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광선
쥘 베른 지음, 박아르마 옮김 / frame/page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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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 광선'을 무척 좋아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가... 아트시네마가 아트선재센터에 있을 때였다. 볼 때마다 마지막 장면에서 쿵쿵쿵 맘이 설레곤 했다. 
녹색광선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그리고, 
"Oui!"

나는 네다섯번의 극장 관람 끝에 녹색 광선을 볼 수 있었고, 이경험만으로도 '녹색광선'은 나에게 인생영화가 되었다.

영화가 주는 감동도 특별했지만 영화 관람자체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우리나라에 번역·출간되지 않았던 작품인데, 작년에 책이 나왔다. 만든 사람의 정성이 듬뿍 느껴지는 책이다. 
책이 나온 것을 알고 바로 사두었다가, 이제 읽었다.

이 책은 페이지를 넘기기가 속상할정도로 재미있다.
캠벨 양에게 결혼하라고 보채는(??!) 19세기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흥미로웠고, 녹색 광선을 보기위해 열정을 다하는 인물들도 무척 사랑스러웠다. 
여기서의 녹색 광선은 그저 말랑말랑한 낭만이 아니다. 그것을 보기까지는 예측 불가능한 장애물과 많은 실망이 있었다. 그것을 찾아 헤매는 행동에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포함되어있다. 인물들이 녹색광선을 보려고 항해를 하고, 섬을 찾아다니는 장면을 읽으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나는 왜 녹색광선이 보고싶은가 생각했다. 

나는 늘 무언가가 보고 싶었다. 

그럴때마다 영화를 찾았다. 텔레비전과 모니터는 도처에 있으니, 그것이 가장 가깝고 당연한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영화관 안에는 스크린에 투영되는 또다른 광선이 있었다. 나는 혼자서, 가끔 둘이나 여럿이서 그것을 자주 쫓았다. 아주 열심히 쫓았다.
그리고 책이 있었다. 책은 내가 움직일 힘이 없어도 펼쳐 읽기만 하면 그 안의 세계로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서는 더 확실한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된다. 더 개인적이다. 혼자라서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생각해보면 가슴 뛰던 모든 순간은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요즘은 영화관에 가기 보다는 책을 더 자주 펼친다. 나와의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움직일 힘이 전보다 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꿈과 사랑은 비틀거리기 마련이라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히브리서 11장이나 고린도전서 13장에나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그런 건 가닿을 수 없는 기적같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그런데 녹색 광선을 읽으니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독서도 빛을 쫓는 일이다. 이 책에는 심지어 수많은 석양과 아름다운 녹색광선이 나온다. 빛 없이는 읽을 수도 없다. 종이에 빛이 닿지 않는다면 글자도, 문장도, 문단도 없이 암흑뿐일 것이다. 그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아무 힘이 없는 거라고 누가 말 할 수 있을까? 아니, 사방이 빛인데...

모두 찾는 과정이다. 여행이나 모험을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질문을 가지고 있는 한, 내가 찾고 싶은 것이 있는 한.
나는 매일 한숨을 쉬면서도 두리번 거리고, 침대에 모로 누워서도 바깥을 상상한다. 매일 의심과 싸우거나 협상을 한다. 

녹색 광선을 쫓던 캠벨과 올리비에는, 그 무엇을 찾았다.
그것은, 찾던 것 이상이었다. 해피엔딩에 헤벌쭉 좋아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나에게는 낭만이란 가치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낭만이 실현되는 광경이 보고싶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과 사랑이 존재하는 세상이.

어쩌겠는가, 나는 생긴대로 살게 될 것이다. 찾고 찾으면서. 보고 읽으면서. 그러다가 이렇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되니까.
녹색 광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이니까


전설에 따르면, 녹색 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p35

)그녀는 긴 산책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서 몽상에 빠져들었다. 어떤 몽상이었을까? 녹색 광선과 관련이 있는 전설에 대한 상상? 자신의 마음속을 또렷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그걸 봐야만 하는 걸까? 자신의 마음속?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p111

(...)그런데 그 소용돌이의 표면엔 참으로 놀라운 색채들이 있었답니다. 꼭 푸른색 비단 바탕에 수놓아진 큼직한 기퓌르 레이스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빛에 물든 포말 한가운데로, 거기서 보일지 모르는 어떤 새로운 색채를 찾으려고 뛰어들었던 거랍니다. 좀 더 앞으로, 좀 더 가자고 말입니다!(...)
-p134

"싱클레어 씨,"그녀가 다시 말했다. "녹색 광선은 제 소유물이 아니에요. 녹색 광선은 누구나 볼 수 있어요. 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동시에 보이는 빛이니까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까 원하신다면 저희와 함께 녹색 광선을 보러 가시면 돼요."
"기꺼이 가겠습니다, 캠벨 양."
"하지만 인내심이 많이 필요해요."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p136

"바다에서 위험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올리비에 싱클레어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두려워하다니요, 저는 정말 겁내지 않아요. 감탄하는 걸 두려워할 까닭이 있을까요?"
-p160

"아니 캠벨양, 그럼 시인들이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꿈같은 이야기들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고집센 멍청이가 다시 말했다.
"물론이지요." 올리비에 싱클레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시는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작품처럼 거짓이라는 인상을 줄 겁니다."
"당신도요?" 아리스토불러스 어시클로스가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화가로 알고 있지, 시인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모두 같은 거예요." 캠벨 양이 말했다. "예술은 형태만 다를 뿐 모두 하나라고요."
-p187

"두 분, 두 분께서 그토록 열렬하게 말씀하시는, 소위 말하는 요정들 중에서 하나라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당신의 그 점이 틀렸다는 거예요. 그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당신이 안타깝네요." 꼬마 요정 중 단 한 명의 머리카락도 적에게 넘겨주지 않을 듯싶은 캠벨 양이 다시 말했다. "사람들은 요정들이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곳곳에서 나타나 인적 드문 협곡 사이를 미끄러지듯 날아가고, 깊은 골짜기에서 올라오고, 호수의 수면을 날아다니고 헤브리디스제도의 잔잔한 바다에서 뛰놀고, 북쪽의 겨울이 불러온 폭풍우 속에서 노는 모습을 본답니다. 그러니 제가 끝내 찾으려는 녹색 광선이, 수평선에 술 장식이 끌리는 발키리의 스카프라고 여기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P189

"사랑하는 헬레나, 하지만 우리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 광선을 끝내 보지 못했어요!" 올리비에 싱클레어가 말했다.
"우리가 더 잘 본 거예요!" 젊은 부인이 속삭였다. "우리는 행복 자체를 보았어요. 전설에 나오는, 그 현상을 관찰하면 얻게 된다는 행복 말이에요! 사랑하는 올리비에, 우리는 그걸 찾은 것으로 충분하니까 녹색 광선을 찾는 일은 그걸 모르는 사람들, 그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해요!"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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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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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 이름만 많이 들었지,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내가 몰랐던 것들.
1. 1800년 대에 쓰인 고전이다.
2. 작가가 여성이다.
3.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존재(괴물)는 말을 할 수 있다.
4. 엄청 슬프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로만 익숙한'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존재)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소설이었다는 사실도, 내가 대충 알던 사실이었다. 리베카 솔닛의 너무나 멋진 책 '멀고도 가까운'을 통해 이제야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알게되니 '프랑켄슈타인'을 몹시도 읽고싶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쓰기까지, 19살 메리 셸리의 인생은 이러했다.

 메리 셸리의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은 급진 정치 사상가였고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최초의 여성주의 이론서를 쓴 작가였다. 메리 셸리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은 직후 산욕열로 인해 사망했다. 몇년 후 윌리엄 고드윈은 재혼을 하는데, 메리와 그녀의 아버지의 사이를 질투한 새엄마는 메리를 교육시키지도 않았다고....! 메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수많은 책을 읽으며 독학한다.
 17살의 메리는 미남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 사랑 또한 그녀를 지독한 고독으로 빠뜨린다. 퍼시 비시 셸리는 당시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유부남(자유 연애를 지향하는) 이었고, 메리는 그럼에도 그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새엄마의 딸 (제인)을 대동하고..)이로인해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고 8년간 지독한 가난 속에서 유랑하며 산다. (엘르 패닝이 메리 셸리로 연기한 영화 '메리 셸리'를 보면 이 퍼시라는 인간은 제인과도 분방한 연애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아...모든 걸 버리고 그를 선택했는데 아오...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을까...) 게다가 메리의 첫딸이 태어난지 11일 만에 사망한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찬 고통이었을까 상상조차 힘든데 머지않아 메리의 언니(메리의 생모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윌리엄 고드윈과의 결혼 전에 낳은 아이)가 자살하고, 남편이라는 인간 퍼시 비시 셸리의 전처 해리엇 셸리 또한 자살한다. 여기까지의 인생이 메리 셸리가 20살도 되지 않은 19살 남짓까지의 인생이다. 
 그리고 어느 날, 제네바에서 메리는 시인들과 의사가 모인 친교자리에서 각자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한편씩 쓰자는 약속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녀, 메리 만이 이야기를 쓰고 완성한다. 그것이 '프랑켄슈타인'이다.

(-문학동네 프랑켄슈타인 해설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걸작을 쓰고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 후에도 메리 셸리의 인생은 고난으로 점철 된다. 그녀의 아들이 죽고 마는데, 그 후에 그녀는 심한 우울증을 겪는다. 남편 퍼시 셸리는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메리를 심란하게 했으며, 그도 머지않아 익사한다. 남편의 죽음 후에 메리는 많은 이들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독신으로 살았다고.

 자꾸 작가 메리 셸리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이 소설에서 그녀의 인생이 너무나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보기 때문이다.

 나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존재(이름도 없다니, 슬프다.)가 말을 할 수 있는 줄 몰랐다. 나는 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언젠가 얼핏 영화나 만화에서 본 이미지로만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초록색 피부에, 관자놀이에 큰 나사를 박고 있는, 덩치큰 괴물로만 생각했다. 소설이 3분의 1이 지난 즈음, 그 존재가 빅토르 앞에 나타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소연 하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렀다.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맞다.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가슴은 바짝 타들어 바스라지거나, 눈물이 가득가득 차서 뻥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 존재는 친절과 애정을 위하여 심지어 언어를 습득한다.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언어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가 그것을 습득하는 것이다. 단지 따뜻한 관심과, 우정을 위해서. 외롭고 싶지 않아서. 받아들여지고 싶어서. 혼자라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를 창조한 자,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자 조차도 그를 혐오한다.  

 이 책을 지배하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고독을 혼자 있는 시간이라 하고, 외로움을 원하지 않는 고독이라고 한다면 온갖 외로움이 여기에 있다. 그로인해 슬픔도 분노도 공포도 생겨난다.

 얼마전 읽은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중 한 글귀가 떠올랐다.

'(...)침묵은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억압된 것, 지워진 것, 들리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 바다다. 그 바다는 말하도록 허락된 사람, 말해질 수 있는 것, 들어주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섬들을 에워싸고 있다. 침묵은 여러 이유에서 여러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말하지 않은 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바다를 갖고 있다.
-리베카 솔닛 '침묵의 짧은 역사' 中'
침묵속에 침잠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 또한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지만, 나는 그 시간이 문득문득 무섭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무서운 시간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마주해보니,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고 매우, 아주 슬픈 거다.
내가 그렇게 외로웠구나. 네가 그렇게 상처받았구나. 마음이 너무 쓰린 거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를 갈망한다. 절절하게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드는 불완전한 이야기는 어느덧 영혼을 갖게 되고, 사랑할 것을 찾아 헤맨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도 쓰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사랑하는 것이 남아 있는 한 두려움의 여지도 항상 남아있기 마련이다. (...)
-p122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의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 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
-p129

"(...) 오, 프랑켄슈타인,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대하면서 나만 짓밟지는 말란 말이다. 나야말로 당신의 정의, 심지어 당신의 관용과 사랑을 누구보다 받아 마땅한 존재니까. 기억하라, 내가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나는 당신의 아담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 잘못도 없이 기쁨을 박탈당하고 당신에게서 쫓겨났다. 어디에서나 축복을 볼 수 있건만, 오로지 나만 돌이킬 수 없이 소외되었다. 나는 자애롭고 선했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다시 미덕을 지닌 존재가 될 테니."
-p132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저버리든 불쌍하게 여기든 하라. 그때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내 말을 들어라. 죄지은 자라 해도, 아무리 잔인한 죄인이라 해도, 인간의 법은 선고를 내리기 전 변론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가.(...) 내 말을 들어달라. 그 다음에,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지가 있다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파괴하도록 하라."
-p134

그런데 이제, 온 세상을 앞에 둔 나는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까?
-p186

"(...)네놈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자신의 눈에 저열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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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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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순간들이 있다. 그 많은 순간들을 나열하자니 손가락 마디가 벌써부터 쑤셔온다. 나는 나인데, 나를 '여자'라고 그 사람이, 이 세상이 알려주는 순간들이 있었다. 너는 너.라고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나는 많다고 썼다. 내가 여자로구나, 자각한 순간의 느낌들은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대게 수치와 열등감, 모욕 분노 슬픔 자괴감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대게 희미하거나 경계가 모호해서 개별적으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어떤 목소리가 내게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어쩔 땐 그것이 모두 한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일생에 걸친 뫼비우스 띠를, 그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앞으로 나아가지만 같은 자리로만 돌아오는 것 같은 무력감, 절망감. 그 감정들은 그 당시 정체를 깨닫지 못했을지언정 피부 아래에, 살과 핏속에 어떻게든 남아있어서, 언제고 파도처럼 돌아온다. (여러 모양과 여러 강도로.) 그리고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난다. 


 여자의 대표적인 다른 말은 남자이므로,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남자들은 어떨까? 내가 남자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까. 그 순간을 특별히 기억할까?


 배수아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미로를 따라간다. 설명하고 해석하기보다, 그 통로를, 좁고 어둡고 막연한 그 미로를 독자에게 안내한다. 이 세계는 낯설고 꿈인 듯 싶다. 아마도 어린 소녀들이 세상을 보는 모습이 반영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서사는 복잡하고 몽환적이지만 감정은 분명하다. 처절하고 슬프다. 슬프고 슬프다. 하지만 슬픈 데에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마치 '갈라진 땅에서 솟아나듯 서'있던, 이 소설집의 첫 소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의 아이는, 마지막에 실린 소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소녀이며, 이 책에 실린 모든 소설의 여자아이들이다. 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수미상관은 마치 여러 명이 결국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연대'하고 있다. 소녀이고 엄마이고 할머니인 그들이 모두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된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 부당함이나 내가 느낀바를 말하면, 그것은 곧바로 다른 언어가 되는 경험을 했다. 나는 이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그런 상황에 대한 절묘한 은유와 묘사를 보았다. 나는 오히려 배수아 작가가 비유와 은유의 미로속에 숨겨놓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벽에 부딪히는 일상의 말보다 후련했다.


 우리는 쉽게, 그것을 알겠다고, 말하고 해석한다. 가끔 공감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감보다 해석에 급급한 것이 아닌지. 해석한다고 그 대상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린 너무 급히 해석하고 알아채려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직관'이란 이런 공감,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겹겹이 쌓은 이야기의 층이 너무나 섬세하고 날카롭고 뜨겁다. 

나는 이야기를 가만히 손에 들고 읽었을 뿐인데, 이 세상의 누군가 단 한명은 기꺼이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겠다고, 너를 해석하지 않고, 너의 아픔과 수치와 분노를 나도 느낀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사라지지 말라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지언정 우리 회귀해보자고 따뜻하고 작은 손이 가만히 내 손을 쥔다. 

  




소모된다는 것은, 모습이 다시 돌아오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뜻이죠. 사라지는 방식은 테크닉이고, 회귀하는 방식은 에너지라고 했어요.
-p27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p94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
-‘뱀과 물‘p191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그건 모두 소문이니까. 소문은 그냥 꿈같은 거란다. 소문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꿈은 우리를 해치나요?"
"꿈은." 여승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문질러 껐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야."
-‘뱀과 물‘p204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뱀과 물‘p223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힘차게, 그리고 슬픔 없이 끝내는 편이 나았다.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시라고는 평생 한 편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내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잘 알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고, 오직 직관에 기대서 슬픔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p238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이 되는 것, 형체가 사라져버리는 일이었어요.(...)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p246

(...)너무 이른 죽음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사람들은 늘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그런데 내 느낌이란 무엇일까? 형체가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가방과 같은 이것, 파국을 향해 산란되는 이것.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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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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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평생을 인정 받으려 애쓴 것 같다. 아이때는 착한아이로,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사회에 나와서는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는 인간으로 인정을 받으려 애써왔다. 계속 그런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아주 착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우월한지에 대한 자각이 있었고. 그 기준과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했다. 이 나쁜 습관은 지금도 계속된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지도 않은 싱글의 나는, 한국 사회에서 볼 때 여러모로 열등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특히 행복을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 듯 보였다. 심지어 사랑을 하고 받기에도 자격이 필요한 듯했다. 나는 점점 많은 실패와 낙방을 했다. 그 횟수가 쌓이자, 인생 자체에 낙방하는 것만 같았다. 
 
 장강명 작가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은 나의 답답함과 오랜 절망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이었다.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 나란 사람은 왜 이렇게 부족하고 사회에 부적응하는 것일까라는 지겨운 질문에, 개인도 개인이지만 시스템이 문제일 수 있다는 의견을 여러 자료와 생생한 인터뷰로 제시한다. 장강명 작가는 '열정 금지, 에바로드'라는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읽고나서 주위의 많은 지인들에게 추천했던 기억이있다. 이 책 역시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다. 그리고 그의 소설 특유의 통쾌함 또한 있다. 유머감각과 함께! 

 내가 유레카를 부르며 자유를 만끽한 곳은 책 속의 세상이었다. 문학이라고 해야할까. 그 속에는 우월과 열등,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 주목하고 심지어 그것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했다. 모호하면서 충만한, 자유로운 세계였다. 유일하게 나에게 방황을 허락하는 공간이었다. 나도 이 세계에 속하고 싶었다. 내가 노력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문학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ㅠ.ㅠ)이 세계에 뛰어드는 데는 일단, 돈이 들지 않는다. 글을 쓰는 데에는 물리적으로 볼 때, 기본 자금이 필요없다. 컴퓨터, 혹은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홀로 습작을 하면서 종종 뜻하지 않은 벽을 만나곤 했다. 소설을 쓰고 있다고,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문예창작과로 다시 학교에 가라고 조언을 하는 사람이 적잖았고, 혼자서는 절대로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 소설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나도 여러 공모전에 필사적으로 응모했다. 솔직히 말해 나에겐 공모전이, 금전적 대가가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인정. 공모전에 당선이 돼야 글을 잘 쓴다는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여러 공모전에 에세이나 소설로 응모를 해서 대부분 낙방을 했다. 운좋게 에세이로 당선이 된 적도 있지만, 소설은 매번 낙방이었다.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이 좋았고, 어떻게든 쓰고 싶었다. 소설 창작 강의에 몇번 등록한 적이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등록한 강의가 모두 인원수 미달로 폐강이 되었다. 궁금했다. 소설을 쓰려는 사람이 그렇게 적은가? 아니면 소설을 읽는 사람이 그렇게 적은가?

 꾸준히 해외 신작 소설에 관심을 갖고 구매하며 읽는 독자가 우리나라에 3,0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외국소설 팬층이 얇다고.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 들은 말이다. 하지만 장강명 작가의 통계에서 보면 해외소설이 우리나라 소설보다 판매부수가 훨씬 좋다. 전국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대부분 자기계발서나 자가힐링심리에세이다.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블로그에 올라오는 서평만 봐도그렇다. 네이버 블로그 주제별 추천, 책 부분에 올라오는 서평의 대부분은 어린이 책이나 자기 계발서, 혹은 정답을 알려주겠다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빨리 정답과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책 속에서 아니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길을 잃을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 내 자신을 틀에 맞추고 인정받기 위해 해야할 일이, 증명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괴감만 커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에 굴복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길을 잃을 시간이 없고 , 그러기엔 용기마저 필요한 사회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펴볼 기회조차 잘 없는 것이다.  
 블로그를 하기 시작한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며 소중히하면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딜가나 부족하고, 자격이 없어서, 이러다가는 정말 나를 싫어하게 될 것만 같았다. 
 장강명 작가는 책속에서 말한다. 
 "(...)읽고 쓰는 공동체의 일원이 많을수록 좋은 사회입니다. 이 공동체 구성원들은 좀 더 차분하고, 자신을 더 잘 성찰하는 사람들이니까요. (...)"
 
 이제 시스템의 문제를 알았다. '당선, 합격, 계급'은 너무도 고마운 책이었다. 차근차근 그동안 나의 궁금증과 답답함을 풀어준다. 아니, 자상한 선배와 술한잔하면서 고민을 상담받는 기분이었다. 글을 써서 뭐하게? 너는 그나이 되도록 정신도 못차리냐, 라고 핀잔주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민에 귀기울여주고 함께해주는 선배말이다. 
 정말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특히 모든 시험과 공채와 공모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자격을 따내고 인정을 받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이 시스템에서 살아 남는 길은, 그까짓것 별거 아냐, 라는 호기를 부려보고, 좌절은 짧게 하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길이다. 건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속지 않는 것이다. 내가 부족하다고, 너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지지 않는 것이다. 
 나를 그만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남들의 인정은 중요치 않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베스트셀러 위주로 읽는다는 게 출판사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베스트셀러 목록에 어떻게든 올라가는 게 중요해요. 그걸 못하면 명사가 추천을 했거나 상 이름이 하나라도 박혀 있어야 독자들이 책을 들춰 본다고 생각해요. 외국 소설도 들여올 때 상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따집니다. 상을 못 받았으면 ‘오바마가 휴가 갈 때 가져간 책‘같은 타이틀이라도 있든지 한국 독자에게는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당위성을 줘야 먹혀요. 그 당위성을 위해 문학상이나 명사의 권위가 필요한 거고요. 학교에서 ‘꼭 읽어야 할 책‘같은 독서 목록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런 식으로 책을 고르는 것 같아요."
-p49

그렇다면 오늘의작가상을 개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제와서 공모전 방식을 폐지하나?
"그 제도가 타락했어요. 완전히 석화됐어요. 이제는 없애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의 문학이 너무 자기 자신의 중심인 소설을 쓰고, 시대정신이나 시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가 딴사람보다 조금 더 낫다는 게, 내 직감력이 낫다는 생각이 있어요."
-p78



예술가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술에 관한 책이 아니며, 나는 천재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사람들, 낙선자들, 세상을 뒤흔들며 나오지 못한 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6장과 7장에서 해 보겠다.
-p8

미국의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동양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인재 평가 방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동양에서는 국가나 스승이 젊은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선배들이 세운 기준을 충실히 다르게 된다. 반면 유럽의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논쟁과 토론이 발전했고 이는 체계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p102

1996년에 경제학자 아서 드 바니와 데이비드 월스가 1980년대 영화 300편이 어떻게 흥행했는지를 분석했는데, 결론은 ‘별 패턴이 없다‘는 것이었다. 난느 이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의 부편집장인 데릭 톰슨이 쓴 ‘히트 메이커스‘에서 읽었다. 대중문화의 메가히트작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지 과정을 분석한 이 책에서 저자는 "문화 시장은 카오스 그 자체"라고 간단히 정의한다.
"창의력이 곧 상품인 문화 사업은 확률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른바 ‘창의력 시장‘에 내재한 카오스 특성을 치유할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카오스를 이겨 내는 불굴의 투지와 끈기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p136

(...) 독서는 원래 우회적인 것이고 방황하는 건데, 우리는 거기에서조차 직선적인 정답, 단번의 명쾌한 해답을 요구하죠.‘
-p334

‘(...)자신의 취향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책을 재미로 읽지 않는 문화 때문인 것 같아요. 책을 억지로 공부하듯이 읽어서 취향이랄 것조차 형성이 안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p349

"(...)그래도 리뷰 많이 써 주세요. 저는 세상에 ‘읽고 쓰는 공동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아마 다 그 공동체의 일원일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저희는 더 끈끈하게 묶여 있다고 생각해요. 고향 사람이라든가, 어느 대학 동문이라든가 하는 것보다 더. 그리고 읽고 쓰는 공동체의 일원이 많을수록 좋은 사회입니다. 이 공동체 구성원들은 좀 더 차분하고, 자신을 더 잘 성찰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이 공동체가 지금 점점 규모가 줄고 있습니다."
나는 서평이 이 소중한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주 짧은 서평이라도, 그리고 악평이라도 그렇다.
"우선 서평은 작가들에게 ‘당신 책을 읽은 독자가 있다‘는 신호가 됩니다. 한국의 많은 젊은 소설가들이 응답 없는 벽을 바라보는 심경으로 글을 쓰고 있거든요. ‘출판사 편집자들 말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긴 있나?‘라는 막막함에 시달리다 좌절하는 소설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서평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고, 움직일 힘을 줍니다."
-p372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모색도 종종 주류와 비주류의 대결이라는 틀에 갇히곤 한다. 비유하자면 ‘양반이 상민이 되고, 상민이 양반이 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이다. 대단한 것도 없는 주제에 시험 하나 통과했다고 뻐기던 놈들에게 설욕을 하고 싶을수록, 차별 대우 받고 업신여김 당한 서러움을 갚고 싶을수록 그렇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꿈꿔야 할 사회는 그런 구분 자체가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양반도 상민도 없어야 한다.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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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난민 - 제10회 권정생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3
표명희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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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때부터 나는 모두가 날 좀 내버려 두었으면 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힘으로 돈을 벌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혼자가 되었다. 서울 구석 코딱지만한 지하방에 이사왔을 때 얼마나 좋았던지. 그때는 그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인줄도 모르고 혼자라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어찌나 변덕스런 존재인지(아니면 그저 내가 변덕쟁이!) 혼자 사는 해가 늘어나고, 2년마다 이사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집을 보러 다니면서 아, 나는 정말 혼자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집, 내가 찾는 곳은 2년 뒤에 머물지 떠날지를 고민해야할, 대부분 오르는 월세에(내가 부족하여) 등떠밀려 떠나게 될 그런 장소였다. 아이였을 때 어떻게든 혼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면, 무너지지 않으려 바등바등 하는 지금은 포근하고 든든한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기분이다. 포근하고 든든한 것. 그것이 어쩌면 아직 만나지 못한 고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이야기가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비교적 짧은 분량에 여러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민과 해나를 시작으로 캄보디아 보트피플이었던 뚱이, 이슬람 문화권 인도 카슈미르에서 온 찬드라, 아프리카 족장의 딸인 웅가,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프랑스인 미셸, 중국 신장 위그루자치구에서 온 위그루족 아빠과 한족 엄마를 둔 샤샤 가족. 심지어 난민캠프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한권의 책에 이렇게 빽빽한 사연이라니. 각각의 사연으로 대하 장편소설이 나올법도 하다. 생명과 인생을 걸고 고국을 떠나 온 사람들의 이야기라 모두 절절하다. 하지만 그 사연이 엮인 사이사이 유머와 따뜻함이 있어 책장은 큰 부담없이 넘어간다. 
 
 책에 밑줄 친 부분들을 다시 보니, 대부분 찬드라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겪은 고통과 적대감, 무관심 그 모든 폭력들에도 살아남고 한국으로 온, 여기서 새 삶을 살아가려한 그녀에게 제일 마음이 쓰였다. 찬드라에 가장 마음이 갔던 이유는 웅가나 샤샤와는 달리 혼자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뚱이도 혼자였지만, 그는 한국말도 하고 붙임성도 좋은 성인 남자라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가진 상처와 인생의 무게는 타인이 이해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공존하는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런 배려의 균형을 맞춘탓이다.

 우리나라는 난민 심사가 외교부가 아닌 법무부 관할이라고 한다. 몇해전 시리아 난민이 유럽과 전세계로 넘쳐나던 때, 우리나라의 난민 심사에 대한 기사를 보았는데, 우리는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편이고 난민으로 인정하는 과정도 꽤 까다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 혼자 살던 집은 이태원 어드매 달동네였다. 역 주변의 화려한 거리와는 달리 저 뒤의 언덕너머로는 골목골목마다 사연많은 외국인들이 살았다. 책을 읽으니 그때 이웃들이 떠올랐다. 한국말을 잘하던 덩치 큰 소말리아 아저씨, 지금은 사라진 완탕이 가게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떤 차도르를 입은 한국 여성과 어린 두 아이. 늘 새우 완탕을 아주 맛있게 먹더랬다. 한국 국적을 따려고 고군분투하던 모로코 가족. 주말이면 친구들을 초대하고 북적북적 늘 즐거워보였지만 가끔 늦은 밤 깜짝 놀랄만큼 엉엉 울곤했던 필리핀 커플. 그 동네에서는 나도 이방인이었고 함께 고독과 외로움을 오갔다. 
 
 책의 뒷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지구별 위에서 인간은 이래저래 난민일 수밖에 없어' 
'난민 유전자를 나눈 사람들의 미세한 연대로 이루어진 게 인류 아닐까요.'
  
 소설속의 인물들은 난민과 대한국민할 것없이 연대한다. 서로 아는 것을 알려주고 도와주고 내것을 나눈다. 절절한 이야기도 아픔도 나누며 함께한다. 모두 남남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족같다.
 지구별에 사는 나는, 여전히 난민이다. 가끔 아등바등 무너지지 않으려 사는 내 모습을 보면 이 곳은 내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고향을 찾거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고향처럼 따뜻하고 든든한 마음을 찾는다. 그 마음이 내 안에 있기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이 되기를 기도한다. 


책을 읽는데, 최근에 읽은 시 한 편이 생각났다. 황인숙 시인의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에 실린 시다.


그림자에 깃들어


                            황인숙


 이방인들을 보면
 왠지 슬프다
 한 아낙이 오뎅꼬치를 문 금발 어린애들을 앞세워 
지나가고
 키 작은 서양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회색 양복 서남아 청년이 지나간다
 먼먼 땅에 와서 산다는 것
 노인과 어린애
 어느 쪽이 더 슬플까

 슬픈 건 내 마음
 고양이를 봐도 슬프고 비둘기를 봐도 슬프다
 가게들도 슬프고 학교도 슬프다
 나는 슬픈 마음을 짓뭉개려 걸음을 빨리한다
 쿵쿵 걷는다
 가로수와 담벼락 그늘 아래로만 걷다가
 그늘이 끊어지면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걷는다

 그림자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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