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브릭 로맨스 - Sewing in the Garden
정은 지음 / 성안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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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 어머니의 시집올 때 해왔다는, 꽃자수가 있는 모시이불을 덮을 때, 어머님께서 손뜨개한 옷을 입고 아이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꺄르르 웃을 때, 이름 모르는 어느 20대 아가씨의 핸드메이드 손가방의 비뚤빼뚤한 손자수를 볼 때, 해질 녘 붉은색으로 물드는 하늘과 연한 보라빛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그럴 때가 좋아지니 말이다. 이런 순간들은, 해야할 일이 빽빽한 그 시간들 사이에 드는 볕처럼 특별하고 소중하다. 이러한 기억들을 되짚어보니 이 책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빛, 색과 향기가 있다. 코끝에서 잔잔하게 머물다가 있는듯 없는 듯 사라지는 들풀향기처럼.  

이 책은  오픈갤러리를 산책하는 그런 느낌이다. <패브릭 로맨스>의 작가 정은씨는 우선 자기속도에 맞게 사는 사람이다. 느리리지만 열정적이기도 하며 다른 이와 어울리지만 자기 세계가 확고한 그런 여인이다. 초록 잎과 생화를 아무 병에 툭툭 놓아두었다지만 그것이 뿜어내는 생기, 그것만으로 아름답도록 하는 예술가이다. 여느 파티에 일률적으로 자로 잰듯 디스플레이된 우아하기만 한 꽃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꽃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의 시선이 느껴져서인지 모르겠다. 남의 시선 보다는 내 공간을 내 손길로 다듬는 시간들이 켜켜히 쌓아질 때 풍겨나는 그런 조용한 아름다움,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잔잔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꽃에 대한 정보도 있는데, 진보랏빛 아네모네, 얇은 꽃잎이 아스라함을 주면서도 생동남 넘치는 컬러를 지닌 양귀비, 흐드러지게 피는 작약, 여리한 꽃잎이 사랑스러운 리시안셔스와 라넌큘러스, 라인플라워인 금어초와 델피니움, 한여름과 겨울에 싱그러움을 선사하는 점잖은 꽃, 서양란 등등. 당장이라도 꽃집에서 한 아름 사와 테이블을 장식하고픈 마음이 들도록 생생한 색깔들의 잔치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벌어진다. 제대로 눈이 시원해지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 꽃의 천연색을 담은 듯 강렬한 색을 지닌 가방이 바톤을 받고 이야기가 이어진다. 수백 번의 작업 끝에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기능을 갖춘 아름다운 가방을 지어내었다니 여느 명품가방과도 바꿀리 없다. 이어지는 그녀의 작품들은 마치 반복적인 운율이 있는 듯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물결치면서도 잔잔한 그런 여유와 열정이 있었다. 단순함 속의 디테일,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패치워크의 매력이었다.  <볼레로>를 들을 때의 감동이 밀려들어온다. 비슷한 패턴이지만 점점 더해지는 열정으로 표현되는 음악처럼 뜨겁다. 내가 사는 공간을 비행기위에서 내려다 볼 때 정연히 펼쳐지는 그림과 같다. 그리고 빈 공간을 채워주는 소품들로 쿠션, 앞치마, 테이블 매트, 도자기들에 대한 생각. 다양한 패치워크로 작품이 된 그녀의 이불 컬렉션들 아름답다.

아티스트인 에이미버틀러와 케이프 파셋의 작품에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작가, 정인씨는 사실 미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강사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도 일상 속에 영감을 포착하고 감동을 받아 엮어낸 그녀의 패브릭은 오전 11시 54분 약간의 열기를 뿜은 내 식탁에 활기가 되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조금 느슨해진 이른 오후에 숨결을 불어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궁금했다. 그녀의, 메마르지 않는 감동의 원천이 무었이었을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미술과 조각의 대가도 그렇게 말했다. 예술은 손에서 나온다고. 그 손은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궁금해진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라고. 충분히 생각하고 작업에 임하는 진지한 그 눈빛만이 강렬한 색깔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 하는 산책,여행, 명상의 시간 속에 자신을 비워가는 일도 힘이 된다고한다. 채움과 비움 속에서 온전한 채워지는 영감. 그것이 바로 마르지 않는 샘물이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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