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18-80-81-12

 


어머, 이 언니가 빨갱이구나!” (131)

 

 이 멋진 책의 서평을 어떤 문장으로 시작해야 할 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인용을 택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거의 일분동안 폭소를 멈추지 못했는데, 놀랍게도 이 말은 주인공이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다른 누군가에게 던진 말이기 때문이다. 명절만 되면 친척 어른들로부터 , 저 빨갱이 좀 봐라.’ 라는 말을 연례행사처럼 듣던 책 밖의 또 다른 빨갱이는 131쪽에서 멈춰 한참동안을 으하하핫 소리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의 우리라는 표현은 너무나 일상적인 표현이지만 그 우리의 집단성이 시대의 물꼬를 크게 바꾼 비일상성의 표지들이 있다. 난기류 속의 80년대에서 시작하여 97년의 외환위기, 2002년 월드컵과 주한미군 장갑차 사건, 2008년 미국 수입소 반대, 그리고 2016년의 박근혜 정부의 민간인 국정농단에 맞선 전국적 촛불집회까지 우리는 우리로 모여 부정의한 국면들을 타개해 나가야 했다. 이 흐름의 변동을 우리는 소위 운동(movemnet)이라고 부른다. 불의에 맞서 정의를 사수한 것도 우리들이지만, ‘이나 빨갱이의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린 이들 역시 한국인들이다.

 이 책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겪어낸, 80년대를 20대로 살아낸 한 사람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운동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르짖지도, 운동의 혐오에 대한 항변을 외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이길 바라는 몸부림을 담은, ‘정의만이 유일한 정의라고 모두가 그토록 철썩 같이 믿었던 시절의 한 사람의 진술서다. 시대와 우리의 집단성이 요구한 옷을 벗어던지고 온전히 스스로의 맨몸이길 바라는 간절한 욕망의 진술서다. 나는 여태까지 이토록 날 것의 80년대를 그린 어떠한 영화나 드라마, , 소설, 글을 본 적이 없다.

 

강렬하다. 섬뜩하다. 발랄하다. 세련됐다. 야하다. 비유가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평이 제일 맘에 들었다. 살아서, 여기 있다는 증거. 살아남기 위해 모욕을 견뎠다.” (296)

 

 소설을 읽는 내내 토막 난 생선회의 가장 두툼한 살점을 떠올렸다. 축축하고 비릿하고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물컹함. 작가는 아마도 그 살아 있음의 감각을 글로 승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때로는 글만이 구원해낼 수 있는 삶의 구덩들이 있다. 핏기 어린 한 토막 상처의 그 화끈거리는 단면을 시간이 흉터로 덮어 진정시키고 나면, 그 흉터를 자신만의 활자들로 피부의 무늬로 새겨 넣어야만 구원될 수 있는, 그런 단면들 말이다.

 따라서 기억의 복원을 위한 이 소설의 노력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작가의 미련 때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이미 끝난 잔치에 다시 흥을 불어넣으려는 김빠진 시도 역시 아니다. 애린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기억을 복원한다. 그 시절을 정말로 진지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구원이다. 그저 달력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박자에 맞추어 착실히 생활인의 면모를 닦고, 그 역할을 수행해온 사람들은 그 시절로부터 자신을 영영 구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절, 그러니까 시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해낸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호흡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순간을 산다. 그런데 시대적, 사회적으로 모든 것에 우선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데에 동의하면, 우리 일상의 고유성은 지워지고 대신 시대의 얼굴이 우리의 얼굴을 대신하여 들어선다. ‘정의라는 카드섹션을 들고 있는 두 손만 남은 채 그 손이 누구의 어떤 이의 것인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개인은 시대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일부로, 소품으로, 정해진 위치에 서 있는 정물화 속 구성요소 같은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구원은 이 모든 엔트로피의 진행을 역행하여 카드섹션 뒤의 숨겨진 얼굴을 되살려내는 작업이다. 인격성의 회복이다.

 

 

< naked truth를 찾아서 : 시대가 지운 얼굴 >

 

 나는 ‘IMF키즈. 초등학교 6학년의 여름은 학교 전체가 빨간 티셔츠를 입고 네 박자 구호(-한민국)를 외쳐댄 소란스러움으로 남아있다. 3이 될 때 MB는 대통령이 됐고 친구들은 광우병 시위에 나가느라 야간자율학습을 빼먹었다. 내가 태어난 해의 여아 낙태 수치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치에 해당하며 우리 세대는 역대 최악의 실업난을 겪는 중에 삼포세대 아니 N포세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충 어떤 모양새로 살아온 인간인지 짐작이 되는가? 하지만 내 인생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그 무엇을 상상하더라도 그 짐작과는 결코 들어맞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집집마다 금붙이를 긁어모으느라 바빴던 90년대 후반과 그 이후 몇 년동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유복하게 보낸 시절이었고, 고등학생 땐 수능 점수와 싸우느라 광우병 그거 소고기 안 먹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보다 더 깊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장녀라서 형제들 중 가장 많은 것을 누렸고 희생이나 차별은 내가 경험한 단어가 아니었다. 여성혐오가 무엇인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채로 대학에 들어갔다. 젊은 시간강사의 사회학 수업을 듣고 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은 실은 내 것이 아니었음을, 실체도 없는 누군가들이 주입한 가치들을 내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음을 깨달은 후에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옆 학교 이대에서 학생들이 전투경찰들에게 밀쳐지고 다칠 때에도 달려나가지 못했다. 그 무렵의 나는 뒤늦게 발견한 질환의 수술 때문에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장애인인 줄도 모른 채 살아왔던 장애인이었고 내 세대의, 나의 시대의 모든 외침들은 병실 벽에 걸린 텔레비전 스크린 너머로 송출되는 영상에 불과했다. 서울역에서 광화문으로 넘어가는 중이라며 친구들이 보내온 시위대의 깃발 사진들이 다만 핸드폰에서 울려댈 뿐이었다.

 

 위에서 나를 소개한 ‘IMF 키즈라는 시대적 표어가 암시하는 모습과 실제 내 인생의 장면들은 얼마나 맞아들어 가는가? 시대가 개인의 모습을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삶의 결을 지니고 있으며 그 결은 무슨 일이 있어도 훼손당해선 안 된다. 그 삶의 결들을 시대라는 이름의 불도저로 깔끔하게 밀어버리고 도덕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나는 나와 직접적인 접점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이 <청동정원>에 연대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애린의 십대와 이십대, 현실에선 아직 닥치지 않은 오십대마저 마치 내가 살아낸 것같은 착각이 내 안에서 공명함을 느낀다. 엄청나게 강력한 이 공감의 자기장은 똑같은 옷을 입을 것을 강요한 시대의 힘에 저항한 한 사람의 삶의 결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물학적 번영, 번식, 자손의 개체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공감의 자기장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건 우리 각자의 흉터와 무늬를 지키는 일이다. 거기에서부터 현세대와 미래세대 간의 소통이, 과거와 현재의 화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의 얼굴 위에 군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복원된 기억 : 대모험시대 >

 

 우선, 이 소설은 세부장르 구분은 상당히 다양하게 가능한데 우선 특정 시대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역사(시대)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주인공 애린의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으며, 작가 최영미의 자전적 소설의 성격도 짙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여성문학으로 포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이 책에 모험소설이라는 라벨을 붙여주고 싶다고, 과감하게 속내를 발설해 본다. 한국에서 쓰인 소설들 중 이토록 멋지고 역동적이고, 눈을 떼기 어려운 모험담을 읽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만난 한국소설들은 시대 앞에서 좌절해버린 개인의 양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담고 있지 않았다. 작가도 독자도 모두 함께 우울의 심연을 파고 또 파고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슬픈 공감과 위로의 상호작용만이 한국소설을 읽는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부로 나는 한국 현대소설에 모험 혹은 탐험 장르가 있다고 과감히 선언하고 싶다. 실제로 읽으면서 박장대소 했던 대목들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소리 내어 웃고 탄식하며 책을 읽었던 경험은 매우 드물 것이다. (각자 떠올려 보라. 어쩌면 전무할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무모함과 대범함에, 그리고 무지를 가장한 순진함과 귀여운 철없음에 대하여 나의 웃음들을 기꺼이 내주었다. , 동혁이 애린의 시절에 끼어 든 순간부터 빠져나갈 때까지는 웃을 수 없었다. 비통했다. 애린의 결혼생활은 마치 내 심장을 동혁이 방망이로 마늘 찧듯 진물이 나올 때까지 짓이기는 고통이었다. 애린이 겨우 결혼에서 탈출할 수 있었듯이 나 역시 겨우, 정말 겨우 그 대목을 읽어 넘겼다.

 

 고등학생 애린부터 대학생, 그리고 제국출판사에서 소설을 탈고해내기까지의 그녀의 모든 삶의 장면들이 모험의 연속이지만 그 중에서도 형광펜으로 색칠하고 싶은 몇 대목이 있는데 주로 139쪽에서 142쪽 사이에 쓰인 일들이다. 고대사 공부를 위해 아버지가 권한 그리스 유학을 그는 조국을 위해 택하지 않는다. “여자로서, 내게는 조국이 없다. 그 어떤 국가도 원하지 않는다. 여자로서, 이 세계 전체가 나의 조국이다.” 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가 당시 애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동지들이 모두 여기,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을 때 그에게 유학은 곧 도피와 같은 말이었을 테다. 내게는 그런 연대의식이 없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가치를 열심히 내면화함으로써 성장한 우리 세대 전반에게 연대란 은하수의 뿌연 매연처럼 흐리멍덩한 것일 것이다.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라면 유치장 한 가운데 뻥 뚫린 변기구멍도, 지옥마저도 추억으로 웃어넘길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 몹시도 부러웠다. 탐났다. 내게 80년대는 민주화의 물결이 가득했던 시대라기보다, 함께하는 일은 그토록 당연하던 휴머니즘의 시대로 다가온다. 1x학번의 대학생들이 갖지 못한 8x학번들은 멋지게 두르고 있었다. 개인의 단위에서 더 쪼개져나가 자기 자신 한 몸마저 파편화된 채 널브러져 부유하는 시대를 사는 1x학번인 나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 ()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계집애가 감옥 가고 담배질 하라고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 밥해 받쳤다든?

안 되겠다. 너 차라리 수녀원에나 가 있어라.” (140)

 

 어쨌든, 그리스 유학을 거부하고 나서 애린은 엄마에 의해 부산의 수녀원으로 연행된다. 거기서 괴롭고 자괴감에 빠지고 불행하게 사느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마치 진짜 수녀처럼 규율에 따르는 기도생활을 하고, 예비수녀들과 탁구를 치고 찬송가를 부른다. 원장수녀가 애린에게 수녀체질이라며 수녀가 되라고 꼬드기지만 그는 유학과 마찬가지로 제안을 거절한다. 이번의 이유는 조국이 아니라 주전부리 때문이었다! (주전부리 때문이라니!) 조국과 주전부리가 그의 신념의 근거였다. 이 정직함과 소박함에 매료되고 말았다.

 

내 얼굴이 맑아 세상에 나가면 살기 힘들 거라는 예언이 솔깃했지만, 주전부리를 끊지 못해 나는 수도자의 길을 걷지 않았다. () 친하게 지내던 예비수녀와 나는 몰래 수녀원을 빠져나와 길거리에서 붕어빵이며 튀긴 고구마를 사먹었다.” (140)

 

 의연하게 예비수녀와 붕어빵을 사먹고, 수녀원을 나와서는 탐식의 시대를 맞이한다.

 

외부와 단절된 수녀원에서 통제되었던 식욕이 집에 오자 폭발했다. 파운드케이크와 소설에 빠져, 읽기와 먹기 외에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었다. 김밥, 파운드케이크, 옥수수빵, 스틱파이, 짜장면, 강냉이…… 무기정학과 더불어 내게 정열적인 탐식의 시대가 열렸다.” (141)

 

 탐식의 미학에 골몰한 나머지 불어난 10킬로그램을 빼기 위해 단식원으로 또다시 돌입한다.

 

봄이 되자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늘었다. 맞는 바지가 없어 엄마 바지에 단을 내어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열흘 만에 몸무게를 5킬로그램 감량한다는 신문광고에 혹해 단식원에 들어갔다. 단식원에서 주는 변비약을 먹고 2킬로그램이 빠지면서, 나는 둘코락스에 중독되었다. 80년대, 나의 진짜 적은 군부파쇼가 아니라 둘코락스였다.” (141)

 

 애린은 하는 일 없이 책이나 음식에 빠져 자신을 탕진했다고 자조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격동의 연대기를 모험이 아닌 다른 낱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하기, 삶의 조건들이 속박하는 굴레에 스스럼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일, 180도로 변해버린 환경에서 터져나오는 욕구들을 막아서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기 등 이 모든 행위들은 삶에 대한 육체와 정신의 건강하고 적나라한 생물적 반응의 총체인 것이다.

 

 영웅의 모험담이 그러하듯, 독자는 영웅의 유년시절부터 뿜어져 나오는 남다름과 비범함에 매혹된다.

혹은 그런 면모들에 격렬히 공감하는 독자 스스로의 모습을 영웅의 모습과 겹쳐보기도 하면서 울렁이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는다. 사력을 다해 오버코트의 차이나칼라를 사수하려다 끝내 좌절할 때, 군부체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제식훈련 수업에 맞서 문학의 방패를 치켜들고 시와 소설로 도망할 때, 나 역시 그와 함께 가슴이 끓어올랐다.

 대한민국 역사가 아무리 굴곡지다 할지언정 그 어떤 시대성이라도 초월하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단 하나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는데, 그건 바로 대학입시다. 애린의 말처럼 하늘이 무너져도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신입생을 모집한다.” (31) 그에게 대학은 출세나 입신양명의 발판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친구들을 더 만날 수 있으리라는 최후의 희망, 루이제 린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할 거라는 기대로 가득한 꿈이다. 나 역시 그랬다. 대학에 가면 교육방송 교재가 아니라 오지선다가 아니라 주관의 진리와 지식의 보물들이 반짝거리며 나를 맞아줄 거라고,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학우들과 함께 그 빛을 좇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과연 대학은 정의와 도덕, 지식의 공간일까?

 

 

< 정의라는 이름 뒤의 위악 : 여성혐오 >

 

 앞의 시대가 지운 얼굴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한데 어울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차원의 논의다. 인간적 차원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간과 각자의 공간을 점유하며 산다. 단지 그 파장의 영역이 서로 겹쳤다 사라졌다 할 뿐이다. 성냥갑 속의 성냥개비들이 그저 성냥으로 불리더라도 사파에 제 머리를 긁어 밝힌 빛은 어디까지나 한 개비의 몫이다. 그 한 개비의 빛이 모두 다 다른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선이야 말로 허위이며 거짓이다.

 상당수의 (특히 남성)독자들이 이 책을 두고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 ‘이건 사실이 아닌 날조다.’는 식의 감상들을 남긴 것을 봤다. 파쇼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파쇼의 이빨들이 아직도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음을 확인한다. 파쇼의 이빨은 당시 대학생 운동권 내부의 위계질서와 이중성을 의미하는데, 나아가 운동이 열기를 더해갈 수록 마치 작용-반작용처럼 심화되던 내부의 여성혐오 역시 지적을 피해갈 수 없다.

 

어째서 생판 남인 남자들이 내게 이 되냔 말이다. () 사전적 정의에도 맞지 않는 야만적인 관계를 내게 강요하는 저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는 모두가 친척인 씨족사회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학생 위주로 돌아가는 대학 문화에, 위계질서가 뚜렷한 운동권의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언어에 아주 민감한 동물이다.” (66)

 

 그 어떤 회고나 인터뷰에서도 당시 운동에 대한 이런 증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땐 다 그랬어.’라며 지나간 옛추억에 대한 그리움은 발에 치이도록 들었지만 말이다. 그리움으로 위장한 파쇼의 이빨들이 애린과 같은 이들의 목소리를 먹어치운 것이다. 운동권 내부의 여성들은 스스로가 철저하게 지워질 것을 강요당했다.

 

“(문무대에서)고생하는 남학생들을 위문하자고 누군가 제안해 1학년 여학생들이 학교버스를 타고 성남의 훈련소에 갔다. 스커트 차림에 (남자애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복장을 치마로 통일하자는 내부 요청이 있었다) 뒷짐을 지고 일렬로 선 깜짝 방문객들. 흙 묻은 교련복에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운동장에 도열해 여학생들을 환영하더니,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연병장을 돌았다.” (86-87)

 

 어디서 참으로 많이 본 것 같은 장면이 아닌가? 결코 낯선 대목이 아니다. 2012년 정봉주 석방요구와 관련한 나꼼수 비키니 사건의 원형이다. 소설 속 시대를 주도한 대학생들이 여전히 살아있다.

 

“ ‘너도 그랬니? 나도 걔한테 당했어.’ 마치 동네 개한테 물린 듯 담담하게 말하며, 경혜는 내게 그만 잊어버리라고 충고했다. () 욕했지만, 우리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운동권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경미한 성범죄를 용인했다. 서클 회장의 추행을 고발하면 저들에게 이용당할 테니 참았지만, 그날 이후 서클룸에 가기 싫어졌다. 운동을 하려면 그보다 더한 일도 견뎌야 한다는 경혜도 보기 싫었다.” (143-144)

 

 야당 당원간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말한 장관 출신의 유명 스타정치인의 발언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도 가슴을 후벼 판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가장 바르고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해온 이의 입에서조차 스스럼없이 나온 문장이었다. 그 말은 봄날 하늘에 난데없이 출현한 UFO같은 것이 아니었다. 좌파 지식인들 내부에서 수 십 년도 더 전부터 마치 거룩한 진실처럼 숭배되어온 여성혐오가 그저 살짝, 비쳐보였던 것일 뿐이다. 다수가 합의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면 혐오 따위는 혐오가 아니라 대의를 위한 정의로운 희생이 되고 만다. 시대가 지운 얼굴이다. 정의로운 희생은 전설의 고향 이야기처럼 아직까지도 유령처럼 남아 우리에게 공포탄을 던진다. 바로 지난겨울, 모 정책 포럼에서 자신의 인권을 외치던 성 소수자에게 포럼에 참석해있던 다수의 시민들이 나중에! 나중에!”를 연발해 입을 막았던 경악할 사건이 있었지 않은가. 인권에서 조차 더 중요한 의제와, 덜 중요한 의제로 위계를 나누는 소위 깨어 있는 시민들은 아마 80년대에도 조개 줍기를 타박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이 마냥 그 숭고한 대의만을 위해, 대가없는 헌신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시대가 지워버린 얼굴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진실이다. S대 운동권을 얼굴마담미스터 심은 지상파 방송국의 기자가 되고, 가슴에 금배지까지 달게 된다. 5월의 광주가 그려지는 장면에서는 단지 군용 장갑차를 타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시위대에 섞여 장갑차에 올라 시내를 돌았다는 의대생이 나오고, 그리고 광주가 피로 물들 때, 내 위는 끈적끈적한 카페인으로 물었다.”는 애린의 고백이 이어진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종로서적에 가서 동서추리문고를 가방에 넣고, 오는 길에 적선동 시장에서 김밥과 파운드케이크를 샀다. 오리엔트특급살인, 예고살인, 나일 강에서 죽다...... 책 속의 죽음에 빠져, 광주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Y의 비극에 열광하면서, 우리 집에서 삼백킬로 떨어진 남도의 비극에 눈을 감았다.” (105)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미스유니버스대회를 보며 6월이 지났다. 오월의 피비린내를 지우려 저들은 세계의 미녀들을 세종문화회관에 모아놓고 쇼를 벌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카펫을 걷는 하이힐, 춤추는 젖가슴과 엉덩이들, 출렁거리는 36-24-36‘5-18’의 신음을 파묻었다.” (107)

 

 80년대는 동시에 문화적으로 가장 부유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최초의 올컬러 텔레비전과 프로 야구단의 창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음악다방과 그곳을 꽉 채운 사람들, 디스코장, 붐비던 의상실 그리고 각종 연예 잡지는 부정할 수 없는 80년대만의 아이콘들이다. 이런 것을 밀어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 서술한다면 그건 서술자의 죄의식에 의한 과민반응일 뿐이다. 어떤 시대든지 명과 암이 공존한다. 물론 그 시대를 겪었던 이들 중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회색분자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직도 끙끙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애린은 당시 자신을 짓누른 그 흑과 백의 질문의 무게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티끌 하나 없는 흰색이 아닌, 모든 색을 집어삼키고 아닌 척 하는 검정도 아닌 고뇌로 가득찬 회색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인간적인 진실의 색이다.

 

 

< 더 큰 정의라는 말의 이중성 : 구별짓기 >

 

도배지가 떨어져나간 흙방에 주름투성이의 노파가 홀로 앉아 있었다. ‘애린아, 너 이런 데 처음 와보지? 이렇게 늙은 사람 본 적 없지?’ 동행한 선배의 너는 없지라고 단정하는 말투에서 우월감이 느껴졌다. 나는 서클 사람들에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들지 않았다. 나도 신문지로 도배한 흙방에서 살았었다고 출신성분을 자랑했다면, 나를 보는 부정적인 시선이 걷혔을까. ‘이렇게 늙은 사람이 내 귀에 걸릴 때, 노파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127)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위의 대목을 꼽겠다. 스스로가 유일한 정의의 구현자들이라 생각했겠지만 실은 그들이야말로 같잖은 선민의식으로 무장하고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 아니었나? 켜켜이 접힌 주름 속에 지난한 인생의 순간들을 구겨 넣은 노파의 인생 앞에서 고작 스물 몇 살 남짓한 대학생의 멍청한 발언을 보며 나는 몹시 괴로웠다. 타인의 고통과 시간과 늙음을 대상화하여 자신이 정치적,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다니. 게다가 애린에게 범한 무례는 또 어떻고? 완벽한 부르주아가 되지못해 프롤레타리아들을 가리키며 비아냥대는 쁘띠-부르주아에 지나지 않는 찌질함이란!

 그 어디에서도 80년대의 대학생들을 이렇게 날 생선처럼, 털이 비죽비죽한 갓 잡은 사냥감처럼 툭 던져주는 작품을 보지 못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2017, 장준환) 80년을 주요하게 다루는 작품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모두 비슷비슷한 공기와 비슷비슷한 인물들과 비슷비슷한 정의감으로 얼룩덜룩하다. 그들은 항상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계몽에 고취된 상태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낸 주역들로 여겨지므로 독자나 관객들은 항상 그들 편에서 그들이 옳음을, 열렬한 눈물의 감상으로 증명해야 했다. 위의 저 장면에서 나는 비로소 그간 내 목을 조르던 넥타이이의 매듭을 풀 수 있었다. 숨통이 트였다. 80년대가 지나치게 ‘80년대스럽게 느껴지던 위화감과 불편감이 그제야 납득이 됐다. 정치적 사건의 인과를 규명하고 열거하는 데에 그치는 서술은 진짜 역사가 아니다. 정말로 살아있는 역사는 살아있는 그 시대의 개인들이 토해낸 산물들의 보존이다. 그런 진술과 서술이, 회고와 고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내가 동원한 단어들, 운동(運動)과 파이팅(fighting)이 절묘하다. 스포츠(sports)와 무브먼트(movement)의 차이만 있지, 같은 운동 아닌가. ‘제국투쟁으로 바꾸면 변혁운동권의 술자리와 비슷하지 않나. 지향하는 바만 다를 뿐, 여럿이 의기투합하는 놀이문화는 마찬가지.” (274)

 

 

< 삼각형 80-81-12 >

 

“ () 내 인생에서 가장 불안했던 시기. 스물두 살에서 스물네 살까지의 의식의 흐름을 잡지 못해 사건들의 앞뒤가 몽롱하다. () 다만 문장들이 튀어나오고 흐릿한 영상들이 어른거릴 뿐.” (165)

 

 삶의 특정 토막을 글로 써낸다는 것은 결단코 그것을 잊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적극적인 발현, 혹은 바르게기억하고자 하는 윤리적 의식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의 행위를 떠받치고 있는 기저에는 용기 자리한다. 순수하고 내재적인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 외에 또 한편으로 문학이 복무해야 할 다른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를 어떤 미화나 가식의 덧칠 없이 진실하게 그려내는 일이다. 문학 안에서 우리는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것들과 버린 것들 그리고 주운 것들, 얻고 싶어 하는 것들을 찾으며 돌아다니고 방황하고 정착한다.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가 그러하다. 애린이 80년대를 지나보내는 과정은 배설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과 나란히 진행된다. 유주미의 재판정에 달걀을 투척하고 나오는 순간, 비로소 애린의 둘코락스 복용은 끝이 나고 그는 과거의 터널에서 탈출한다.

 

 애린의 젊은 날에서 내 오늘의 이십대를 만난다. 애린의 80년대와 나의 오늘은 경계선 위에 존재한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불안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양 시야를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비범함과 남다름, 돋보임의 또 다른 얼굴은 아웃사이더다. 외로움이다. 제 손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괴리감 앞에서 의연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린은 80년대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다름 아닌 정서라고 말한다. 나는 그 정서가 남긴 흉터와 무늬를 37년 뒤의 지금 이 순간 그의 청동정원에서 다시 발견한다. 이념은 청동처럼 녹슬고 빛이 바래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호르몬의 상승과 하강이 만들어내는 정서는 펄떡이는 혈관과 투명한 피부처럼 언제나 살아있다.

 

 거의 40년의 간극을 두고 내가 애린을 이해하는 것이 이토록 직관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이유는 바로 엄마 때문이다. <사노라면>이 아니라 <다시 만난 세계>를 시위현장에서 목청껏 부르는 우리 세대는 피라미드처럼 불가사의하게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 80학번의 애린과 12학번의 나 사이에는 81학번의 (작가 최영미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영미가 있다. (공교롭게도 엄마는 작가와 성만 다른 같은 이름이며 거의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작가를 엄마의 책꽂이에서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처음 만났다. 부정확하지만 기억으로는 99년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책꽂이에도 이사야 벌린이나 마르크스, 사회주의 서적들, 그리고 김초혜, 최영미와 같은 여성 시인들의 시집들이 즐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와 애린, 최영미의 만남은 그러니까 사실 99년이 최초였던 거다.

 

 애린이 지나온 흔적 속에서 나는 나의 소수자성과 외로움을 보았지만, 실은 애린과 함께 그 시절을 살았던 엄마의 이십대도 같이 보았다. 그래서 애린이 빠져나온 이 연대기가 소설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기 혹은 고백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일기, 애린의 일기, 그리고 엄마의 일기. 대학생이라면 마땅히 시대의 등불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그래서 늘 엄마의 대학시절 앞에서 나는 죄의식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애린의 일기를 통해 그 죄의식을 조금 덜어본다. 그들도 나처럼 유치하고 어린 날들을 수없이 흘려보냈던 이십대들이었다. 고생해 공부시켜 대학에 겨우 보내놨더니 연애도, 성취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방황하는 애린을 타박하는 정순정 씨와, 그런 나를 한탄스러워하는 또 다른 영미 씨를 번갈아 보면서, 마치 그 시절의 애린이 종이 밖으로 현현하여 나를 나무라는 것일까 하는 착각과 공상에 입술사이로 쓴웃음이 슬몃 흘러 나온다.

 

 소설이 시대극인 만큼 배경이 되는 대학교의 장소들과 서울 곳곳의 모습들, 그 시절의 청년들이 읽었던 책의 제목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나는 읽는 내내 그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삐삐가 있기도 한참 전의 대학생들이 쓰던 개발새발’ 알림장 노트와 독수리다방이 부러웠다. 나 역시 현재 신촌에 적을 두고 있지만 애린이 학교에 마음을 쏟았던 만큼 (‘자무연에서 내려다본 이미지로 청동정원이라는 제목을 지었듯) 신촌을 사랑할 수 없다. 이유는 아마 소설 속 그들이 지녔던 의 부재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시대의 우울이 아니라 각자의 우울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아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아.”라고 시크하게 담배연기를 내뿜던 유주미, 애린이 동경해 마지않던 전혜린을 나르시스트, 자의식 과잉, 지적 속물이라며 애린의 세계를 가차없이 부숴버린 선배 지연 또한 내겐 없는 존재들이다. 정신과 감상이 계속해서 새로운 물방울들로 솟아날 수 있도록 나를 내리쳐줄 카프카의 도끼를 손에 든 이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꼭짓점 128081을 올려다보며 부러워한다.

 

 소설 말미에서 애린은 서른을 나의 서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경력도, 성취도 전무하다. 학력란에는 아직 고졸이라고 기입해야 한다. 이력서에 투병경력을 경력으로 쓸 수는 없잖은가.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애린이 처음부터 투철한 선민의식으로 운동에 가담한 게 아니라 학내 분위기와 친구들에 떠밀리듯 발을 담갔듯이, 내 인생 역시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떠밀리듯 여기까지 왔다.

 앞서 말한 나의 장애는 천만 명의 태아 중 한 명 꼴로 발생하는 아직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전질환이다. 다행히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수술로 극복할 수 있게 됐고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해야할까?) 신촌의 모 대학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독수리 다방에 갔었다. 거기서 나는 애린이 대학생이 되어 카페에서 처음 마신 그 비엔나커피를 마셨다. 그의 청동정원을 구경하기도 한참 전부터 나는 비엔나커피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독다방에서는 왠지 그를 따라 비엔나커피가 아닌 다른 커피는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이십대의 문을 처음 열어젖히고 마신 설렘가득한 크림을, 나는 수술을, 내 신체에 닥칠 큰 변혁을 앞두고 착잡한 마음으로 삼키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괴로운 재활과정을 거쳐 지금은 거의 정상인에 가까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간혹 여섯 군데의 수술 흉터가 일 년 동안 점점 부풀어 올라 나를 간지럽게 한다. 이 부푼 자국들이 피부에 스며들어 나의 무늬가 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흘러야 할까. 담당의는 레이저로 흉터를 제거할 수 있다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다. 인위적으로 태워 없애지 않고 병과 투쟁한 나의 무늬로 고스란히 새겨둘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결코 잊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나는 수십 년에 걸려 끝내 이 청동정원을 탈고한 애린에게 큰 환호성을 보낸다. 단지 내가 그와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 처한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 출신이 아닌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의 몸으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면 나는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어느 서클에라도 끼일 수 있었을까? 농활에서 만난 주름진 그 노파처럼 대학생들이 계몽의식과 선민의식을 뽐내게 해주는 수단적 존재로 전락해버리진 않았을까? 등등 소외에 관한 물음들 역시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이 나라 어디에서나 소수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공감은 동일성의 재확인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너무도 다른 자취를 살아온 존재들임을 각성하는 그 순간에 연대의 가능성은 불꽃처럼 파박-튀어오른다. 신자유주의가 극에 달한 2018년의 한국을 버텨내고 있는 이십대 여성으로서, 주류의 면모라고는 애린의 바바리코트 주머니 속에 있던 돌가루들만큼도 없는 나의 이 맨얼굴로, 애린에게 무한한 애정과 격려와 지지를 보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살아갈 용기가 솟아났다. 그 어떤 위로와 격려도 진실한 경험의 공유만큼 거대한 힘을 갖지는 못한다. 애린이 청동정원에 벗어둔 허물에는 그가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압력과 자유의 몸짓이 비늘처럼 박혀있다. 그것들을 한 땀 한 땀 어루만지자 현실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 나의 비늘들이 날개처럼 돋아남을 느낀다.

 

꿈에서 멀어졌고,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희미했고, 옆에 짝이 없었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막막함을 공유했기에 우리는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자리에 모였다.” (269)

 

 2018년의 80-81-12가 모인 청동정원에서 12가 방명록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어학 개론 번역본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Nicholas and the Gang (Paperback, Reprint)
Rene Goscinny / Phaidon Inc Ltd / 2011년 9월
16,790원 → 16,790원(0%할인) / 마일리지 51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2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8년 02월 06일에 저장

The Complete Idiot's Guide to American Literature (Paperback)
Laurie Rozakis Ph.D. 지음 / Imprint unknown / 2013년 4월
28,000원 → 28,000원(0%할인) / 마일리지 840원(3%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8년 02월 06일에 저장

THAT OLD CAPE MAGIC (Paperback)
리차드 루소 / Random House Export / 2010년 6월
17,470원 → 14,320원(18%할인) / 마일리지 7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8년 02월 06일에 저장

On Writing Well: The Classic Guide to Writing Nonfiction (Paperback, 30, Anniversary)
윌리엄 진서 지음 / Collins / 2016년 4월
25,900원 → 20,720원(20%할인) / 마일리지 1,04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8년 02월 06일에 저장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암여고 탐정단 : 방과 후의 미스터리 블랙 로맨스 클럽
박하익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 수년간 읽은 한국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단순히 흥미위주도 아닙니다. 그 어떤 보다 한국의 많은 걸 고발하고 보여주는 사회소설이라고 감히 명명합니다. 캐릭터, 사건, 동기, 심지어 조연들까지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어요.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오합니다! 다른 추리소설과 구별되는 매력이 있네요.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처음 읽게된 작품이지만 스릴, 사건 그 너머의 무언가들이 굉장합니다. 인물의 심리, 죄의식, 사람과 사람사이의 감정적 연결고리. 추천합니다. 추리소설을 왜 읽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
서울대BK21 공익인권법센터 지음 / 사람생각 / 2002년 2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18년 01월 19일에 저장
절판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병역거부자 30인의 평화를 위한 선택
전쟁없는세상.한홍구.박노자 지음 / 철수와영희 / 2008년 6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8년 01월 19일에 저장
절판

[eBook] 그들의 손에 총 대신 꽃을 : 영화감독 민용근이 전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야기- 영화감독 민용근이 전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야기
민용근 지음 / 끌레마 / 2014년 12월
8,250원 → 8,250원(0%할인) / 마일리지 410원(5% 적립)
2018년 01월 19일에 저장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한인섭 지음 / 경인문화사 / 2013년 6월
35,000원 → 33,250원(5%할인) / 마일리지 1,05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3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8년 01월 19일에 저장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