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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 2016 겨울 그리고 2017 봄, 빛으로 쓴 역사
김예슬 지음, 김재현 외 사진, 박노해 감수 / 느린걸음 / 2017년 10월
평점 :
사실 난 시험공부를 핑계로 대한민국 인구의 1/3(누적집계)이 참여했다는 촛불집회에 단 한 차례도 참여하지 않았다. 단지 매주 쏟아져 나오는 새롭고도 화나는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촛불시민들의 행보를 보며 새로운 미래에 대해 희망을 놓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결국 정말로 ‘새로운 미래’는 왔고, 현재는 촛불혁명의 원인이 된 전대통령과 더불어 이 부조리한 나라의 뼈대를 미리 튼튼히 세워 놓은 전전대통령마저 구속된 상태다.
사실 가까운 과거의 이 날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 날들을 영원히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선 정리된 기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록서가 될 책 ‘촛불혁명’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 때 그 곳에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몇 십 년 뒤 태어나 그 날을 모르는 아이들 모두에게 뜻깊은 기념서가 될 것이다.

책 ‘촛불혁명’은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왜 광장에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당위를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던 날부터 시작해 JTBC의 태블릿 PC 보도, 국정조사 청문회, 국회 탄핵안 표결, 늦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이어진 총 스물세차례의 촛불집회,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한 사진들과 사실로 빼곡히 기록하고 있다.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그 날은 내가 다니던 연구소의 개소기념일이었다. 개소기념일인데 연구소에 남아있기 싫어 자전거를 타고 꽤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 갔다. 그런데 도서관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으로 연락이 쏟아졌다. 대체 무슨일인가싶어 기사를 찾아보니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하고 있고, 그 안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중이던 고등학생들이 타고있다고 했다. 얼마 후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왔고, 그 소식을 친구와 가족들에게 전하며 다같이 안도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보였고, 결국 많은 아이들이 희생됐다. 조용하던 도서관은 그날 곳곳에서 세월호이야기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날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엄마와 어떤 통화를 나눴는지, 도서관에 어떻게 왔고, 또 어떤 마음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이처럼 그 날은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섬광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 기억은 깊은 상처가 되어 아마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재벌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10년을 가지 못한다(權不十年)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재벌은 어떨까? 정권은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바껴도, 재벌은 계속되고, 그 재벌은 내가 죽어도, 내 후손이 죽어도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박근혜 김기춘 최순실보다 이건희 이재용이, 정치권력보다 경제권력이 이 사회의 부조리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홉개 재벌 그룹 총수가 한자리에 ‘끌려나왔던’ 1차 국정조사 청문회는 이 역사의 날들 중 나에게 가장 통쾌했던 장면이었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구태세력을 처벌하고, 다시는 그런 세력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가 더이상 재벌 위주의 경제가 아니라 경제민주화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반드시 밀고나갔으면 좋겠다.
박근혜

책에는 박근혜의 ‘망언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박근혜를 ‘닭’이라고 표현하는걸 싫어한다. 왠지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여성혐오구절에서 박근혜의 생물학적 성sex을 부각하여 인용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창 국정농단 뉴스가 쏟아질 때에도 박근혜의 성형시술, ‘길라임’ 등이 부각되었던 것도 못마땅했다. 그건 박근혜의 특징 중 하나이지 여성 대통령의 특징은 아닌데, 박근혜의 무능을 박근혜가 여성이기 때문으로 귀결시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닭근혜’란 말을 싫어했다.
그런데 저 망언들을 보니, 참...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이 박근혜를 ‘닭근혜’로 불렀는지 알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닭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물론 이건 박근혜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박근혜라는 인간 자체의 무능에 따른 명명이다(강조!).
문재인 대통령의 과제
책에선 촛불혁명이 결국 성공한 혁명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말한다. 맞다. 새 날은 왔고, 우리나라는 점차 헬조선에서 벗어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마무리 되었다’라고 말하기에는 좀 더 비판적 입장을 유지해야 할 것 같다. 어디에 서서 그날의 기억을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기억되거나 비극으로 마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송경원의 ‘<1987>, 우리 모두 뜨거웠던 그 해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중 인용).
이재용은 결국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MB는 구속되었지만 4대강은 이제 녹조 낀 모습이 당연한 지경이다. 정치·경제·사법 적폐는 여전히 기득권을 지키고 있고, 힘 없는 사람들은 결과뿐 아니라 시작과 과정에서 역시 평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개헌 논의가 활발하다. 작년 대선후보들의 공통된 공약이었던 지방선거 동시 개헌 국민투표 때문이다.
사실 개헌 논의는 꾸준히 있어왔다. 박근혜 집권 때 국정농단 프레임을 뒤집으려 개헌 카드를 꺼냈던 적도 있었고, 2009년 MB 역시 권력 구조 개편 위주의 개헌 논의를 주도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한겨레21은 기사를 통해 헌법은 통치권력의 정립이 주요 논제가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 인권선언)의 문자라며 권력구조 개편에 한정하는 개헌 논의는 개소리이니 집어치우라고 일갈했다.
현재 정치권의 개헌 논의를 보면 그때와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서 야당은 대통령의 4년 1차 연임제에 초점을 두고 이원집정부제로 맞서고 있다. 적어도 정치권에선 인권에 대한 논의는 없다. 역시나 권력구조 위주의 논의이다.
09년 한겨레21 기사에선 대한민국 헌법과 선진헌법을 비교하며 선진헌법이 왜 ‘선진적’인지에 대해 낱낱이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 헌법의 1조는 주권 지향적이다. 반면 선진 헌법의 1조는 인권 지향적이다. 헌법이 권력체제의 문제인지, 권리장전의 선언인지에 대한 결정적 차별이 여기서 시작된다. 한국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고민할 때만 헌법을 들춰본다. 선진국에선 인권이 침해당할 때 헌법을 들여다볼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헌법을 만만하게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기구의 의무다.
1996년 개정된 독일 기본법(연방 헌법) 1장 1조다. 독일 연방은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선언이다. 나라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헌법 첫 조항의 구실인 셈이다. 특히 국민의 사명이 아니라 국가의 의무부터 규정한 대목은 한국인의 눈에 이채롭다.
선진 헌법은 ‘세부적’이다. 반면 한국 헌법은 ‘포괄적’이다. 한국 헌법의 평등권 조항은 간단하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다른 기본권 조항도 비슷한 수준이다.
남아공 헌법의 평등 조항은 200자 원고지 5장에 이른다.
평등은 모든 권리와 자유에 대한 완전하고 동등한 향유를 포함한다. (중략) 국가는 인종, 사회적 성(gender), 생물학적 성(sex), 임신 및 혼인 여부,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취향, 나이, 장애, 종교, 양심, 믿음, 문화, 언어 그리고 출생 등을 이유로 누구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후략)
현 대한민국의 갈등 문제를 남아공 헌법의 평등 조항 하나로 모두 없앨 수 있을만큼 세부적으로 정의롭다. 사실 남아공 헌법은 내용뿐 아니라 개헌 논의 과정 역시 참여·숙의 민주주의의 전형이었다고 한다. 이에 남아공이 개헌 논의를 하는 그 2년 동안 남아공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상상력과 인권 감수성은 크게 확장되었다고 평가된다(김영수 전 경상대 연구교수).
여전히 주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어르신들과 소방관 추모 기사에서마저 여성 대 남성의 구도를 가져와 역차별 논쟁을 끌어내는 일부 남성들, 그리고 재벌이 곧 기업이고, 그들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살고, 나라가 잘살아야 우리가 잘 산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우리 엄마도, 남아공 사람들처럼 이 나라가 어떠한 의무를 가져야 하고,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논의하다 보면 결국 그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것이 진정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수많은 난관을, 책 ‘촛불혁명’의 주인공들처럼, 즉 우리들처럼, 우리의 삶을 스스로 지키려 노력하며 평화적으로 한발 한발 헤쳐 나간다면, 정말 언젠간 Oh Happy Day!가 올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