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비츠를 위하여 LE (dts 3disc) - 극장판 + 감독판
권형진 감독, 신의재 외 출연 / 싸이더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얼마전 피아니스트 김정원씨가 직접 라스트신에 출연했고,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다고 하길래 영화 DVD를 빌려다 보았다.   음악영화라고 분류하는데, 어느 음악잡지에선 외국의 "빌리 엘리어트" 등과 비교하여 이것은 구태의연한 한국적 신파극에 불우한 신동의 뻔한 성공스토리라고 폄하한 것을 보았다.  

 

 

이 영화는 배우(어린경민-신의재, 청년경민-김정원, 학원장-엄정화, 외국인교수-이름은 모르지만 진짜 교수라고 함)들에 의하여 실제 연주된 피아노의 선율이 항상 흐르지만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선율과 함께 이 영화에 흐르는 코드를 이해하기에 난해한 것은 아니다.  

흔히 뻔한 스토리라는게 뭘까, 일종의 컬쳐무비가 아닐까?  60~70년대의 정부에 의해 주도되던 도덕교과서 비슷한 계몽영화라던지 최근 영화이지만 '고달픈 생활...하지만 보람에 산다.  대한민국 XX을 위해 건배'를 닭살돋게 이야기하는 계몽영화의 민간판인 "공공의 적2" 같은 부류를 컬쳐무비라고 말하는것 같기도 하다.

90년대 이후로 나라가 자유화 개방화된 덕인지 한국영화, 아니 한국컬쳐무비. . . 괜챦다.  물론 그 영향으로 조폭이나 불륜을 미화하는 영화가 판치는 현실이 가슴아프긴하지만 자유란 좋은것같다.

 

2000년대 들어서 나타난 사제관계물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선생 김봉두"의 계보에 들어갈수 있는 영화이며 "여선생vs여제자"나 "꽃피는 봄이 오면" 의 사교육버젼 내지는 예체능교육버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영화들은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지만 실제 주인공은 아역이라기보다는 어른이다.  영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가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남내榮?또라이고 여교사는 푼수끼가 다분하다.  아역을 맡은 이는 반항적인 기질을 보이지만 알고보면 불쌍한 아이다.

그리고 주인공을 맡은 교사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진출한지 5년 이상 훌쩍 넘긴 중견사회인의 문턱에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선생김봉두도 30대 중반, 여미옥선생도 교직 8년차의 베테랑, 꽃봄의 현우는 40 가까운 나이였고, 호로비츠의 지수역시 음대졸업후 5년이 지난 어느날 학원을 셋팅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자기 신세한탄과 함께. 

 

30대 중반이라면 사회인들에게는 제2의 사춘기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대학시절가졌던 꿈과 그 결과를 중간결산해야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일정한 명예와 통장에 적절히 쌓인 돈도 있어야하는 때다.   초등교사같은 안정성높은 직장에선 자칫하면 권태와 게으름으로 빠지기 쉽고, 특기인들에겐 자기정체성을 고민하게 될 시기이기도 하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여옥이나 봉두지만 초반기의 열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뭐 좋은 일 없을까 끊임없이 찾아헤맨다.   그 결과가 봉두는 봉투를 밝히고 여옥은 대도시에서 실시하는 임용고사에 신경을 집중한다.   그/그녀에게 학생들은 대상물에 불과할 뿐이다.   호로비츠에서의 꼬마주인공 경민도 지수에겐 일종의 대상물이었을 뿐이다. 

 

뚜렷한 특기를 전공한 교사를 소재로 한 "꽃피는 봄이 오면"과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선생김봉두"나 "여선생여제자"와 약간의 차잇점이 있다.   처음부터 교육에 관련된 직업에 어쩔수 없이 몸담그는 것으로 설정되는 것이 다르다.

생각해보니 사회학과나 기계공학과 뭐 그런것을 전공한 사람들과는 달리 늦어도 청소년기부터 한가지를 목표에 두고 혹독한 수련을 한 사람들에겐 졸업후 타전공자들과 별다를바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엄청난 공황이 닥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성공한 또래들만 보인다.  주변에선 끊임없이 잘나가는 이들을 비교하며 속을 뒤집는다.   성공한 녀석은 나보다 특별히 나아보이는바도 없다.   잘난 이몸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꽃봄의 현우도 그랬고 호로비츠의 지수도 그랬다.  

원대한 꿈을 꾸며 혹독한 수련을 했지만 졸업후 노도와도 같이 세월은 흘렀고 아직도 갈길은 멀다.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백명중 한명정도가 연주가로서 일정한 성공을 할까말까하는 바닥에서 무엇보다도 자기 실력의 한계는 본인들이 잘 알고 있지만 그들 마음속에서부터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한다.   능력없는 부모탓이며 사회구조의 모순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코흘리개들과 씨름하는건 창피한 일이다.   목표는 무대일뿐이었을 꽃봄의 현우나 호로비츠의 지수에겐 결국 최후의 저지선앞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내몰려진다.   그러나 그들에겐 단지 잠깐만, 오직 임시일뿐이다.   유명연주가의 꿈을 버리진 않았고 시급한 민생고 때문이라며 그들은 독백하고 있었다.

 

현대판 사제관계물들의 공식은 또 하나 있다.  

말썽쟁이라도 알고보면 착한 아이라는 성선설을 바탕에 둔채 불우한 가정환경탓임을 내세운다.  그리고 좀 안되어 보이는 교사라도 생활인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라는걸 주지시키며 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하려 한다.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학교의 단체관람용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교사들이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하고픈 말을 대신해주는게 아닐까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봉건적 의미의 군사부일체론은 이런 부류의 영화에선 폐기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임금과 부모로서는 무한한 책임이 있지만 스승에겐 단순히 지식전달 + @ 정도만 되어도 그 역할은 충분히 한 것임을 보여주려한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사 역할은 단순할수밖에 없고, 그 단순성을 뛰어넘었던 것만으로도 스승의 은혜는 충분히 하늘과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는 것일지니 제발 우리 부모님들아, 여러 학생들아, 우리모두 도를 깨우치고 반성하자는 내용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불우한 가정의 학생들이 꾸준히 공부를 할수있게끔 하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는데에는 이런 영화들은 별로 대답이 없다.   그 안에서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사제관계와 속물적인 교사의 개과천선으로 인한 헌신과 희생만이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호로비츠를 위하여" 같이 예체능 사교육과 영재교육, 자폐아교육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보여질때 사회나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는 메아리조차 없다.   그저, 저 불쌍한것 쯧쯧. . .이라는 생각밖에는.

[피아노는 경민에게 있어 죽은 어머니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창구이자 자폐아인 마음을 표현할수 있는 도구였다.   위의 스틸컷을 보노라면 뚜렷한 재능을 가져도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환경속에선 꿈꾸는 일조차 못해보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호로비츠~"의 극초반 학부모 면담씬을 보면 사교육과 특기교육이 얼마만큼 왜곡되어 있는가, 그리고 자녀교육에 쏟아붇는 열정이 자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것이 극명하게 고발되고 있다. 

 

 

물론 지수도 자기의 욕심때문에 경민을 혹독한 훈련으로 내민다.  비록 피아니스트가 되진 못했지만 꿩대신 닭이라고 이제는 유능한 음악교육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매개체를 얻은 것이다.

 

경민을 데리고 콩쿨에 나간날 하필 잘나가는 친구가 심사위원이 되어 콩쿨대회에 나타난다.  경민이 무대에서 쓰러지는 순간 지수는 친구를 먼저 의식하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정도로 그녀에겐 교육보다는 동창과의 경쟁의식이 앞서 있었다.     

 

 

 

하우스콘서트에 갔을때 그림같이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현악4중주를 감상하고 칵테일파티를 하며, "우리 이렇게 가끔모여"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지수의 반응은 떨떠름하며 그 다음으로 이어진 대사는 다소 떨린다.   여기서 지수가 꿈꾸어왔던 것은 유명피아니스트가 됨으로 인한 그 부수적 결과물 더 관심이 많았다고 볼수 있다.   같은 학교, 같은 교수밑에서 배웠지만 그 유학이라는 매개체로 그 두 친구는 계급마저 확연하게 갈리우고 말았다는 것이 보여진다.  그런 모임을 가질만한 여유를 만끽하는 집단은 최소 중산층 이상일 것이고, 계급상승을 보장하는 것이 고학력 유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지수는 영화상에서 몇번이고 "유학만 갔더라도"를 지리하게 반복하고 있다. 

물론 경민의 즉흥연주로 인하여 모인 이들을 주목시키자 다시 지수는 의기양양해지며 잘난 친구에게 자랑을 하며 그때까지도 경민이가 그녀를 빛내줄 대상물이었을음을 알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런 계급상승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사나 부모를 이기적으로 만든 산업자본주의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전통사회에서도 국가나 공동체라는 개념보다는 가문의 개념이 더 강했고, 과거시험용으로 양육된 소위 장남들은 가문을 일으키거나 빛내기 위한 소모품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과거제라는게 사시 행시합격이나 콩쿨의 그랑프리같은것으로 변모했을 것이며, 그 씨족가문의 영광은 이제 직속부모와 직속스승에게로 옮겨졌을테니까.   단지 경민이의 나이대를 거쳐왔을 우리 모두는 대상물로 양육되었고, 우리 역시 제자나 자녀들을 나를 위한 객체로 삼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만약 늦게나마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내 욕심으로 아이를 도자기빚듯하게 될런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순진하고 착한 지수의 오빠는 "그 아이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너를 위한 도구로 삼지마" 라고 일갈하고 있다.   지수가 평범녀로서의 자신을 현실을 자각하게 된 것은 오빠의 호통이었다.   연주자의 실력도 그렇지만, 그 대안으로 선택된 교육자로서의 실력조차 그저 평범할 뿐이라는것마저 뼛속깊이 인식하는데 수많은 고통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재를 알아보는 눈은 지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우스콘서트에 갔을때 어지간한 선수들은 경민을 높이 평가하였고, 게다가 지수가 그 어린 천재를 가르칠 능력이 안된다는것마저 간파해낸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모성이 필요했던 경민과 성공의 도구나 캐리어가 필요했던 지수 양자의 이해관계의 접점이었다.   경민에겐 엄마의 품을 찾고 싶은 본능에 치는 피아노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미래의 꿈을 갖기엔 너무 어린 나이여서 스승의 뜻을 만족시켜줄수 없었고, 지수 또한 처녀로서 엄마노릇을 하기엔 그나마도 포기해야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중반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예정된 결말을 낸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지수가 불쌍했다.  세상사람들이 자기 주제를 너무 잘 파악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했다.   갖은 수난 봉변에 경민할머니에게 구타를 당한다던지, 엄마랑 올케가 돌아가면서 친구와 비교하면서 속을 긁는건 그렇다쳐도 그 천사같은 오빠에게 적나라한 비판을 듣고, 자기에겐 내적 경멸과 질투의 대상이었던 잘나가는 친구를 찾아가 울먹이는 소리로 그 친구의 말이 옳았음을 실토하고 경민의 미래를 의탁할때 그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뜨릴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 너무 잔인하지 않았을까한다.  그래도 친구앞에 무릎꿇는것이나 다름없는 사정을 하는 그것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는것조차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것 같아보인다. 

사실 객관적인 자기를 파악해야만이 주체적인 자아가 존재할 공간이 들어선다.   자기의 한계와 실태를 정확히 파악했기에 마음의 눈이 열렸고, 지수는 20년의 세월이 흐른뒤 인생에 있어서 가슴벅찬 순간을 맞이했다.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우리는 더불어 살기보다는 남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겨야하고 정상에 서는것만을 배웠다.   부모와 선생은 늘 그렇게 이야기해왔고, 청소년기를 거치며 부모의 바람은 우리의 바람으로 된다.  그 화려한 무대는 음악연주회일수도 있고 미술전시회일수도 있고, 5대양을 누비는 유능한 비지니스무대일수도 있고 대학의 강단일수도 있다.   그래야만이 부모의 환히 핀 얼굴, 주변의 부러움과 존경, 풍족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저 푸른 고지이다. 

그러나 점점 세상을 알게되는만큼 나 자신도 알게된다.   전공과는 관계없는 직업, 그나마도 근근히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나자신을 원망하지는 않는가.  나를 원망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부모를 미워하고 세상이 잘못된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지는 않는가.

나 자신을 올바로 보자, 그리고 자기를 비우자, 흘러간 일에 마음을 붙들어 매어있지 말고, 다음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고 실천하자.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그게 진정 자유에 이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1%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 이 순간도 수많은 꿈나무들이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극초반의 학부모 면담씬에서 보여주었던 엄마의 욕심에 의해 인형처럼 길들여진 아이들이 우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1%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들, 하지만 화려한 꿈을 꾸었던 우리들이라면 그 상처라 더 클수밖에 없고 치유가 오랜 기간에 진행될수밖에 없을 것이며 혹은 치유되지 못한채 담석처럼 머리 한구석에 굳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역시 "선생김봉두"와 더불어 성인들에게 더 감동을 줄수밖에 없는 영화인것은, 메이져리그로 못들어간 자괴심을 가지게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범재들에게 자기 직업관의 reset을 강하게 요청하며 정신차리라고 회초리를 날리면서도 그들의 불가피했던 환경과 가슴아픈 과거마저 따사롭게 감싸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나두 피아노소품곡들을 좋아하게될것 같다.   영화에 나온 곡들만이라도 제목을 찾아서 음반수집에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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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07-10-13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너리그, 넘버쓰리 다 슬픈 명칭들이죠. 영화 아마데우스를 오늘 다시 보았는데 살리에르의 모습이 더 아프더군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새순처럼.

Ryon 2007-10-13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탁월한 표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