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지음, 이동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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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전에는 알렉산다를 헤몬이라는 작가의 미국생활이 궁금했다. 자라서 익힌 언어의 방법이라든지 배경이라든지 하는 것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점이 많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나는 아주 작은 부분만 바라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며 읽었다. 일단 저자는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27세의 나이에 미국 시카고에서 있는중 내전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라예보서의 유년시절을 시카고에서 일을 하게되면서 사진과 기록으로 확인하게 되는데 그 사진들과 내용들이란 내가 어린시절 친구들과 놀았던 그자리가 전쟁의 흔적이 되었고, 여자친구를 기다리던 길 모퉁이의 건물은 온전하지 않은채 접하게 되며 사실을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장면을 그리면서 읽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때  사라예보 내전과 세계역사를 알면 좀 더 쉽게 읽힐텐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갔다. 그래도 중간 중간 보이는 문학작품들은 반가웠고 전쟁에 대한 마음의 분노조절과 자발적인 은둔을 산속에서 하며 먹고 읽고 자고 했다는 그의 생활을보며 이 사람 정말 삶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구나..


사람은 누구나 어린시절을 추억한다. 감기가 걸려 아플땐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였주었던 콩나물과 김치가 들어간 김칫국이 생각나고 여전히 그 맛을 추억하고 싶을때가 있는데 그 맛이 안날땐 추억도 못먹는 기분이랄까.

저자는 저녁식사에 먹은 보르시와 그당시엔 즐겁지 않았던 가족간의 대화가 추억이 되어 그리운데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캐나다에서도 시카고에서도 검문소를 지나갈때도 마음이 불편하고 다른억양을 쓰는 영어로 상대방의 틀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같은 우리안에서 그들과 나는 함께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우리라는 단어가 적용된다는 필자의 생각들은 경험에서 느껴지는 언어들이었다.

외국에서 산다는게 나이가 들수록 쉽지 않겠다는게 느껴지는 요즘에 이 책을 만났다. 사실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원어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것처럼 외국에 나가서 그들처럼 완벽한 우리가 있을까?


책의 맨 첫장에 [영원히 내품에서 숨쉬는 이사벨에게]라고 적혀있다. 책을 다 읽어갔을 무렵 딸 이사벨을 보낸 그마음을 이 책 한페이지에는 가득 담아놓았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나는 헤아릴 수가 없다. 상상할 수가 없다. 정지용시인의 유리창이 생각났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위로도 어떤상황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것일 수 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며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글을 접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마지막에 옮긴이 이동교님의 말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시고 통번역전공을 하신후 캐나다에서 지금 살고 계시는 분이기에 이 삶이 멋진것 같다는 나의 생각은 겉도는 생각을 장식할 뿐이다.

캐나다 생활에서의 적응이라는 것이 새 물로 갈아준 어항 속 금붕어가 내가 바뀐곳에서는 금붕어였다는 사실도 잊은채 살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멋있어보이지만 쉽지 않은 타지 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시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사라예보 내전에 관한 책을 만나면 알렉산다르 헤몬님의 나의 삶이라는 책이 생각날것 같다.

호밀밭의파수꾼과 시카고에 관한 책을 읽어도 말이다




p53

게다가 혼자 먹는 보르시만큼 애처로운 것도 없었다. 혼자 먹을 보르시를 만들면서 나는 가족 식사의 형이상학을 깨우치게 되었다. 호자 먹을 보르시를 만들면서 나는 가족 식사의 형이상학을 깨우치게 되었다. 가족을 위한 음식은 사랑의 약불위에서 꾸준하게 익혀야 하고 서로함께라는 지울 수 없는 의식 속에서 나눠야한다. 그리고 완벽한 보르시를 완성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재료는 바로 배고픈 대가족이었다.


p89

차오르는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수많은 장작을 패기도 했다. 가끔은 아무런 보호장구도 없이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랐다. 자위를 위한 일종의 자살기도로써 미끄러지지 않고 정상에 이른다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심리치료 시간마다 나느 기억해냈다. 그곳에서의 고적한 독서가 내 어수선한 정신을 얼마나 맑게 해주었는지, 늘 콧가를 맴돌던 소나무 향이 높은 고도의 상쾌한 공기가 아침산으로 굴절해 들어오던 햇살이 나의 상처를 얼마나 어루만져 주었는지


p95

내가 알던 그리고 사랑했던 모든것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산산조각 났는지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재앙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세세한 면면들을 집착하고 분석하느라 다른 여유없이 지냈다.


p232

나는 희망을 빌어주는 사람들과 말하는게 힘들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들었다, 친절하게도 사람들은 도움이 되려 했고, 아내와나는 그들의 이러니 저러리 하는 소리를 싫은 내색 없이 견뎠다. 그들은 그저 그런얘기 말고는 무슨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고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안에 들어가, 공허하고 거추장스로운 말들로 담을 쌓았다. 아내와 나로서는 말로 도울 ㄹ방도를 찾지 않는  현명한 이들을 대할때가 훨씬 더 편했다. 이들과의 대화가 좀만 더 버티게 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그말에 나는 "여기 말곤 버틸데도 없어"라고 했다)


p242

종교가 저지르는 가장 야비한 오류는 바로 고통을 무슨 깨달음이나 구원에 이르는 한 단계쯤으로 숭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의 고통과 죽음은 이사벨 본인에게도 우리에게도 이세상에도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배울만한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누구에게 도움이 될만 한 경험도 얻지 못했다. 이사벨 없는 우리 부부는 이제는 더이상 줄 수 없는 바다같은 사랑과 함께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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