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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박현주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7월
평점 :
코로나 시대의 여파로 통역 일이 싹 사라진 헛헛함을 전문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박현주 작가의 책으로 풀어보았다.
이 책은 "..나는 우리 인생에서 겪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저 가라앉아 흐르는 듯 보이는 저류의 삶에도 반드시 어떤 국면의 변화가 찾아온다. (p.242 에필로그 중)"라고 언급한 것 같이 실제 운전이라는 과정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운전과 연관된 주제를 시작으로 작가 개인의 이야기, 그리고 적절한 책의 구절과 함께 정리하며 마무리하는 구조는 평균대 위를 안정된 밸런스로 천천히 걸어가는 느낌과 같았다. 몇몇 구절은 캐리 브래드쇼의 음성이 지원되는 느낌이랄까, 안정되고 편안한 톤의 글이었다. 최근 좀 큰 감정에 휩싸인 글들을 읽어서 안 그래도 작은 간이 더 쫄아드는 기분이었는데 참 좋았다.
책을 읽으며 뭇 문장들에 웃음이 터졌는데 백시트 드라이버(backseat driver)로서 남편 옆 조수석에 앉아 참을 인을 몇 번 그리고 있는 내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라서 였다. 그리고 "나보다 느리면 멍청이, 나보다 빠르면 미친놈"이라고 말하며 깜빡이 없이 마구 끼어드는 운전자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지른다던가, 두서 없이 저장된 플레이리스트에 동승했던 친구가 치를 떨었던 거 하며, 내 일상을 다시금 떠올리는 글이었기에 참으로 편안했다. 읽으며 와 닿는 책은 전체적으로 읽고 싶어서 메모장에 하나하나 적어 놓았다. (큰일이다, 지금 갖고 있는 책들도 다 못 읽었는데...)
에필로그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내가 위비곤 호수의 사람들처럼 내로남불의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지 않은지 여러 번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으로 마무리하는 책은 건강하다.
실패는 생각하는 존재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난다. 자신의 동작을 하나하나 의식하고, 그를 재연하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실패하고 만다. 생각하는 존재에서도 과업을 이룰 수는 있지만, 결국 어느 순간 동료의 머리로 공을 던지는 실수를 저지르면, 아무리 해도 눈앞의 길에서 핸들을 틀 수가 없으면 원하는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 P34
우리의 평생은 내 자리를 찾기 위한 순례와 같다. 돈, 명혜를 비롯해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차와 집 같은 물리적 공간을 얻어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내가 있을 적절한 자리를 찾아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애정, 호의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 이 자리에 당신이 있어도 된다는 환대를 뜻하는 모든 것들, 우리는 늘 그것을 찾아서 헤매고, 그를 얻지 못한다면 댈 자리 없는 주차장에서처럼 비참하고 괴롭다. 무엇보다 끝없이 빙글빙글 돌아야만 한다. - P76
충고에서 제일 중요한 해답은 결국 나 자신에게 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내게 충고를 해준 타인을 원망하지 않은 자신이 있는가? …충고는 타인의 판단이지만 그 판단을 따를지 말지는 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 판단을 따른 나와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결정이다. - P112
우리 모두가 생체 시계에 따라 살지는 않는다. 큰 시계를 따라가는 나만의 작은 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밤이 오는 건 막을 수 없지만, 온화하게 가진 않는다. - P171
인생은 무언가를 얻고 좋아하고 식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애착이 없는 인간은 없다. 대상이 꼭 사람이나 생물이 아니라도, 물건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개념일 뿐이라도, 거기에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가상의 상호작용을 하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다 어느 날 서서히, 혹은 갑자기 마음이 멀어지고 그러다 잊어버린다. 대체로 영원히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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