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광기의 랩소디 - 세상을 바꾼 컴퓨터 혁명의 영웅들, 복간판
스티븐 레비 지음, 박재호.이해영 옮김 / 한빛미디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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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머신러닝..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는 단어인지도 모를 말들이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기술 발전의 가속화로 현재를 '4차 산업혁명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AI 등..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일상 속에 빗물처럼 스며 들고 있다. 모든 사물이 촘촘한 거미줄로 이어지는 사물인터넷이 실현되면 우리 주변의 사물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인터넷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진짜 '현실'에 살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주변의 사물이 인터넷을 바탕으로 기능하는 데 그 와중에 살아 있는 우리의 실존은 인터넷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정당한 변론을 찾기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나 역시 소프트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 말하자면 컴알못이다. 한글 타자 속도가 200타가 안 나온다. 그런 내가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시작은 프로그래머가 음침하고 멋있어 보여서 동경에 빠진 것이었다. 요즘은 나아가 소프트웨어를 배우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컴퓨터가 동작하는 원리, 컴퓨터 언어, 네트워크 보안 정도는 기본적으로 배워 둬야 눈 뜬 상태로 코 베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고? 무서워서다. 인공지능이 너무 정확해서 무섭다. 알파고 vs 이세돌 바둑 경기에는 관심도 안 뒀는데 요즘은 인공지능이 무서워서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무섭지 않은가? 구글 메인, 유튜브 추천 동영상, 네이버 추천 쇼핑과 같은 것들이 나를 너무 잘 겨냥하고 있는 게 무섭지 않은가? 정확함에서 편리함만 찾아 즐길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무섭지도 않겠지. 그런데 편하다고 마냥 좋아하기엔 마음이 불편하고 무섭다. 정확함이 꼭 편리함에서 그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매우 신속하고 정확한 것은 그에 상응하는 반발도 불러오리라고 생각한다. 원자력 발전소와 그 운용에 따르는 위험 부담 같은 예로 말이다. 어찌 보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인지 모른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것을 만들지 않는다. 자연은 재촉하지 않는다. 자연스럽다 와 서두르다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지 않는가.


컴퓨터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공포의 연장선에 해커들이 있다. 네트워크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해커들의 자유는 민간인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 해커라고 생각하면 어두운 방 안에서 작은 컴퓨터 화면만을 굽은 등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음침한 사람이 떠오른다. 컴퓨터 옆에는 인스턴트 음식을 먹은 흔적이 지저분하게 뒹굴고 있고 방 안은 도둑이 뒤지다 나간 것 같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고 벌레가 기어 다녀도 신경 쓰는 사람 하나 없는.. 이런 환경에서는 성격이 명랑하고 밝은 사람도 금방 어두워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해커는 이런 환경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가. 상상 속 해커는 어딘가 모르게 불쾌하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해커, 광기의 랩소디(원제:Hackers)에서는 상상보다 현실적인 해커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금 덜 음침하고 덜 불쾌하고 어찌 보면 우습고 귀여운 괴짜 해커들의 역사가 있다. 하루 종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배가 고프면 중국음식도 시켜 먹고 친구들과 콜라 한잔하며 이야기도 하고 학교에 앉아 수업도 듣는, 평범하지만 약간 다른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펼쳐져 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후드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이나 방 안에 불을 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라는 존재에 광적으로 완전히 몰입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해커에 대한 동경이 자연스레 피어난다. 알고 보니 돈도 잘 벌고 멋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의 투척에 감동되어 순수한 동경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른다. 그들의 열정의 원천은 '컴퓨터'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신, 컴퓨터만이 있을 뿐 다른 신앙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컴퓨터를 대하는 해커의 자세는 종교에 가까워서 왜 아직 '컴퓨터교'가 생기지 않았나 의문이 들 정도다. 그들은 의심하지 않으며 신실하다. 그들은 컴퓨터를 위해 제정된 율법에 따라 행동한다. 율법은 내용은 이렇다.


- 컴퓨터에 대한 접근은 물론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가르치는 무엇이든,

그에 대한 접근은 무제한적이고 전적이어야 한다.

직접 해보라는 강령 Hands-On Imperative을 언제나 지켜라!

- 모든 정보는 공짜라야 한다.

- 권위를 불신하라! 분권을 촉진하라.

- 해커들은 학위, 나이, 인종, 직위 등과 같은 엉터리 기준이 아니라

해킹능력으로 판단한다.

- 컴퓨터로 예술과 미를 창조할 수 있다.

- 컴퓨터가 우리 삶을 더 낫게 바꿔 줄 것이다.

- 해커, 광기의 랩소디 CHAPTER 2 '해커 윤리' 중


율법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이 해커들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컴퓨터의 역사를 변모시키며 지켰던 컴퓨터에 대한 존경, 해커 윤리라고 불리는 항목들이다. 해커 윤리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규율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한 국가의 통치이념을 정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컴퓨터를 통한 평등과 자유, 미학과 발전을 꿈꿨다. 실제로 해커 윤리 위에서 엄청난 발전이 일어났고 현재 당연히 누리는 많은 편의는 해커 윤리가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못했을 것이다.해커들이 모이고 그들의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한 1950~70년대, 20대 초반의 젊은 해커들은 한 나라의 개인적 지위를 떠나 그들만의 국가를 건립하고 종교를 선포했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의 갖은 투쟁이 있었다. 사회적 제약에 맞서 생동하는 젊음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시기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민중의 국가가 건설되었듯이 미국의 한 도시에서는 컴퓨터의 국가가 건설된 것이다.

  컴퓨터 국가의 국경은 컴퓨터 덕후에게만 열려 있는 게 아니다. 앞으로의 시대에 겁먹지 않고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 성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해커 윤리에 따라 그들은 컴퓨터 세계에 진입하는 데 어떤 장벽도 쌓아 놓지 않았으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장벽이 있을 뿐이다. 이제는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컴퓨터 국경 안으로 한 걸음을 디뎌야 할 때다. 컴퓨터는 너무 가까이에 있고 떼어낼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 칼날을 본인에게 겨눈 채 들고 다닐 수야 있겠는가. 우리는 컴퓨터라는 무기를 제때에 쓸 줄 알고 공격을 받을 때 무기를 사용하여 현명하게 막아낼 수도 있어야 한다.


  20대 후반의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티비를 보지 않으면 친구들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SBS에서 요즘 황금 시간대에 어떤 드라마를 하는지, 이번 주 뮤직뱅크에 어떤 가수가 나오는지, 무한도전이 어떤 시리즈를 하고 있었는지를 모르면 친구들과 모여 있어도 할 얘기가 없었다.

지금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를 안 하면 대화를 하기가 힘들다. 사업을 해도 SNS를 이용하지 않으면 영업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있는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작고 편리한 기계가 약인지 칼인지 우리는 모른다. 약이라 해도 중독성이 있으니 우리는 이 약의 영향을 잘 알아야 한다. 칼이라면 적어도 나를 겨누고 있는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나처럼 인공지능의 발전에 섬뜩함을 느끼고 컴퓨터, 스마트폰 등 각종 스마트 기기의 보안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 없어 소프트웨어를 공부하고자 마음을 먹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스마트 세상을 살아갈 누구라고 당신이 '초심자'라면, 해커, 광기의 랩소디를 읽는 것이 그들의 국가, 종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에 관심이 1도 없는 사람이라도 본인의 삶의 순수한 열정에 영감을 불어 넣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누가 아는가? 어쩌다 본 책이, 그냥 지나친 삶의 순간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나비효과처럼 전혀 모르는 때 다시 살아나 죽어 가는 생명의 불씨에 작은 바람을 불어 넣을지.

  반복되는 일상 속의 정열의 고갈에 매너리즘에 빠져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정보의 바다에 휩쓸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떠내려가는 중이라면 혹은 네트워크의 내밀한 침투의 보편화에 불편을 느껴 컴퓨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이 책을 읽은 후 꽤 많은 사람이 나처럼 컴퓨터 세상과 언어를 배우기를 결심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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