와 마을에서의 인연들과 대화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게 된 걸까...
마지막에 그 도시의 꿈 읽는 일을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게 넘기고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면서
나도 함께 크게 호흡을 했다.

난 이제 내 삶을 진실되게 잘 살아보겠다. 너도 부디 어디에선가 안녕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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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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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갈래의 철도가 와 닿았다가 흩어져 가는 하얼빈역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맞닿았다가 흩어진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둘은 동양 평화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하지만, 두 사람이 생각하는 동양 평화의 의미는 너무도 다르다.


이토는 문명의 길에서 앞선 자가 선의로써 뒤처진 자를 개발 유도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서 선진화된 일본이 조선을 하나로 흡수하는 것이 마치 문명을 깨치게 해주는 일인 양 포장과 선전을 해대는 기술 또한 일품이다. 기사에 쓰는 글의 표현, 사진을 찍는 각도를 지시하는 모습을 읽고 있자니 동양판 히틀러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에 반해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하여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도마 안중근. 둘 사이에 흐를 적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닐까. 이토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자가 누구인지도 몰랐겠지. 안중근이 계속 궁금해하는 것처럼 나 또한 궁금하다. 이토는 죽기 직전 누가 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지 느꼈을까, 짐작이라도 했을까.


숭고한 의거에 젊음을 불사른 사건에만 집중하지 않은 작가의 시각이 좋았다. 안중근 외에도 하얼빈 의거와 얽힌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되는데, 빌렘과 뮈텔 신부의 에피소드가 나올 때는 감정이 참 복잡해졌다. 물론 종교를 믿는 이로서 살인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조선에서 종교 박해가 행해졌다는 이유로 군함을 타고 들어오는 신부와 군인들에게는, 많은 조선인을 죽인 이토에게는 겨누지 않는 비난과 책망을 안중근에게만 쏟는 뮈텔 신부가 섭섭했다. 소설 속 이야기이니 완전한 진실은 아니겠으나, 프랑스 군함의 만행에 대해선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이 헤아리기 힘들다라고 생각하고, 대학을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는 안중근의 말에 조선에 대학은 가당치도 않다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뮈텔. 당시 유럽 열강도 땅 따먹기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그들과 같은 짓을 하는 일본에 더 너그러워 보이는 느낌까지 들었달까. 그래도 다행히 사형을 당하기 전 빌렘 신부를 만날 수 있었으니 죽음을 앞두고 있던 안중근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어릴 적엔 위인들은 보통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연하게 결의를 보이고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게 당연하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쩌면 이제는 그 결의 뒤의 인간적인 번뇌와 고민 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나이가 된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안중근이, 우덕순이, 김아려가 하는 생각에 감히 인간적인 연민이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중근과 우덕순의 투박하고 진솔한 대화도 참 좋았다.


어렸을 적 읽은 위인전을 시작으로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책,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등 나름 많은 이야기를 접해왔는데, <하얼빈>은 여타의 작품들과 결이 다르다. 지금까지 봐온 것들은 사건이 사건인 만큼 시작부터 극적인 장면, 혹은 대사들과 그의 32년 인생의 뜨거움으로 가슴 찌릿하게 찔러대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마치 다큐멘터리, 물기 쫙 뺀 르포르타주를 읽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독자인 나의 감정은 더 요동치고 눈물은 더 터져 나왔다. 특징이던 그 유려한 묘사를 버리고 담담하고 담백한 단문들로만 이런 책을 써내다니, 역시 김훈이다.

하루빨리 안 의사의 유해가 우리 땅으로 돌아올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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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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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 선생님은 역사가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것이라 하셨다. 그 다음부터는 역사 서적을 읽을 때면 이 책은 어떤 입장에서 쓰인 책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생각해보니 이 관점은 너무 편협한 것이었나 싶다. 승자든, 패자든, 그들은 보통 지배자이며 가해자였다. 그 역사의 피바람 속에 휘말린 수많은 목숨의 입장에서는.


나름 역사서를 많이 읽었지만, 갑자기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책이 아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였다는 우스움은 제쳐두고.


어쨌든, 처음으로 소련의 굴락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본 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였고, 홀로코스트만을 이야기하는 책을 본 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어쩌다보니 피해자의 입장에서 쓴 책으로 이 시기의 동유럽 역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의 인과관계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절절한 슬픔에 밀려 눈이 퉁퉁 붓고 며칠 꿈자리만 사나운 경험을 했다. 그리고 돌고 돌아 마주한 이 책, <피에 젖은 땅>.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이건 또 얼마나 내 목을 조일까 싶어 겁을 내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고 사게 되었다. 제3국(미국) 사람이니 직접적인 피해자의 입장은 아니겠다 싶은 마음이 반, 스탈린과 히틀러가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의 생명을, 그것도 스탈린은 자국민의 생명까지 앗으려는 결정을 했는지 이성적인 시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펼친 책은 서두부터 충격적인 내용을 던지기 시작했다. 수용소에서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다시 읽게 될까 겁내며 넘긴 책장에는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 수용소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스탈린과 히틀러의 정책으로 인해 숨진 이들은 1400만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혹은 수용소 노역의 희생자는 절반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 숫자는 전쟁과 무관한 비전쟁지역의 민간인 희생을 나타낸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눈 뜬 장님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지금껏 읽었으나 읽지 못한 이야기를 이제야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비극적인 이야기라 자세히 읽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던 내가 아는 동유럽의 비극은 영화 '쉰들러리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이런...


어느 부분에서 읽었더라... 그나마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다 죽는 건 아니고 80%? 90%? 정도가 생존했다고 하니, 그 비극에는 후대에 이야기를 전할 이가 남아 책으로, 영화로 쓰여 많이 남았나 보다. 식량을 빼앗기고 아사한 사람들, 누군가를 식인하고, 제 살을 식인한 이들의 이야기는 누가 남기겠는가.


1930년대 초, 전 유럽에 기근이 창궐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모든 이가 공평하게 고난을 이지 않는 법. 스탈린에게나 히틀러에게나 그저 약탈해야 할 곡창지대에 불과했던 우크라이나는 이 기근을 남들보다 훨씬 끔찍하게 지나야 했으며, 도처에 굶어죽은 이의 시신이 넘쳐났다. 황제에게 빵을 요구하고 개혁을 바라며 시위하던 러시아의 민중들은 사회주의의 꽃망울이 터지면 자신들이 아사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누구한테 해 끼친 적 없이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부농이라는 국가의 선전에 내몰리며 재산, 심지어 목숨을 뺏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스탈린은 대기근 속에 죽을 자와 죽지 않을 자를 선택했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집단 농장에서 일한 건 같은데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빵을 주고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기보다 그냥 내 집에서 굶어죽는 쪽을 택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근묵자흑이라 했다.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으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로의 거울이었나 보다.


소련이 몇몇 지방에, 혹은 소수 민족에 박해와 대숙청을 가하더니, 다음 주자는 그것을 업그레이드했다. 독일에 관해서는 현대 독일의 역사를 바라보는 멋진 태도 덕분에 그래도 소련에 비해 더 알려져 있다. 가스실까지 사람을 옮기는 운임도 아끼고 싶어서 오는 길에 처형하고, 아예 수용소까지 보내지도 않고 처형하고. 스탈린에게 배운 건지 둘은 통하는 게 있는 건지 먹을 것을 뺏고 아사시킨다. 소련의 집단 농장은 사실 처음부터 기아로 아사시킬 작정이 아니라 비효율성에 의한 결과물이었지만, 독일은 작정하고 사전에 아사 계획을 짰다. 정복지의 주민들 전체를 굶겨 독일인들이 적당히 먹고 사는 계획.


스탈린이 생각하는 미래, 히틀러가 바라는 미래에는 소련과 독일의 평화로운 공존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서로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오래지 않아 깨질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독일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하면서 스탈린에게 시달리던 러시아의 국민들은 히틀러가 침공하자 쌍수를 들고 반겼으나, 히틀러의 나치는 오직 독일인만을 사람(?)으로 여겼다. 30년대에 스탈린에 의해 피를 흘린 땅은, 40년대에 히틀러로 인해 또다시 피를 흘렸다.


읽으면서 너무나 기분이 나빴던 것은 단어와 그 내면의 부조화였다. '아사 계획'은 곧 자신들의 독일인을 살리는 계획이었으며, '재정착'은 대량학살을 의미했다. 마치 전에 빅터 프랭클의 책을 읽을 때,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 마치 샤워라도 시켜주는 것처럼 모든 옷과 소지품을 두고 들어가게 하고, 실상은 시체를 처리하면서 소지품 뒤적이는 노동력조차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 나쁨.


책을 읽으면서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나고, 나라가 무너지고, 한 비극이 지나면 다음 비극이 찾아오는 우크라이나(이때는 소련령이었지만)와 폴란드의 이야기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근대의 무너져가는 조선과 눈에 불을 켠 침략자 일본 사이에서 스러져 간 조선의 백성들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을지도, 6 25 때 북한군이 점령하면 남한군에 동조했다고 죽고, 남한군이 점령하면 북한군에 동조했다고 죽어간 얼마 오래지 않은 우리네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많은 자료에도 불구하고 수치는 추정이다. 스나이더의 깊은 뜻까지는 감히 내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5% 정도는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하. 스탈린과 히틀러의 몇 차례에 걸친 대량학살은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이 숫자들을 찾고, 사람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류의 말로 스나이더는 글을 마무리한다. 왜 죽었는지, 물론 단순하게는 히틀러 때문에, 혹은 스탈린 때문에 죽었겠지 말할 수 있겠지만, 스나이더의 말처럼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듯하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그들의 과거도, 우리의 과거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서러움을 밝혀낼 수야 없겠지만 어떤 시류에서 누가 왜 어떻게 죽어갔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국가와 사건을 분리하고, 단위를 세분하고, 그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춘다면 진정으로 시대의 역사를 읽을 수 없는 것 같다. '전유럽이 대기근이었으니까 여기저기 굶어죽은 사람이 많았겠지, 뭐,' 하는 식으로 보지 않도록, 좀 더 날카로운 시각과 너른 시야를 지닐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겠다.


물론 작가가 들였을 공만큼, 역자가 쏟았을 정성만큼 깊이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사를 보는 내 시각이 아주 조금은 넓어졌기를 기대하며 작가와 역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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