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청소년신학 - 청소년을 성장하고 꿈꾸게 하는 근원적 질문
딘 보그먼.마상욱 지음 / 샘솟는기쁨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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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당연히 말할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은 하나님 앞에 선 허수아비가 아니다. 혼잣말이 아닌 이상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잘 말하기 위해서!) 대상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또한 말(언어)은 시대, 즉 대상이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낸 메신저다. 다시 말해 같은 단어라도 어떤 시대나 배경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신학이란 하나님 말씀을 오늘이라는 시대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늘에 있는 신령한(?) 언어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태초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률이 대사가 떠오른다. 현장이지 말입니다! 그렇다. 현장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지 말입니다!

 

  근대의 특징은 다양한 제도(Institutions) 탄생이다. 병원, 학교, 군대가 대표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제도의 어벤저스다. 교회는 병원(치유), 학교(교육), 군대(훈련)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교회는 충족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을 제공했으며 그래서 부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후기로 넘어오면서 교회는 시대 요구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제도가 발전하기 위해 선택한 효율성이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에 필요한 사람만 선택되고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소외와 차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제도적인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근대 후기의 대표적인 특징은 다양성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이름으로 강제 통일이 먹히던 시대가 물러가고 있다는 말이다. 선택과 집중으로 주목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목받지 못한 사람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넘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종교적인 언어를 넘어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정황을 들여다보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폭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는 단결을 외칠 때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들의 공존과 공생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좀 더 말랑말랑해져야 하는데 여전히 딱딱하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잊혀지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각자 나름의 독특한 이야기도 있다. 강자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과 다양한 이야기와의 만남이다. 따라서 청소년신학은 청소년들의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 결핍 또는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청소년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 즉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야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정의, 평화다. 청소년의 다양한 이야기는 복음이라는 공동의 이야기와 버무려져 청소년신학이 되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좀 더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이 가진 다양한 감수성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는 능숙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떻게 능숙할 수 있을까? 먼저 복음 이야기에 능숙해야 한다. 복음은 오늘, 여기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본래 의미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의 모든 방식,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이 능숙함의 완성이다. 물론 단순히 책 한두 권 읽고 청소년을 이해할 수는 없다. 청소년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누군가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대의 민낯을 보는 일이기 때문에 신뢰 관계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친밀한 관계만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위험한 도전이다. 뭐든지 함께 있으면서 물들지 않고 경계하거나 갑질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90년생이 온다에서 말하듯이 이들은 기성세대를 꼰대로 바라본다. 00년생이라고 다를까. 사실 누구나 꼰대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꼰대가 되었을 때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며 훈수 두는 꼰대,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행동과 거리가 먼 진정성 없는 꼰대. 적어도 이 두 꼰대는 피하자. 이런 의미에서 청소년신학은 꼰대의 자기 성찰 고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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