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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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 가는 것은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

개미와 타나토노트는 고전으로 불릴 수 있는 명작이다. 그는 참신했고 치밀했다. 베르나르식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참신함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의 글에서 예전의 치밀함과 성실함을 찾을 수 없다. 제3인류는 베르나르란 왕국이 퇴색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충 떠올려봐도 비판할 거리가 참 많다.

  1. 무리한 설정, 그것을 애써 설명하려 하지만 실패함.
  2. 무리한 설정에 의해 탄생된 '멍청하고 전혀 매력이 없는' 주인공들
  3.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들
  4. 헐리우드적 클리쉐들(뜬금없는 추격신, 스트립 댄스, 적절한 타이밍의 사건들, 서양인이 세계를 구한다!)
  5. 개연성 없음, 반복되는 우연들(소설가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우연을 다루는 솜씨이다.)
  6. 뜬금없는 한국 찬양.
  7. 등등등...

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글을 쓰는 것은 내 필력으론 무리이다. 때문에 1과 2에 집중해 제3인류에 대해 비판해본다.


베르나르가 진화를 들고 왔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빠진 고리를 찾았던 그는 제3인류에선 인간 이후의 인류와 인간 이전의 인류를 창조했다. 생물의 크기가 그것의 생존력에 영향을 줄 것이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는 거인, 인간, 초소형 인간으로 이어지는 '인류 라인업'을 제시한다. 이것이 제3인류의 기본 설정이다. 설정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가 이 설정에 ‘그럴듯함’을 부여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과학이란 방법론을 가져왔고,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에 있다.


설정은 설정일 뿐이다. 설정은 소설가가 마련한 장치며, 소설 속 작은 세계다. 때문에 작가는 기독교의 신처럼 "설정이 있으라"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에 과학이란 이름을 붙이고 설정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면, 대충하면 안된다. 철저해야 한다. 그것이 베르나르급 작가라면, 초판으로 20쇄를 찍는 작가라면, 더욱 철저해야 한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인간 이전의 인류, '거인' 설정을 보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남극을 탐험하다 거인 화석과 거인이 그린 벽화를 발견한다. 화석과 벽화를 본 아버지는 이전에 거인이 지구를 지배했다고 믿게 된다. 베르나르는 독자가 주인공 아버지의 입장에서 거인 화석과 벽화를 보게 함으로써 독자가 이 설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전 지구를 지배했다는 거인들의 화석이 왜 오직 이 남극에만 존재하는거지?"


질문이 생겼던 것이다. 거인의 화석이 왜 남극에서만 발견될까? 라는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고, 예측 가능한 쉬운 질문이다. 그러나 그곳의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고고학자인 그들은 과학적 근거로 벽화의 내용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들과 미스터리들을 꺼낸다.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질문 하지 않을까? 우린 답을 알고 있다. 베르나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의 대답이 신화와 미스테리말곤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설정을 했기에, 주요 인물의 질문하는 입을 막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주요 인물들이 멍청해져버렸다. 독자는 그들에게서 학자의 매서운 눈빛을 느낄 수 없다. (그 학자는 벽화 근처에서 다이너마이트도 주저 없이 터트린다.)


주인공 다비드를 잠시 살펴보자. 1권 162페이지를 보면 피그미족이 인류의 미래라고 주장하는 다비드와 그것에 반대하는 콩고 가이드의 대화를 볼 수 있다. 잠깐 보자.


- 내가 보기에 피그미들은 미래의 인류를 대표하고 있어요

- 피그미들이 미래의 인류를 대표한다고요? (중략)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스마트폰이 없어요! 성도 없고 그저 이름만 있죠. (중략) 그들은 말귀를 도통 못 알아듣죠. (중략) 그들은 거울을 보면 환장을 해요. 거울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자들이죠. (중략) 그들은 거울 단계를 넘지 못한 아이들일 뿐이라고요!

- 그렇다면 미래는 아이들의 것일지도 모르죠

- 피그미 사회는 여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요. 수효도 여자가 더 많아요. (중략) 유아들은 사망률이 높아요. 피그미들의 수명은 아주 짧아서 4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죠. 정말이지 진화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인간들이라고요. 하물며 미래의 인류라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중략) 커지는 것이 미래에요. 모든 전문가들이 그 점에 동의하고 있어요

- 자연은 때때로 전문가들의 허를 찌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 모두의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에도 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다> 라고 했죠.

- 아무튼 이러고저러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미래의 인간은 당연히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아름답고 더 건강할 겁니다. 그건 분명해요!

- 피그미들이 이곳의 풍토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들이 에이즈에도 저항력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어요. 그러지 않은가요?

- 이미 대답했는데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군요. 그들은 병원에 가지 않고 죽기 때문에 무슨 병을 앓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이것은 기묘한 대화이다. 피그미들을 욕하는 가이들의 말도 신뢰가지 않지만, 다비드의 말버릇은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이드는 그나마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다비드에게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다비드는 어떤가? 그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아이들의 것일지도 모르죠",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죠". 다비드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을 설득시키려면 저런 '잠언'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은 귓등으로 들어야 한다. 저렇게 '정신승리'를 외치는 주인공에게서 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다.


1권 353페이지를 보면 오로르를 초소형인간(제3인류) 창조 프로젝트에 끌어들이기 위해 다비드가 오로르를 설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참혹한 대화다.

- 오비츠 대령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어떤 반동 세력에게도 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자는 거에요. 

- 더 작은 인류, 그리고 더 여성적인 인류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죠? 

- 오비츠 대령은 그들이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키가 아주 작고 저항력이 강해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침투해서 작전을 벌일 수 있는 특수 요원들 말이에요.(중략) 

그들이 미니 첩보원들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한들,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죠? - 그 프로젝트는 이란과 연결되어 있어요. 자파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가 첩보원들을 보내 그들의 군사 시설을 파괴할 수 있다면 늙은 수염쟁이들의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민주적인 대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 난 이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중략) 문제가 되는 것은 핵무기나 이란이 아니라 인구 과잉이라구요. 

- 당신이 그렇게 냉소적으로 나오다니, 뜻밖이군요. 

- 이건 냉소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에요. (중략) 아무튼 그들이 죽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에요. 

-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신이 이성의 편에 서도록 만들 거예요.


이토록 생각없는 인물간의 대화를 보는 것 만으로 가슴이 아픈데, 그 인물들이 선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이 더욱 슬프다. 게다가 다비드는 대화 말미에 "당신이 이성의 편에 서도록 만들거에요"라며 또다시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있다. 신념은 굳건한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머리가 다비드에겐 없다. 오직 믿음과 신념으로만 똘똘 뭉쳐진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베르나르는 자신이 만든 주인공 다비드가 하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자, 다비드가 가진 신념이란 굉장히 무서운 신념이다. 그가 오로르에게 제안하는 것은 유전공학을 이용해 초소형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소형 인간을 첩보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생각이다. 인류를 걱정하는 주인공이라면 이것이 생명윤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제3인류가 이후에 어떤 상황을 만들것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야 한다.(전생에 그가 만든 인간이 거인을 멸종시켰는데, 어떻게 그와 비슷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다비드는 이런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다비드가 그녀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다비드는 이란이란 거대 악을 막아야 한다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그녀를 설득한다. 이거, 위험하다. 거대 악을 설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남을 설득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찾을 수 없을 때나 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욕하는 정치인들이나 사용하는 방식이다. 베르나르는 이런 인물을 선한 주인공의 자리에 놓는 것은 피했어야 했다.(악역으론 어울린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초소형 인간을 만들고, 그들을 첩보원으로 만들고, 그들을 이란 사태의 현장에 투입하려면 대략 20년은 걸릴 것이다. 이것은 너무 늦다. 너무도 늦다. 윤리적 문제를 떠나서 실용적으로 살펴도 고개를 젓게 하는 방안이다. (물론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초소형 인간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다행히 그들의 발달 속도가 인간보다 10배정도 빨라 몇년 안에 초소형 인간을 이란에 투입하지만, 다비드가 오로르를 설득하는 시점에서 다비드와 오로르는 초소형 인간의 발달 속도가 인간보다 10배 빠른지 알 수 없었다 -오! 만들고 보니 발달 속도가 10배 빠르네? 만세! - )


그렇다면 우리들의 똑똑한 주인공들이라면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르는, 다비드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을 할 수도 없다. 왜냐? 베르나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설정을 가져왔고, 그냥 가져만 놓는 것이 아니라 무리하게 그것을 이야기 속에 녹이려 했다.


질문하지 않는 인물들, 생각하지 않는 인물들, 자신만의 신념만이 가득한 인물에게서 난 전혀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비정상적 결정을 옹호할 수단을

"이것은 운명이에요, 징후에요!"

라는 말로만 베르나르가 대신한다면, 맙소사,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


베르나르는 인류를 걱정하기 전에 갈수록 지능이 퇴화되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해야 한다. 베르나르는 그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질문하는 능력을 고양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본인의 지능을 진화시켜야 한다. 이제 인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시라. 지구의 멸망보다 당신의 소설이 더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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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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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설정. (-)300원, 전혀 똑똑해 보이지 않은 주인공들 (-)100원, 헐리웃 영화에서 반복되는 클리쉐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성의없음 (-)100원, 상상력 하나 믿고 책을 쓰는 그지만, 그 상상력도 이젠 진부함 (-)200원, 그래도 가독성은 좋아서 시간때우기 적합함.(+)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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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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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이상한 것이다. 

삶은 단 하나의 육체를 숙주 삼아 기생한다. 때문에 하나의 삶이 완벽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육체를 매개로 통과되는 자신 뿐이다. 그런데 그 시작과 끝, 그리고 과정 중에는 각기 다른 삶들이 관계라는 이름으로 개입된다. 삶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스스로를 시작하지만 삶이 마주치는 여러 관계와 사회라는 괴물은 이미 수많은 삶을 경험 했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얻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 시작하는 삶에게 자신들의 해답을 꺼리낌 없이, 무자비하게 적용한다. 바로 이것이 대부분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문제의 주범이라 하겠다. 
삶은 스스로를 살면서 때때로 "너의 인생을 살라", "너 자신을 찾으라"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글쎄, 의아하다. 그들은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무게감을 알고 있긴 한것일까. 삶은 자신의 숙주인 육체의 무게보다 더욱 더 무거운 것을 어깨에 지고 있다. 그 무게 때문에 때로는 살아야 하고 때로는 죽어야 한다.

오가이가 먼저 소개하는 것은 그 무게 때문에 죽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자신의 '주군'이 죽었을 때 스스로의 생명을 저세상에 바쳐야 하는 규칙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아, 그것 뿐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하나의 규칙은 여러 양태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야기가 탄생된다. 물론, 탄생되는 이야기는 비극의 색체를 띌 수 밖에 없다. 

주군이 곧 죽을 것 같다. 주군의 가신들이 간청한다. 자신도 주군을 따라서 죽게 해주세요. 주군이 허락한다. 그들은 감사하다. 
주군이 곧 죽을 것 같다. 주군의 가신 중 한명이 간청한다. 자신도 주군을 따라 죽게 해주세요. 주군이 반려한다. 그는 당혹스럽다. 
주군이 죽었다. 주군을 따라 죽은 사람은 세상에 없지만 그의 가족과 자신은 명예를 얻었다. 
주군이 죽었다. 주군을 따라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사람은 생명을 유지 할 수 있으나 명예를 잃었다.
가신의 동료 A외 몇명이 그를 욕합니다. 가신의 동료 A외 몇명이 그를 비웃습니다. 
그는 작은 명예라도 얻기 위해 자신이 원래 원했던 죽음의 길을 간다. 
그의 죽음을 그의 부인이 응원합니다. 그의 자식들이 그의 죽음을 응원합니다. 

글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해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 이쯤에서도 충분히 당혹스럽다. 그놈의 명예가 무엇이길래 감히 생명의 무게를 초월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생명이란 가치는 그 시간 그 땅에서는 이정도의 무게만을 가질 뿐이다. 삶에 선행하는 규칙의 힘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가의 그 방법이란게, 너무 잔인했다. 잔인함을 과장되게 서술할 때 잔인함의 무게는 오히려 감소된다. 잔인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 할 때 그것은 더 배가된다. 오가이는 너무 차분하고 건조한 문체로 이 사건들을 서술한다. 덕분에 독자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구경 할 수 있다. 덕분에 작가는 나를 웃긴적이 한번도 없으나 이 이야기의 장르가 블랙코미디인양 독자의 입에선 어이 없는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그렇게 책 한장 한장을 넘기다 마침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독자는 이것이 제 3자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이때 블랙코미디는 호러가 된다. 몸의 소름은 이럴 때 돋으라고 있는 것이다. 

"잔인함이란 피안이나 판타지에 속해있지 않다. 진짜 잔인함이란 삶 가운데, 바로 네 옆에 있는 것이다." 

*

오가이가 두번째로 소개하는 것은 그 무게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가엾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삶이 원하는 길과 삶 이전에 요구되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이의 걸음걸이는 앞으로 곧게 뻗어나가지 못한다. 그것뿐만이라면 다행이다. 그의 걸음걸이는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들도 곧게 뻗어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는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나라에서 돈을 줘가며 유학을 보내줬다. 그는 자신이 자랑스럽다. 
어느날 자신 안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나오지 않은 것이 뽕글 하고 올라온다.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닌것 같은데? 
머리 속에 물음표가 여기 저기 생기고 그는 혼란스럽다. 맙소사. 이 상태에서 그는 한번도 경험치 못한 사랑까지 경험한다.
사랑은 자신의 삶을 응원한다. 그러나 사랑은 주어진 삶에 반한다. 
사랑은 자신의 욕체의 욕망을 응원한다. 그러나 사랑은 주어진 삶이 선사한,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나 자신의 것이된 욕망에 반한다. 
어쩌나? 어쩌나?

이런 상황에서 우유부단이란 성질이 그의 성격에 더해진다면 이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여기 저기서 피어난다. 아아, 물론 비극적 형태를 띄게 된다. 꿈이 있으나 그에 걸맞는 능력과 용기를 갖지 못한 인간의 삶이란 가련하다. 그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일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을 선택해 지상 아래로 내려 오게 할 단호한 의지와 용기가 그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꿈은 자신의 삶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기쁨을 선사하고는 멀리 가버렸다. 그에게는 그 꿈을 붙잡을 용기도 없었으니 도리가 없다. 그저 슬퍼할 수 밖에. 

소설은 무서운 것이다. 소설은 당위적인 운명의 비극적 색깔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만든다. 아름다운 삶의 색만을 체험한 독자에게 이것은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이 간접 체험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찾을 수도 있겠다, 또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득 그것이 독자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독자 스스로 느끼게 될때, 소설은 때때로 어떤 선동문 보다 크고 강력한 목소리로 그에게 행동을 요구한다. 

"네 삶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치 말아라. 그러나 단호히 그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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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1
채운 지음 / 그린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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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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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비밀을 안 세계의 부자들
박은몽 지음 / 문예춘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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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런 책들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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