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같은 도시에서 유서 같은 시를 쓴다
아버지와 어색하다 식탁이 너무 넓다
갈증이 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물을 따랐다
날개 뜯긴 잠자리처럼 눈알만 굴려대다
발소리 죽이며 잠자리를 빠져나온 밤
유유히 강이 흘렀다 삼천명이 빠졌는데도
사계절이 가을인 이곳에서는 모두 안다
찬란은 잊혀지고 환란은 지워진다
오늘은 얘기해야지 밥을 꼭꼭 씹었다
심사평(시조시인 정수자)
- 정형의 간명한 구조화와 형상력이 빼어나다. ‘아버지와 어색하다 식탁이 너무 넓다’거나 ‘날개 뜯긴 잠자리처럼 눈알만 굴려댄다’ 같은 묘사는 요즘 가정과 청춘의 압축으로 절묘하다. 비유도 적실해서 ‘유적’/‘유서’, ‘잠자리’/‘잠자리’, ‘찬란’/‘환란’ 등은 연어유희 이상의 의미 확장을 견인한다...
상자 놀이 / 詩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 먼저 /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 덩굴을 옮겨 심으면 /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 식물은 /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 이삿짐이거나 /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심사평(나희덕・박형준・문태준)
-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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