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6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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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광주 출신입니다. 어릴 적부터 5.18에 대한 이야기를 비교적 많이 듣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5.18에 대한 글을 쓰다가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제가 쓴 말은 ‘광주 사태’였는데, 어머니는 그 말이 가해자들이 주로 쓰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그때 그 일에 대해서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꼭 가해자가 쓰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고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5.18을 부르는 말 자체로서는 굉장히 아쉬운 점이 있는 건 맞다고 보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 탓일까요. 북한과 관련한 음모론이나 폭도론과 같은 터무니없는 말들에 분개할 때 빼고는, 5.18에 대해서 딱히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매년 5.18에 대해 공부하며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지인들과 나누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도청 앞과 전일빌딩을 지나가다가 아버지에게 5.18 당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던 아버지는, 군인들의 발포를 목격하였습니다. 멀찍이서 이 장면을 본 아버지는, 공포를 느끼고 집으로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고 합니다. 마침 발포가 있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공포가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나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대학생이었다면. 아니면 조금만 더 발포 현장에 가까이 있었더라면.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제 존재 자체가 전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5.18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저 자신도 5.18의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지금의 저와 연결되어 있는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졌고, 그 뒤로 365일 내내 5.18을 챙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이 중요한 일에 대해 공부하고 기억하여 생각을 나누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올해 제가 선정한 책은 최정운 교수의 <오월의 사회과학>입니다. 5.18 열흘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상에 고발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나 5.18의 원혼과 생존자들의 한을 다룬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는 다르게, 5.18이 우리 사회에 어떤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지를 학술적으로 들여다본 책입니다.

“80년 광주에서 그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6월 항쟁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멋모르던 학창 시절, 저는 이러한 종류의 말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광주에서 비극적인 일이 있었고, 분명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우리(광주) 스스로 사건을 과대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서울역 회군 이후 5.18을 접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광주에 대한 부채감은 상당했고 이후에 이것이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동력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80년 5.18이 87년 민주화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는 것 자체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연결고리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에 대한 두터운 이해는 뒤로 미루어두었습니다.

<오월의 사회과학>이 드디어 제 납작한 이해를 꽤 해소해 주었습니다. 그간 4.19는 헌법 전문에 들어가 있는데, 5.18은 왜 그렇지 못한 것인지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독 5.18에 대한 음모론이나 유언비어가 횡행하여 왔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5.18이 굉장히 복잡한 사건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론이 상존하고 있다는 데에 기인하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현행 헌법이 5.18과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개정된 것이라는 점도 이유일 것입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게 현재는 가장 정론으로 여겨지지만, ‘민중항쟁’과 같은 말을 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책은 5.18을 민중론과 혁명론과 같은 담론을 통해 바라보는 시각도 들여다봅니다. 주로 맑시즘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주축이 되어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폭력으로써 혁명을 꾀하였다는 시각이 이러한 담론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해석보다는 ‘민주화운동’의 시각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5.18 때 광주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데 있어, 노인과 여성을 몽둥이로 구타하고 희롱하거나 대검으로 찌르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일삼은 공수부대에 대한 극에 달한 분노가 혁명에의 의지보다 훨씬 더 주요한 요인이었을 겁니다. 혁명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다수였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공수부대에 맞설 만큼 목숨을 내놓고 그 많은 사람이 덤볐을 거라 보기는 힘들지요. 게다가 반인륜적인 행태에 분노하여 공수부대에 맞선 이들은 노동자계급뿐만이 아니라 전 계층의 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시민군을 조직하고 무장을 하였기에, 쿠데타 세력에서는 폭도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 노인과 어린아이, 여성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휘두른 무리들을 자국의 군대랍시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 투쟁의 대열에 선 이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이는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민주화운동이라고 해놓고, 무장을 하는 등 일정 기간 폭력을 사용코자 했던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관해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4.19나 6월 항쟁과 같은 것들과는 성격이 다른 지점일 것입니다.

광주 시내에서도 일시적으로 공수부대를 물리쳤을 때, 혁명적 분위기가 감돌았고 시민들은 이를 ‘폭력’을 매개로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반인륜적인 행태에 분노하여 공포를 물리치고 싸움에 나선 시민들은, ‘폭도’로 몰리면서도 ‘혁명’을 추구하면, ‘인륜’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책은 설명합니다. 그래서 무기 회수론이 나오기도 하였고, 많은 광주 시민들은 혁명을 거부하였으며, 마지막에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훗날 광주가 ‘폭도들의 땅’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민주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유언’이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투쟁 동기는 결코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정치 이념이나 제도에 대한 요구로 귀착되지 않는다. 인륜과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가치는 동서고금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굳이 글로 써서 알릴 필요도 없는 인간 본성 차원에 있는 것이다. 5.18은 민주화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인륜과 공동체를 위한 처절한 투쟁에서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관통하여 독재의 그 깊은 곳에 있는 핵심적 독소와 맞부딪쳐 그것을 만천하에 파헤친 것이다. 5.18을 통해 비로소 독재는 비민주적 정치제도임을 넘어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말살하는 폭력으로 드러났고 서구의 정치 이념이었던 민주주의는 비로소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륜과 동동체의 근본적 가치는 민주주의로 흡수되지 않으며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해결할 수 없다. 1980년대 어두웠던 시절 우리의 민주화 투쟁은 민주주의 이념의 힘이라기보다는 5.18의 처절한 경험 그리고 각종 고문사건 등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가 깨어지던 모습에 대한 분노를 통해 이끌려갔다.”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오월의 봄)

이걸 읽고 나니 생각도 조금 정리가 됩니다. 인정해야 할 점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5.18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5.18이 벌어졌을 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르고도 잔인성에 맞서기 위해 싸움에 나선 시민들이 다수였다고 합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옆에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존엄성과 생명이 짓밟히는 것을 지켜보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5.18의 시민들이 요구한 ‘최저선’이었다고 말합니다. ‘5.18 정신’을 말하면서 민주주의 이상의 가치, 즉 ‘인간의 존엄’, ‘생명 보호’를 말하는 분들의 말도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민중론’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분들은 ‘경제적 평등’까지도 부르짖는 것이겠지요.

사실 책을 읽고 난 다음, 5.18을 정확하게 어느 하나로 규정하는 데에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앞으로도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 나가야할 이야기가 남아있다고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과 담론이 존재하기에, 5.18 이후의 민주화운동도 굉장히 복잡했나 봅니다. 5.18을 전후로 민주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였고, 지금도 그로부터 파생된 관점의 차이가 상존한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민중론이나 혁명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5.18 당시 존재하였던 혁명에의 의지를 계승한 투쟁 의식이 6월 항쟁까지도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5.18에 대한 저의 이해는 전보다 다소 두터워졌습니다. 알고 나니까 사건이 훨씬 더 복잡하게 보이고, 현대의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데 있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임이 더 실감 납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고 서평을 쓰는 등 5.18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분들이 다가오는 5월 18일에도 많으시겠지요. 저도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집 앞처럼 드나들던 도청과 상무대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며 울고는 했습니다. 그런 작품들을 읽은 다음에는, 사회과학적으로 우리 사회에 5.18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영향을 주었는지 한 번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5.18에 대한 더욱 풍성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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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2-05-1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없이 표현하려해도 항상 부족한 아픈 역사죠, 우리들은 지속적으로 기억을 소환하고 잊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 거예요. 진심어린 글 고맙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