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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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로 태어나
주민번호 뒷자리도 2로 시작하는 유 진

오대독자가 될 녀석이라는 아빠의 기대를 안고
공사시 이십칠분 여아 분만
간호사의 이 말을 듣고 엄마는 그대로 까라지고
고추가 아닌 째진 틈조차 허술한 유진을 보고 아빠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름에서 항렬자를 빼는 일
그래서 유 진
그럭저럭 성장했고, 고등학교 진학 후
오대독자 운운하던 아버지가 밖에서 아들을 낳아왔고,
상당한 금액의 위자료를 얹은 이혼 서류가 엄마 앞으로 날아가고

어느 날 가랑이 사이로 쑥 빠져나온 슬픔.
애정과 미련, 설렘과 욕망이 한 덩어리로 뭉쳐 슬픔이라는 껍질을 둘러쓴 채 구체화된 모습을.
유 진의 슬픔은 아주 작고 말랑말랑한 죽순 모양

일종의 성기 기형
외부로 돌출되어야 할 부분이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다가 성장하면 밖으로 빠져나오는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논리
그게 달렸으면 남자, 안 달렸으면 여자

더 자라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 슬픔은 나날이 견고해지는 중이고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았지만 샤워할 때는 슬픔의 얇은 껍질을 조심스레 잡아당겨 닦아내야만 하는

주민등록증은 예정대로 숫자 `2`를 박은 채 발급
하릴없이 달랑거리는 이 인치짜리 슬픔은 정체성을 결정짓기에 지나치게 경망스럽고
시간이 필요한 유 진
슬픔을 성기로 뽑아낼, 혹은 불필요한 혹덩어리로 간주해 떼어버릴 시간, 그것을 슬픔이 아닌 어떤 것으로 정의내릴 시간이

유 진 옥탑방으로 이사 오던 날
유 진이 점점이 불이 꺼진 동네를 내려다보며
짜장 얼룩을 지우고 있을 때,
아들을 원하던 아버지의 오대독자 갓난쟁이는 점점이 꺼진 불을 골라 밟고 달아나 한 줌 재가 되어버리고
유 진은 아이가 흘리고 간 `용`자를 가만히 주워와 자신의 이름에 붙여보았지.
유용진
헐겁던 이름이 꽉 조여진 기분

아빠와 함께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다
유용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바지를 벗었어.
그러나 유용진이 아빠 앞에서 바지를 벗는 건 괜찮지만 유진이 하는 건 반칙, 그것은 엽기였고 일종의 범죄
엉거주춤 선 유진을 내버려두고 쏜살같이 옥탑방을 뛰쳐나간 아빠
유진의 슬픔이 `2`에서 `1`로 될 수 있는 자리였는데
`뭣`조차 되지않은
`뭣`조차 될 수 없는...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이 책을 송년회 선물로 샀지.
작가상 수상작으로 사인본이 있어서 주문하기도 했지만 선물을 하기전에 먼저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어.
내가 만약에 유진의 아빠였다면 저렇게 혼비백산하고 도망은 안갔을거 같애.
혼자 담아내기엔 너무나 큰 슬픔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누구에게 털어놓을수도 없는 슬픔
아이들에게 이런 아이가 있었어 라고 말을 해 주었지.
마지막 장면에서는 유진이 날카로운 칼로 슬픔을 자르려하는 대목에서 끝나
그렇다고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진 않아
이 아이의 `2`와`1`에서 정정해주지 못한 마음이 슬픔처럼 씁쓸하지.
책을 읽은지 하루가 지나서 차창밖으로 유진의 슬픔이 신호대기하고 있는 틈 사이에 바람처럼 머릿속으로 들어와 나가지를 않네.
오늘 나의 하루는 비교적 안녕한 하루였는지..
가끔 퇴근하며 아이들에게 웃으며 툭 던지는 한 마디
`내일보다 젊은 하루자네!
힘내! `
그런데 요즘은 퇴근하며 맨 먼저 하는 말이
`피곤해~`
`밥 줘!` 이러지.
오늘은
`요즘 피곤하다고 자주하네!`
이러며 퇴근길에 마중나와 쵸코렛을 주는데
나의 하루가
비교적 안녕한 나의 하루가 맞는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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