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교수는 누구인가?
박남훈 지음 / 세컨리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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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분석력과 통찰력. 행간 이면의 프레임과 이데올로기에 주체가 의도적 비의도적 비인지적 호명에 대한 현상 분석이 날카롭고 지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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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현대철학에 대한 담론


◆ 현대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 현대철학의 두 산맥-맑스와 니체

이번 시간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말하자면 현대철학의 탄생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생각들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면서 20세기를 쭉 수놓았죠. 가장 핵심적인 몇 가지를 짚어본다면 우선 근대철학의 완성이라고 하는 독일관념론, 헤겔에서 완성되는 독일관념론으로부터 맑스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이 두 사람의 사고로 넘어갑니다.

헤겔 철학이 관념의 철학, 또는 정신의 철학 또는 이성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맑스는 어떤 물질의 철학이고 계급의 철학이죠. 이렇게 넘어가면서 맑스로부터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사유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이어지게 되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인물은 니체죠. 헤겔이 이성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또 굉장히 목적론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니체는 이성보다는 어떤 감정 같은 것을 중시하고 또 우연이라는 것을 새롭게 사유하는 인물이죠. 또한 보편성보다는 개별성과 구체성을 중시하고요. 그래서 니체는 맑스 못지않은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현대 사상의 탄생기에 나타난 아주 핵심적인 두 인물이죠.


▲ 현대철학의 계보 - 실증주의·분석철학·현상학·해석학·정신분석학

그리고 여기에 몇 개를 더 붙인다면 과학철학의 흐름이 있어요. 과학철학, 옛날에는 인식론이라는 게 있죠. 지금도 물론 인식론이라고 하지만 과학이 굉장히 발달하고 분화됐죠.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이렇게 분화하니까 이제는 옛날처럼 인식이라는 것을 그냥 한 덩어리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수학, 물리학, 생물학, 사회과학 이런 식으로 개별과학에 대한 과학철학이 발달하게 되요.

그러면서 예컨대, 오귀스트 콩트(Isidore Marie Auguste Francois Xavier Comte)같은 사람의 실증주의가 나오게 되죠. 고전적인 형이상학들을 비판하고 거부하고 실증적인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이런 경향이 나타나게 되죠. 나중에 이것이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같은 사람의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실증주의에서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되죠. 요게 또 하나의 굵직한, 빼놓을 수 없는 갈래를 형성하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이른바 분석철학입니다. 분석철학이라는 거는 뭐냐면, 논리학(logic)을 가지고 사유하는, 논리학을 가지고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게 분석철학이죠. 이거는 프레게(Frege, 1845-1925)라는 사람을 통해서 시작되고요. 그래서 쭉 내려오죠.

그리고 하나 더 들면, 현상학이라는 게 등장해요. 현상학이라는 거는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모든 사물들을 양적으로 파악하죠. 수학적으로 파악하고 기하학적으로 파악하고 굉장히 원자의 세포 같은 걸로 분석하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서 사물들을 수로 나타내고 분석하고 잘라보고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체험하려는 거죠.

꽃이라고 하면 수술이다 암술이다 화학식이다 이렇게 분석하는 게 아니라 꽃이라는 사물, 우리가 경험한 그대로의 사물의 의미를 탐구하는 게 현상학이에요. 그리고 이것과 더불어서 짝을 이루는 게 해석학이에요. 현상학과 해석학은 다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짝을 이루죠. 연합전선을 이뤄요. 해석학은 뭐냐면, 텍스트를 읽는 학문이에요. 실증과학이 발달하니까 과거의 텍스트들의 권위가 실추가 되요.


예를 들어서 기독교 성경을 보면 계보가 나오죠.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걸 쭉 계산해 보면 지질학이 발달한 시간과 맞지 않거든요. 인간의 역사는 수만 년 수십만 년인데 성경의 계보를 다 합해 보면 얼마 안 되니까 안 맞는 거지. 그게 다 거짓말이 되는 건데.

철학자들은 옛날 텍스트들을 다시 읽으려는 거죠. 다시. 예를 들어서, 시인의 책이나 꿈 이야기라든가 종교적인 문헌들을 그냥 현대 과학에 비추어서 ‘거짓이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있는 숨겨진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게 해석학이죠.

그 다음에 좁은 의미의 철학은 아니지만, 철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또 철학적인 영향을 끼친 담론으로는 예컨대, 프로이트(Sigmund Freud) 의 정신분석학 같은 게 있죠. 그 다음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 같은 것이 있죠.

자 이렇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넘어오면서 맑스, 니체, 과학철학, 분석철학, 현상학, 해석학 그 다음에 프로이드 소쉬르 이렇게 계보를 형성하죠. 여기서 프로이트와 소쉬르 같은 사람은 나중에 구조주의라는 걸 형성하게 되어요.

현대 철학을 이해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될 것들이 말하자면 사유문법입니다. 사유를 하는 문법들을 배우는 것이죠. 이번 시간에는 요런 식의 사유 분법들을 쭉 우리가 배우는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익혀놔야 그 다음에 쭉 전개되는 얘기가 쉽게 들어올 수가 있죠.


▲ 현대철학의 출발점 니체, 사유의 전복 -존재에서 생성으로,

자, 현대철학의 여러 사조가 있는데 니체가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니체는 뭐 저렇게 현상학이다 구조주의다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 굳이 니체를 제목을 붙인다면 '존재론'이죠. 온톨로지(ontology). 또 어떤 사람들은 '생철학'란 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 존재론이라고 말할 적에는 이 사람이 언어철학, 논리학, 인식론 , 존재론, 사회 철학을 이야기할 때와 같은 사유 영역을 이야기할 때 존재론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사람의 철학의 경향을 말할 적에는 이성이나 관념보다는 생, 레벤(leben), 라이프, 생이라는 것에는 생명이라는 뜻도, 인생이라는 뜻도 있죠. 생명 철학, 또는 인생철학. 이때는 니체가 생철학자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의 사고는 뒤에 가면 베르그송이라든가 또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이런 사람으로 이어지게 되요. 그리고 니체 베르그송이라든가 또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이 계열이 현대 존재론, 20세기 현대 존재론의 갈래를 형성하죠.

현대 존재론. 또는 현대 형이상학, 메타피직(metaphysic), 이 단어는 좀 양가적이에요. 아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죠. 메타피직이라는 말은 굉장히 어감이 양가적이죠. 온톨로기라고 하는 게 편할 것 같아요. 그래서 니체는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에 출발점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죠.

이 니체라는 사람은 그 사고의 출발점이 뭐냐면 서구 문명을 떠받쳐온 사상적 경향이 기본적으로 ‘생성(生成, werden, Becoming)’을 부정해 왔다는 거예요. 근데 생성을 부정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생성을 부정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 세계가 생성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죠. 비가 내리고 해가 뜨고 지고 사람이 태어나 죽고, 동물이 태어나 죽고, 그거 부정하는 사람은 없죠. 그거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있었지. 그리스 철학자 중에. 누가 있었죠?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죠. 그 사람은 그거마저 부정했어요.

그런데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철학자들 중에서, 이 세계가,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실계가 생성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럼 니체가 ‘전통철학자들이 생성을 부정했다’라는 말은, 지금 이 세계가 생성하지 않는 걸로 봤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성을 부정했다는 말은 전통적인 많은 철학자들이 생성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봤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생성하는 이 세계는,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이 다른 차원이 존재하는데 그 다른 차원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 생성하는 세계보다 더 참된 세계라는 거죠. 더 리얼한 세계. 그런 뜻이에요.

이 세계가 생성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다 생성한다고 보는데, 포인트는 뭐냐면 이 세계는 생성하는데, 이 생성하는 세계가 전부 다가 아니라 사실은 이 생성하는 세계 이상의 그것보다도 더 리얼한 더 참된 세계가 있다는 거지. 그렇게 이야기를 해 왔다고 니체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제 니체의 저런 식의 생각이 현대 존재론의 출발점이에요. 맨 처음 출발점.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이제 그걸 뭐라고 표현하나면, ‘from being to becoming, 존재에서 생성으로’ 이렇게 표현하죠. 존재의 생성. 저런 식의 니체 생각이 베르그송으로 가면 지속에 대한 강조에요.

만약에 ‘이 현상 세계 이상의 세계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런 세계는 뭐가 없는 세계에요? 지금 이렇게 생성하는 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를 넘어서는 세계가 만약 있다면, 그 세계는 무엇이 없는 세계인가요? 시간이 없는 세계죠. 만약 그 세계에도 시간이 있다면 그것도 생성하는 거 아냐 그지? 그러니까 이 세계가 생성한다는 이야기는,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죠.

만약에 생성하는 세계를 넘어선 어떤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지. 시간을 넘어선 세계죠. 그래서 베르그송 같은 사람은 자기 사유의 전체 무게중심을 시간에 두었다. 시간에 둬 가지고 지속이라는 걸 강조해요. 그리고 베르그송과 비슷한 맥락에서, 화이트헤드 같은 사람은 프로세스, 과정이라는 거죠. 프로세스를 강조하죠.

그리고 하이데거도 역시 시간의 철학자죠. 이제 들뢰즈라는 사람으로 가면 같은 계열은 계열인데 저 사람은 또 사건, 이벤트, 사건을 강조해요 사건을. 그래서 생성, 시간, 지속, 과정, 사건. 이렇게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저렇게 어떤 현대 존재론의 계열이 쭉 이어지죠.


▲ 플라톤주의와 반플라톤주의 간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양의 전통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그 플라톤의 영향은 엄청나게 길어가지고, 헤겔 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도 그 그늘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근데 니체 이후의 형이상학자, 존재론자들은 말하자면 플라톤을 벗어나서 생성의 철학으로 가요. 근데 문제는 간단하지 않아요.

왜 간단하지 않냐? 자 만약에, 예컨대 플라톤적인 철학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는 생성이지만 그러나 이 세계가 다가 아니라 그 넘어선 세계가 있다, 어떤 그런 차원이 있다고 이야기했다면, 플라톤을 비판한 다른 플라톤 철학은 뭐라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지금 이 현상 세계가 오로지 생성이다 라고만 얘기해가지고는 반플라톤적인 게 아니지.

왜? 플라톤도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생성이다’ 그건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플라톤도. 그니까 니체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현상 세계만 생성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생성밖에 없다고 얘기해야죠. 오로지. 만약에 이 세계 너머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 해도 그것도 생성이어야 되요. 오로지. 무조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든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것이든 간에 그 차원도 생성이어야 되요. 그래야지 그게 생성철학이 되는 거지. 근데 예컨대 현대 과학을 보면, 감각세계를 넘어선 쪽이죠. 현대의 과학이라는 거는 감각 세계를 엄청 넘어선 거거든.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이데아와 수학은 다르지만 넓게 본다면 예컨대 그 미시 물리학 같은 세계로 가면 수학으로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존재들이 있어요. 어떤 존재인데 그것은 수학적 공식으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존재가 있어.

그러니까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 할수록 우리는 이 세계의 심층에서 수학적 존재들을 발견하게 되는 거지. 그러면 그런 거를 강조하는 사람이 볼 적에는 어떤 결론이 나오면 플라톤주의가 무너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극단화된다고도 볼 수 있는 거지. 거꾸로..

예를 들어서 달마치안 해안이라고 알아요? 달마치안이라고 해안이 꾸불텅꾸불텅한 게 있어요. 우리나라 저 남해 해안 같은 톱니바퀴처럼 된 거지. 유고슬라비아 달마치안 있는데. 그게 우리 직관적으로는 굉장히 비수학적으로 보이잖아. 막 비수학적인 거죠.

근데 지금 그거를 다 수학으로 해요. 프락타 가지고 해석을 해요. 그러면 현대의 문화라는 것은 안티플라톤이 아니라 울트라 플라톤의 성격을 갖고 있죠. 거꾸로. 울트라 플라톤주의. 물론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라는 뉘앙스하고 현대 과학의 뉘앙스하고 많이 차이가 나지만, 적어도 시간이 궁극적인 것이냐, 시간을 초월한 어떤 그 무엇이 궁극적인 것이냐 하는 물음을 놓고서 볼 때 사태가 만만치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사실은 플라톤주의가 완전히 끝나고 완전히 니체로 간 게 아니라 지금도 사실은 플라톤주의와 반플라톤주의는 여전히 논쟁 중에 있어요.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플라토니즘이 지금 아예 문제도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잘못된 의견이죠.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논쟁이에요.

단 논의의 방식이나 성격은 많이 다르지. 철학사가 수천 년이 지나왔으니까. 고대적인 논쟁들하고 근대(적인 논쟁들이) 다 다르지. 지금의 논쟁이 어떤 지평은 옛날과는 엄청 다른 지평이에요.

어쨌든 간에 니체 이후의 저 생성의 존재론과 플라톤의 연장선상에 있는 플라토니즘의 대결, 이것이 현대 존재론의 핵심입니다. 그럼 이걸 알아두시면 되요. 그래서 이번 학기에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그 다음에 들뢰즈, 하이데거 쭉 할 텐데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시면 연결이 다 되겠죠.


▲ 니체 사유에 대한 조감 - 서구 문명 비판에서부터

자, 니체의 사유는 상당히 복잡합니다만, 우선 그 니체 사유 전체 구도라 그럴까? 전체 흐름을 조감을 먼저 하고 다음에 이제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걸 좀 자세히 하고 이렇게 하려 그러거든요.

이 사람의 사고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 서구 문명 비판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자기의 대안이 있죠. 그죠? 사실은 다 그렇지 그죠? 니체만이 아니라 모든 철학자가 다 그렇죠? 자기 자신 이전의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철학이 있고 자기가 내놓는 답이 있는 거죠. 누구나 그렇습니다.

근데 특히 니체 같은 경우는 이 모티프가 강한 경우죠.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서 서구 문명 전체를 아주 래디컬(radical)하게 비판한다는 굉장히 중요한 모티프에요. 아주 래디컬하다 못해 광기 어린 사람이죠.

근데 서구 문명 비판이라는 게 이것이 플라토니즘 비판이에요.

쉽게 말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플라토니즘에 대한 비판이에요. 플라토니즘. 그리고 이제 플라토니즘을 비판하는데 이 플라토니즘 비판에 앞서 나온 게 뭐냐면 엘레아학파 비판과 소크라테스 비판이죠. 그니까 엘레아학파와 소크라테스가 합쳐서 플라톤이 된 거죠. 그리고 플라토니즘의 대중적인 버전이 기독교이구요.

니체는 뭐라고 하냐면 기독교라는 건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이야기하죠. 알맹이는 플라토니즘인데 그걸 대중을 위해서 각색한 게 기독교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리고 이 전통이 독일 관념론에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보는 거죠. 계속.

그래서 니체는 독일의 헤겔 나온 대학이 튀빙겐 신학교죠. 그래서 니체는 독일 철학을 튀빙겐 신학이라고 비웃죠. 이렇게 쭉 내려오는 게 이 사람의 중요한 모티프에요. 

◆ 니체의 서구비판과 파르메니데스 논쟁


▲ ‘생성’, 현실을 부정을 비판한 니체

핵심포인트는 생성을 부정했다는 거예요. 생성을 부정했단 얘기는 뭐냐면, 현실 세계를 부정한 거죠. 우리 경험이나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어떤 시간을 초월한 세계, 차원으로 넘어가버렸다. 그게 가치의 문제나 실천의 문제로 가면 뭐로 됩니까? 이 현실, 우리 몸으로 살아가는 이 현실을 굉장히 폄하하고, 뭔가 어떤 저 세상에 대한 어떤 갈망으로 표현되죠.

존재론적으로는 생성을 부정하고 영원을 찾는 철학이고 같은 이야기를 가치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를 폄하하고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찬양하는 철학이라는 거지, 기본적으로. 그게 이 사람의 기본 논조에요.

그 다음에 이렇게 비판한 다음에 자기 자신의 관점, 기준에서 보았을 때 니체에게는 가장 중요한 게 영원회귀하고 역능의지, 초인 이런 거죠. 영원회귀, 역능의지, 초인 이런 게 전통적인 것과 대비적으로 제시한 자신의 생각으로 정돈될 수 있습니다.

방금 얘기했듯이, 니체라는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생성을 부정한 전통을 비판하는 거죠. 또 실천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적 삶을 폄하한 사상을 비판한 거죠. 전자가 엘레아학파고 , 후자가 소크라테스예요.

그리고 그 두 개가 모여서 어떤 결정적인 버전(판본)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플라톤이고, 그 이후에 사상들은 그 플라토니즘의 그늘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 철학의 출발점. 그러니까 엘레아학파 비판과 소크라테스 비판을 보면, 이 사람의 사고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 씨앗이 다 보입니다.


▲ 니체의 파르메니데스의 비판

그럼 봅시다. 니체는 뭐라 그러냐면 ‘파르메니데스는 다와 운동이 완전히 거세된 영원부동의 일자의 사유를 세웠다.’ 멀티플리씨티(multiplicity)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게 존재하죠. 그런 다(多), 그 다음에 운동. 이 세계는 끝없이 운동하죠? 그것을 부정하고 영원부동의 일자를 세웠다.

여러분들이 영어책을 읽다가 가끔 대문자로 더 원(The One) 이런 말이 나오죠. 이런 말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지. 니체는 이걸 뭐라 표현했냐면, ‘이 점에서 그(파르메니데스)가 어떤 현실의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는 가장 순수하게 핏기 없는 추상을 성취했다.’

그렇잖아요. ‘다’도 없고, ‘운동’도 없는, 허깨비 같은 그런 일자를 세웠다. 이렇게 얘기하지. 그래서 니체는 이 사람 보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비(非)그리스적인 인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얘기해요. 니체가 이렇게 말할 적에 니체 머릿속에 그리스는 어떻게 표상되는 거예요?

그리스는 굉장히 풍요롭고, 역동적이고 입체적이고 현란한 세계로 표상되는 거지. 근데 파르메니데스는 이 핏기 없는 추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야말로 더 비그리스적인 사람 아니겠냐? 그런 이야기겠죠.

그래서 ‘니체에게 엘레 학파는 반(反)그리스학파로 자리매김 된다.’ 그 다음 문단은 내 얘기에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니체가 파르메니데스 사유의 문제점을 지적한 건 맞지만, 파르메니데스가 왜 그렇게 무리한 주장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맥락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했다. 그게 내가 갖다 붙인 얘깁니다.

왜냐? 이거 상당히 어려운 얘깁니다. 희랍어를 좀 알아야 되는데, 파르메니데스란 사람은 어찌 보면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밀고 갔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서양말의 비(be) 동사에 두 가지 뜻이 있죠? ‘있다’라는 뜻이 있고, ‘이다’라는 뜻이 있죠?

근데 파르메니데스 시대만 하더라도, 언어학이나 문법이나 이런 게 정리가 안 된 시대야. 아직까지. 언어문제라든가, 문법 같은 것이 정돈되려면 소피스트까지 내려와야지. 파르메니데스는 에이나이(einai)의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해요. 구별을 못 해.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무(無)와 부정을 동일시하는, ‘없다’는 것과, ‘아니다’라는 것을 동일시하는 거죠.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자기 나름대로의 맥락 속에서 그렇게 얘기 한 거지. 니체처럼 결론만 놓고서, 그 사람이 왜 저렇게 무리한 얘기를 했는가하고, 과정을 보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이 내린 결론이 영 맘에 안 든다‘라는 식으로만 얘기하면 그건 한계가 있다는 얘기죠.

그 다음 세 번째 문단 보세요. ‘니체에 따르면 사유 초기만 해도 그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영향 아래에서 생성하는 세계를 사유했다. 그러나 늙은 파르메니데스가 젊은 파르메니데스를 온전히 망각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전적인 존재의 세계와 전적인 생성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파르메니데스에서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가 분리 안 된다 라기보다는 평행을 달린다고 하는 게 더 어울려요. 존재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고. 생성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대로 가는 거죠.

이 사람 책을 보면, 책의 1부가 서문이고, 2부는 존재의 세계를 그리고 있어요. 3부는 생성의 세계를 쭉 그리고 있어요. 2부와 3부가 모순되지. 2부에서는 생성은 거짓말로 보는데 3부에서는 또 생성의 세계를 그려요. 그거는 구분이 안 되는 게 아니라 평행을 달리는 거죠. 그렇게 봐야 합니다.

어쨌든, 그 아래 내용을 보면,
‘니체는 그가 논리적 경직성을 통해서, 완전히 굳어져서 거의 하나의 사유 기계로 변해 버린 특성을 보여줌에도 이 점에서 그에게 일말의 인간적인 지각의 연륜이 남아있다고 말해야 한다.’

근데 거듭 말하지만 파르메니데스처럼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죠. 이 세상의 풍부한 다양성도 부정하고, 운동도 부정하니까 기분이 안 좋지 그지? 근데 학문이라는 건 기분이 좋고 안 좋고 문제가 아니지요. 그 결론이 우리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느냐를 가지고 얘기하면 안돼요.

그건 전혀 다른 문제야. 19세기에 진화론이 발달하니까 전통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나게 감정적으로 반응했잖아. 특히 기독교 계통 같은 데에서. 그거는 학문적인 문제(태도)가 아니지. 그 학문의 결론이 자신들에게 주는 어떤 느낌, 감정의 문제로 그걸 처리한 거죠.

근데 이제 니체 같은 사람도 니체 시 읽어보면 그런 게 엄청 많아요. 자기한테 좋은 거.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논증하는 게 아니라, 왜 이게 나쁘다 논증하는 게 아니라, 생생한 것, 역동적인 것이 난 좋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가 핏기 없는 건(없으니까) 나쁘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건 학문적인 논증이 아니지. 그건 그냥 자기의 호오(好惡)를 표현하는 거지.

그래서 니체의 엘레아학파 비판이란 게 그렇게 날카로운 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중요한 비판이지. 왜냐하면 엘레 학파처럼 다와 운동을 부정하는 철학으로부터, 이 세계의 생성과 다양성을 긍정하는 철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니체의 비판은 아주 결정적인 문턱, 핵심적인 문턱이니까요. 다만 내가 볼 적에 이 사람의 논의 자체가 그렇게 정교하고 아주 철학적으로 세련된 비판은 아니다 이런 얘기죠


▲ 탄생 - 비존재에서 존재로

자, 그 2페이지 가운데 보세요. ‘니체는 파르메니데스가 어느 날 동어반복이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존재는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동어반복. 이 동어반복이 진리라고 파르메니데스가 깨달았다는 거지.

근데 ‘존재는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얘기를 바꿔 말하면, 존재는 탄생할 수 없다는 거지. 왜? 탄생한다는 건 뭐에요? 탄생한다는 건 없던 게 있게 되는 거니까. 근데 파르메니데스처럼 이야기하면 존재와 무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벽이 가로놓여 있는 거예요.

존재는 존재고 무는 무죠. 그니까 탄생이 있을 수 없지. 조금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운동은 존재와 무를 가르는 모든 경계선이 무너져야 발생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있음과 없음이, 존재와 무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경계로 갈라지면, 이 세계는 운동이라는 게 없어.

아주 직물적인 예를 들면, 이 컵은 움직이죠. 자, 이 컵은 존재라고 합시다. 존재하죠. 여기(컵 옆)에는 아무 것도 없죠? 무(無)죠? 공기가 있지만 아무 것도 없다고 칩시다. 근데 만약에 존재와 무가 요 경계선을 영원히 건널 수 없다면 운동이 발생할 수 없죠. 이 경계선이 무너져야죠.

내가 만약 백 프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내가 완벽한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에요. 근데 운동이 발생하려면 내 정신이 무너져야 돼. 내가 배고파서 먹죠? 먹으면 어떻게 되죠? 내 완벽한 동일성이 타자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는 거지.

타자와 나의 경계선이 무너져야지 운동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 현실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뭡니까? 바로 그런 운동하는 세계예요. 추상적이죠? 여러분들 이거 익혀야 돼 이런 사고를. 존재론을 하려면 이걸 익혀놔야 되요. 존재와 무가 완벽한 타자성으로 머무르면 운동이라는 게 발생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사이의 관계(relation)가 성립하고 그것의 경계가 무너져야지 운동이 성립합니다.

근데 만약에 존재는 존재할 뿐이고, 비존재는 비존재일 뿐이라면 운동은 불가능한 거지.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모든 존재들이 백 프로 동일성을 가지고 영원히 정지해 있는 세계지.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관계라는 게 없지.

자, 그래서 탄생이란 비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거죠. 또 소멸이란 존재에서 비존재로 가는 거죠. 그죠? 그니까 파르메니데스의 동어반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탄생도 소멸도 발생할 수 없는 세계죠.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파르메니데스가 볼 적에, 존재에서 무로 가는 것은 불가능 하고, 무에서 존재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 존재는 존재고 , 무는 무니까. 이 사람한테는, 존재에서 무로 가는 소멸이나, 무에서 존재로 가는 탄생은 있을 수가 없지. 이 사람에게는. 그지? 이거를 나중 사람들은 뭐라고 표현했냐면, ‘ex nihilo fit : out of(ex) nihilo(nothingness), 무로부터는 그 어떤 것도 생길 수 없다.’

무로부터 존재로 못 가. 뭐가 있다가 그게 변할 수는 있어요. 뭐가 있는데, 그 있는 거를 바꿀 수는 있어요. 그리스 사람들한테는 이게 중요해. 이게 포에시스(poesis), 만듦, 제작하는 거예요. 지금의 시인, 포엣(poet), 거기서 나온 말이죠?

근데 무에서 뭐가 나온다는 건 그리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요. 이러한 그리스의 불문율이 언제 깨지게 됩니까. 히브리적인 사고가 등장하면서죠. 히브리적 사고는 ‘ex nihilo hinil fit’ 가 아니라 ‘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죠. 완벽한 무로부터의 창조.

그리스에게 창조라는 거는 이미 있는 거를 변형시키는 거예요. 포에시스. 근데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어떤 힘에 의해서 크리에이션 아웃 오브 나씽네스 (out of nothingness). 무로부터의 창조인 거예요. 그게 헬라스적인 사고와 히브리적인 사고의 중요한 차이죠.

자, 다시 보죠. '이로부터 그는 다와 운동을 부정하는 그 유명한 논리를 이끌어 냈고 영원부동의 일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의 감각은 끝없이 그에게 다와 운동을 확인시킬 뿐이다.‘ 사유를 하면 논리적으로는 이런 결론이 나와요.

내 감각은 끝없이 우리에게 다와 운동을 확인시켜 주죠. 그래서 그는 말한다. ‘저 우둔한 눈을 따르지 말라. 메아리처럼 울리기만 하는 귀 또는 혀를 믿지 말라. 오직 사유의 힘만으로 확인해 보라‘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귀, 눈, 감각을 믿지 마라. 오로지 너의 사유와 논리만을 믿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이분법, 즉 이성과 감각의 이분법이 오히려 지성을 파괴했으며,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조장했다.‘ 니체의 이야기는 감각과 사유, 신체와 정신은 서로 모순을 형성한다는 이분법이 도래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 이분법은 플라톤 이래 마치 하나의 저주처럼 철학을 억누르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은, 오로지 오류의 근원이 될 뿐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성을, 즉 비존재의 존재를 믿게 만들게 한다. 생성이라는 거는 비존재가 존재한다는 걸 이야기죠.

왜? 생성의 세계는, 존재와 비존재가 존재와 무가, 영원히 결합할 수 없는 영원한 벽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무로 가고 무에서 존재로 가는 세계니까요. 그런 세계는 비존재가 존재하는 세계지. 이것은 사실 엄청 복잡한 문젭니다. 일단 그렇게 알아두세요.


▲ 자신의 완벽한 동일성(Identity)을 지키는 것은 ‘관계’를 맺지 않는 방법 뿐이다

‘그래서 그는 생성의 세계로부터 눈을 돌렸으며, 진리는 창백하고 일반적인 말들의 빈껍데기 속에서만 성립하게 된다. 그는 경험의 피를 희생시킨 것이다.’ 핏기 없는 세계가 도래한 거죠. ‘이런 논증을 전개하면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우리가 매번 개념들의 사용에 있어 존재와 무에 대한, 즉 객관적인 실재와 그 대립항에 대한 결정적인 최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전혀 증명될 수 없고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니체가 볼 적에,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존재와 무는 결코 섞일 수 없다’라고 하는 대전제 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니체는 무슨 이야기에요? 그 전제 자체는 전혀 증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논리와 현실은 불연속을 이루며, 논리적 개념들은 현실에 비추어 검증될 필요도, 수정될 필요도 없다. 엘레아학파가 실재에 부여한 동일성은 감각과 모순되어도 좋았다.‘

동일성이란 말 잘 익혀두세요. 아이덴티티(Identity). 변화가 있는 세계, 관계가 있는 세계는 동일성이 무너지는 세계야. 어떤 존재(A, B)들이 동일성, 자기 아이덴티티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으면 운동이라는 게 불가능해. 그러나 어떤 것들이 서로 릴레이션(relation)을 맺는 순간 어떤 연속성을 갖게 되지.

이 단어도 아주 잘 익혀 워요. 관계라는 것. 관계라는 것도 존재론의 핵심 개념이야.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안 맺으면 영원한 타자지. 그러면서 자와 타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죠. 만약에 릴레이션(relation), 관계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다면 자와 타는 영원히 단절되어 있는 거지. 그러면서 각각이 백 퍼센트 아이덴티티, 동일성을 유지하니까.

그런데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냐면, 자와 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아이덴티티가 무너지는 거죠, 타자에 의해서.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존재든 이걸 피할 수 없죠. 이 현실 세계에 저런 동일성을 완벽히 지키는 게 어디 있겠어요? 없거든요.

근데 이 현실 세계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게 없는데, ‘저런 걸 넘어서는 동일성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전통 철학인 거야. 가장 알기 쉬운 게 수학이지. 내가 이 칠판 위에 원을 그리면 절대 완전한 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왜? 내 손과 탁자와 백묵 이 세 가지의 관계, 운동 속에서 나오는 거거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리는 원은 절대 완전할 수가 없어요. 관계 때문이죠. 내 손도 흔들리고, 백묵도 흔들리고. 그렇지만 수학적 원은 요런 것들 넘어서는 세계지요. 그러니까 모든 학문 중의 철학은 반드시 수학을 끌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 봅시다. ‘엘레아 학파가 실재에 부여한 동일성은 감각과 모순되어도 좋았다. 그들의 동일성은 감각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체가 보기에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존재를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존재가 실존할 수밖에 없다고 추론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을 넘어 사물의 본질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는 내가 어떤 것을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만 현대인이 듣기에는 얼핏 봐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현대인이, 예를 들어서 머릿속으로 천사를 생각하면 진짜 천사가 있나? 상상일 뿐이죠?

근데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근데 이걸 알아야 되요. 파르메니데스가 이렇게 얘기한 거는 문화적인 맥락을 봐야 돼. 이때만 해도 기원전 6세기야. 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거를 언어화하고 담론화한다는 개념이 없어요.

지금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지금 우리는 실재보다 판타지가 큰 시대에 살고 있죠. 그죠?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을 투영해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자 그건 그렇고 봅시다.

‘그리고 여기는 우리가 경험을 넘어서 사물의 본질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에게 사유의 재료는 직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감각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유 속에 있다.’
 

◆ 니체가 바라본 서구의 철학


▲ 니체가 비판한 파르메니데스와 소크라테스의 사유

직관이라는 게 뭐죠? 직관이라는 것은 개념이 매개되지 않은 거예요. 조심할 것은 직관이란 말이 복잡하고, 쓰여지는 경우에 따라 자의적인데요. 이 경우에는 개념이 매개되지 않은 채 그냥 딱 내 감각으로 확인하는 게 직관이에요.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 같은 경우는, 사유의 재료가 직관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은 감각을 넘어선, 차원을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순수이성 속에 있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의 추론들에 반대하면서 실존은 본질에 속하지 않으며, 또 현존재는 사물의 본체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존재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실존을 추론할 수는 없다.’ 그 마지막 문장에서 존재 개념은 본질 개념으로 바꿔도 상관없어요.

자, ‘실존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또 현존재는 결코 사물의 본체에 속하지 않는다’ 이거 무슨 말이지요? 그러니까 A라는 본질이 있다고 해서, 그 본질이 이 세계 속에 실제 개별적 존재(existence)로 존재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지요. 엑시스텐스(existence)란 말은 구체적으로 ‘실존’한다는 말이에요.

지금 니체의 이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나중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런 말이 없어요. 이 사람(니체)이 지금 아리스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엑시스텐스(existence)니, 에센스(essence)니 어쩌고 하는 것들은 아리스토가 쓴 말이 아니에요. 나중 개념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엑시스턴스란 말은 뭔가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존한다는 말이에요. 원래 이 말은 엑스(ex) + 이스탄스(istence)에요. 바깥에 있는 거지. 신 바깥에 있는 게 엑시스탄스죠. 자, 이런 생각 해 보세요. 여러분들 중세로 돌아가서, 신의 머릿속에, 이 세계에 이런 사물들을 만들기 전에 신의 아이디어(관념)이 있어요.

근데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원래 신한테는 ‘인간’이라는 관념만 있었고, ‘인간’을 물질에 넣다 보니까 이런 존재들(학생)이 나온 건지, 아니면 애초에 신의 머릿속에 이정우, 이영희, 김애경, 이렇게 따로 있었는지, 어느 게 맞을까요?

다시 한 번 얘기해 볼게. 신이 자기 관념을 이 세계에 구현하기 전에, 머릿속에 관념을 가지고 있을 거 아닙니까. 그 관념의 내용이 두 가지 경우가 있지. 신의 머릿속에는 그냥 말에 대한 일반적인 에센스만 있었는데, 그 에센스를 이 물질에 넣다 보니까 어떤 놈은 적토마가 되고 어떤 놈은 오추마가 된 건지, 아니면 애초에 신의 머릿속에 적토마, 오추마라는 게 다 있었는지? 그건 모르지 뭐. 믿거나 말거나 문제야. 누가 알겠어?


▲ 실존과 본질, 무엇이 우선인가

근데 우리가 생각할 적에 두 가지 모델이 있어. 알겠습니까? 아까 신의 머릿속에 말만 있다, 인간만 있다고 할 적에 그게 에센스야. 그리고 그 에센스가 이 물질(matter) 속에 구현되면 뭐가 됩니까? 적토마, 오추마다 나오는 거죠. 그놈들이 바로 엑시스턴스. 실존하는 거지. 몸을 가지고 실존하는 거죠.

에센스는 몸이 없지. 물질이 없고 그냥 규정만 있으니까. 눈은 두 개다. 코, 입은 하나다, 척추는 한 가운데 있어. 이렇게 이데(ide), 관념만 있는 거야. 이런 어깨, 팔 같은 물질을 얻으면 실존하는 거지. 그래서 엑시스턴스라는 게 ‘신의 마음 바깥’에 있는 거야.

근데 이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아니에요. 사실은 나중 개념인데, 니체가 저 개념을 가지고 지금 아리스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지요. 약간 혼란스럽죠? 실존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게 고전철학의 기본 테마입니다.

본질이 있고 나서 그 본질이 물질에 구현되는 것이지 실존으로부터 본질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그것을 이제 비슷한 말로 하면 ‘현존재는 결코 사물의 본체에 속하지 않는다’ 마찬가지 얘기예요. 현존재, Dasein. 이 때 da는 시간, 공간의 규정이야.

‘저기’, ‘지금’ 이렇게. 그러니까 da라고 하는 건, 특정한 시공간 속에 있는 게 da에요. 그러니까 da sein 하면 특정한 시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Dasein야. Dasein의 바로 위에 뭐야? existence죠. so sein이 에센스고.

자 그 다음에, ‘존재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실존을 추론할 수는 없다.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은 다시 직관으로 돌아가 그것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공허한 표상들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니체는 지금 계속 뭘 얘기하는 겁니까? 실존이 먼저고 본질은 나중이다.

Dasein 이 먼저고 Wesen은 나중이다.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라는 순수 논리적인 대립, 순수 사유의 대립은 그것이 직관, 경험, 감각 등으로 돌아가서 확인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칸트 말처럼 진리의 논리적 형식적 기준은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또한 소극적 기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에 주목하는 한,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에 주목하는 한, 우리는 ‘그것은 존재한다. 그것은 변해간다. 그것이 없다. 이것은 나무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와는 다르죠. 파르메니데스는 현실, 실존, Dasein보다는 순수 사유의 추론, 논리, 이성을 앞세웠으니까요. 그걸 근거로 해서 다(多)와 운동을 부정했죠? 그런데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한 이 현실 세계, 독일어의 Wirklichkeit라는 말은 wirken에서 나왔는데, 아까 요걸(현실 세계) 잘 보여주는 말이에요.

우리가 아까 이런 말 했죠? 백 퍼센트 동일성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지고, 그래야만 운동이 성립하죠? 바로 이런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죠. 바로 이 세계가 바로 wirken하는 세계야. 내가 지금 칠판에 이걸 쓰고 내 말이 여러분 귀에 들어가는 것들이요. 이렇게 서로 작용하고, 힘을 가하고, 작용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그런 세계가 비르클리카이트(Wirklichkeit)입니다.

이 독일어 단어 자체가 이걸 아주 잘 함축하고 있어요. 거기에 주목하는 이상, 현실 세계에서 만물은 변하고 태어나고 썩어 문드러지고 그런 세계지. 그렇지 않아? ‘파르메니데스의 것과 같은 낱말들과 개념들을 통해서 현실 즉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넘어서 본체 즉 진리계(眞理界)의 우화와도 같은 극(極=Urgrund)에 도달하리라 믿는 것은 착각이다.

공간, 시간, 인과율 같은 (감성과 오성의) 순수 형식들을 통해 영원한 진리(veritas eterna)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착각이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보고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니체를 비롯해서 19세기 철학자들을 특징짓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뭐냐면, 경험주의 내지는 실증주의죠. 물론 니체는 어디 속하느냐는 문제로 가면 실증주의에 머무르지 않지만, 실증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지니는 사람이에요.

'파르메니데스는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으로부터 존재 자체(An-sich-sein)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이런 허황된 생각은 “의식으로 절대자를 파악한다”는 식의 철학자연하는 신학자들, “절대자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탐구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헤겔,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주어져 있어야 하며, 우리가 어떤 식으로는 접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존재라는 개념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베네케 같은 사람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니체가 살던 그 당대 독일 지식계의 사변적인 분위기를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체가 말하는 핵심은 뭐냐면, 경험에 근거해서 Wirklichkeit(현실)에 근거해서 사유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유, 논리, 개념을 통해서 이 경험 세계를 넘어선 실재를 규정할 수 있다고 봤단 이야기를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테제는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테제에요. 존재와 사유의 일치. 예를 들어서, 이 종이를 눈으로 보죠? 내 감각(시력)과 센서블한 게(종이) 일치하는 거죠 그죠? 내 소리와 여러분들의 귀가 일치하죠?

마찬가지로 내 사유가, 이(사물) 너머의 본질에 일치한다고 보는 거지.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게 인식 주체고 이게 개체라면, 내 감각과 요게 일치하죠. 내 눈과 색깔이 일치합니다. 내 귀와 소리가 일치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혀와 음식 맛이 일치하죠.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사유하는 것과 이 사물의 본질이 일치한다는 거지.




▲ 존재와 사유는 일치하지 않는다

니체는 지금 존재와 사유가 일치한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거죠. 내가 순수 이성으로 어떤 사유를 해 가지고 이 세계의 근본 본체에 대해서 사유한다 하더라도, 정말 그 본체와 일치하리란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서구 사회는 내가 이 세계에 본체를 사유하면, 진짜 그 본체와 일치한다고 전제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사유와 본체의 일치라는 테마죠.

니체의 소크라테스 비판은 이 사람의 초기의 비판이 있고 말년의 비판이 있어요. 초기에 비판한 게,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이라는 논문이 있죠. 말년에는 ‘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이 나옵니다. 근데 말년에 쓴 소크라테스론은 니체가 쓴 글 중에서 거의 최악의 글이지.

완전히 인신공격으로 가득 찬 책이에요. '못생겼다'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그래요. 못생겼다고 공격해요. 못생겼다는 건 비그리스적이라는 거지. 별 하여튼 희한한 글인데, 하여튼 내가 보기에 니체가 쓴 글 중에 최악의 글이에요.

그거보다는 초기 젊을 때 쓴 거. 그리스 비극과 연관 지어 쓴 게, 좀 재미있어요. 원래 이 사람(니체)에게 그리스의 비극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그리스 문화의 잠재라는 게 아주 고도로 농축되어서 나타난 거죠. 근데 재밌는 것은 보통 구분 안 하고 쓰기도 하는데, 니체는 비극과 드라마를 구분해요.


▲ 도취 - 자의식의 붕괴로부터 오는 연속성

드라마라는 건 사건이라는 거지. 사건. 또는 상황이지. 근데 니체는 비극의 가장 본질을 디오니소스적인 걸로 봐요. 니체가 어찌 보면 평생에 걸쳐 얘기한 게 디오니소스거든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는데, 그에 대해 묘사하는 몇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쓴 단어는 도취라는 단어에요. 가끔 가다 ‘봄의 도취’ 이런 말도 쓰는데. 그러니까 도취라는 것은 니체가 볼 적에, 개체성의 원리를 극복하는 거예요. 개체성의 원리 극복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개체(들)의 아이덴티티가 고착화 되지 않는 거죠.

개체라고 하는 게 굉장히 피곤한 거예요. 개체로부터 자와 타가 구분되죠. 이 놈(강의록)이 하나의 개체, 인디비쥬얼(individual)이죠. 나도 하나의 인디비쥬얼이고. 근데 이 놈하고 나하고 구분되죠. 내가 이 놈을 내 이마에 막 넣으려고 해도 안 들어가죠.

개체라고 하는 것은 자(自)와 타(他)를 구분하는 거야. 그리고 (자와 타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인간에게는 그 자가 더 강하죠. 그 인간에게서 훨씬 더 강한 그 자(自)를 뭐라고 하냐면, 보통 자의식(自意識)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자의식이 있는 한, 인간이란 절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아집을 떨칠 수 없죠. 아(我)에 대한 집착, 나라고 하는 거에 대한 집착을 절대 못 떠나죠. 개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개체들과 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 사람이 갖고 있는 나,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나)라는 걸 가지고 있는 이상, 영원히 완전히 화합할 수가 없지. 그래서 우리가 보통 바람처럼 살고 싶다 그래요. 바람이란 게 뭡니까? 개체가 없이 그냥 흩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개체성이 존재하는 이상, 자(自)라는 게 존재하고, 그것이 인간에게는 자의식, 더 심하게는 아집으로 나타나죠. 그런데 도취라는 게 뭐냐? 자의식의 아이덴티티가 무너지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경험 가끔 하죠? 스키를 탈 적에, 나하고 산하고 완전 합일하잖아.

뭐 음악을 들을 때라든가, 남녀가 뜨거운 사랑을 한다거나, 아니면 같이 혁명운동에 참여해서 뜨겁게 혁명을 일으킨다. 이럴 때 자기 자신(아이덴티티, identity)이 무너지죠. 무너지면서 어떻게 됩니까? 연속성이 성립하죠? 그런 게 니체가 말하는 도취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거예요.

니체는 그와 같이, 그리스 비극이 (원래는) 디오니소스적인 거(도취)를 표현했었는데, 에우리피데스가 그걸 망쳐놨다고 말하죠. 말하자면 비극을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지적하죠. 그래서 음악의 역할을 줄이고, 대사도 굉장히 변증법적인, 이성적인 대화로 만들고 말이죠.


▲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 비판

그러니까 니체가 말하는 게 연극 작가 아르또라는 사람의 세계와 비슷한 거지. 그런데 바로 그 에우리피데스를 뒤에서 사주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이런 얘기야.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 그러니까 '이성만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끈다', '이성만이 인간을 덕스럽게 하고, 덕스러운 인간만이 행복하다'는 주장이, 이성=덕=행복과 같은 소크라테스의 공식이라고 (니체는) 얘기하죠.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이성 중심주의, 인간이 이성적으로 되어야만 덕이 있고, (여기에서 덕은 희랍적인 의미인데,) 덕이 있음으로써만 행복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가, 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거를 말살시켰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니체)은 그걸 아폴론적인 거라고 그래요. 디오니소스적인 게 아니라 아폴론적인 거. 근데 그(니체의) 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게 아니라, 변해요. 어떤 대목에서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사이좋게 조화를 이뤄야 된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나중에 그걸 회고하면서 그 때만 해도 자기가 헤겔의 변증법적 그늘 속에 있었다고 자기 비판적으로 이야기도 하고 아폴론적인 걸 단적으로 비판하고, 디오니소스를 전면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있고, 그렇게 변해요.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도, 오락가락하는데, 아주 심하게 이야기할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소크라테스가 음악을 한다면, 아주 몹쓸 사람은 아니고, 음악만 가미 한다면 좋겠다고 하는 등 태도가 일관되지 않죠.

어쨌든 이 사람이 생각하는 도취라는 거, 디오니소스적인 거에 대하면 이 사람이 한평생 이어지는 태도죠. 그리고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소크라테스가 정말 그랬는지는 또 따져봐야 되는 복잡한 문제인데 어쨌든 니체는 그랬다는 이야기죠.

이성 중심주의, 이성 있는 사람이 덕스럽고, 덕스러운 사람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비판했어요. 거듭 말하지만, 결국은 존재 중심의 엘레아 학파 사고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생성을 강조하는 입장의 실천철학적인 버전이 뭡니까?

우리가, 몸과 감각과 현실 속에 살아가는 Wirklichkeit의 세계를 폄하하고 현실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비판이 서로 맞물리지. 그리고 전자 비판이 엘레아 비판으로 나타나고 후자 비판은 소크라테스 비판으로 나타나죠.

니체에게 있어서는 결국 두 가지가 합친 게 플라토니즘이죠. 그리고 플라토니즘의 대중 판본이 기독교에요. 그리고 독일 철학이죠. 이 사람은 독일 사람인데 독일 굉장히 싫어해. 특히 관념 철학들은 이런 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거죠. 이것을 아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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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힘든 개념이 있다면 바로 민족(nation)과 민족주의(nationalism)일 것이다.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가 보편적 흐름이 되어가면서 이 두 개념의 학문적 가치는 용도폐기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두 개념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 적어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까지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그간 이 두 개념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는 <근대적 산물로서의 민족/민족주의>로 함축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수많은 반론들이 지금 제기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근대 사회에서의 민족-민족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다시 열어젖히는 것이다(난 개인적으로 민족-민족주의는 모두 배치- 여기서의 배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젠더, 계급, 자본, 국가, 인종 등 - 의 산물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민족과 민족주의를 단일한 형태나 고정된 형태로 보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이러한 요소들 간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그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은 언제나 다른 배치를 구성할 수 있는 잠재성에의 길을 터 놓는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래의 글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의 내용을 담비에서 실은 것을(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10842&rsec=MAIN&section=MAIN) 옮겨온 것이다.

겔너는 그의 고전적 저서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나폴레옹 시대에 쓰여진 샤미쏘의 소설을 언급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겔너는 그 내용에 대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민족을 가져야 한다는, 또는 특정 민족에 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분석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서 민족성은 그림자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이라는 인식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민족의 ‘자연성’과 ‘보편성’을 다시 영구 불멸의 탈역사적 주체로 발전시키는데 활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접하게 된다. 2008년 한국의 봄을 달군 화제는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벌어진 중국 민족주의의 폭력적 양상과 이에 대한 한국 대중의 민족주의적 반응이었다. 또 일본에서 독도에 대한 민족주의적 교육 강화에 대한 한국의 민족주의적 대응이었다. 쇠고기 파동의 확산 과정에서도 식품 안전 못지않게 민족적 자존심이 작동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민족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물론 인터넷과 같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오히려 더 강화되는 양상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민족’, 근대가 만들어 낸 이름

하지만 민족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도 아니고 영구 불멸의 탈역사적 주체는 더더욱 아니다.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민족을 설명하고 분석하였다. 과거 혈연이나 지역 단위의 소규모 공동체와는 달리 민족은 서로 한번도 접해 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과 인식의 기제를 통해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근대적 개념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겔너는 상기 저서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기능적 필요에 의해 민족이 생성되었다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서는 민족과 같이 커다란 단위의 대중 사회가 필요했고, 기술을 활용하는 생산양식은 대중적인 교육 제도를 필요로 했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민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 졌다는 지적이 등장한다.

홉스봄은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개념의 근대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대중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민족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추적하였다. 그는 민족주의 엘리트가 위로부터 강요하거나 확산시키는 민족의 개념 뿐 아니라 대중 속에서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민족을 훨씬 장기적인 측면에서 조명하고 분석하는 스미스조차 근대 민족의 기초로 작용했던 전(前)근대의 ‘민족의 종족적 기원’을 강조하지만, 이는 하나의 재료로 사용된 것이지 그 자체가 민족이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대부분의 민족과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이들 현상의 근대성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이처럼 민족은 사람이 눈이 두 개이고 코가 하나이듯이 자연스런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척 다양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근대라는 커다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실제로 지구상에는 존재하는 민족만큼이나 다양한 민족의 개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0인 10색의 민족 개념

서구에서 민족을 논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모델은 프랑스와 독일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민족의 고갱이는 종족도 언어도 종교도 이익도 영토도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라고 주장하였다. 이 영혼과 정신은 ‘함께 공동의 삶을 계속하기를 명백하게 표명하는 욕구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공동의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정치적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의 민족 개념은 혈통과 언어, 풍습과 전통을 중시한다. 프랑스의 의지에 기초한 민족보다 종족적인 의미가 더욱 강하게 담겨 있는 민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이런 차이점은 전자의 개방적인 속지주의 국적(nationality)법과 후자의 폐쇄적이고 혈통적인 국적 부여 원칙에서 확인된다.

영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근대적 민족을 형성한 잉글랜드와 이에 어느 정도는 대립적인 입장에서 발전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앵글로색슨계의 혈통적 문화적 동질성이 지배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인종과 종족으로 구성된 다문화적 민족이다. 영국이 영토적 기반을 가진 다민족이라면 미국은 인종·종족적 기반을 가진 다민족이라고 하겠다.

동아시아에서도 민족의 개념은 동질적이지 않다.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두 민족의 영구한 성격, 세계 ‘최고’에 가까운 민족 동질성들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일본은 팽창적 제국주의 시절 자신의 혼혈적·혼합적·다민족적 기원을 강조한 바 있다. 물론 타민족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 개념이 조작된 결과이다.

한국도 자민족의 장기적 성격과 동질성을 내세우지만 불과 분단 60여 년이 초래한 남북의 거리와 차이는 이 동질성에도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국가뿐 아니라 민족의 범위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제한하는 경향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가변성과 유동성, 그리고 우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과는 또 다른 민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청조에서 물려받은 영토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20세기에 고안해 낸 개념에 불과하다. 중국은 미국이나 영국과 비슷한 다민족 민족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영토성에 기반한 다민족 국가이기에 최근 티베트에서처럼 분열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가 분단의 현실이 민족의 분화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경우로는 타이완을 들 수 있다. 타이완은 한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내성인(內省人)과 외성인(外省人)의 대립이 심각하게 나타났고 상대적으로 내성인을 중심으로 독립 성향이 등장하게 되었다. 종족적 문화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국가 단위에 해당하는 민족주의의 생성이 이뤄진 모양이다. 쳔꽝싱은 이를 『제국의 눈』에서 ‘국족주의’라고 부른다.

유럽의 새 옷, ‘유럽 민족’의 탄생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유럽연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polity)는 이에 상응하는 유럽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가고 있다. 청색 바탕에 하얀 별이 그려진 깃발과 베토벤의 환희의 노래는 유럽 연합의 상징이다. 유럽 시민들은 5년마다 직접 투표를 통해 유럽 의회의 의원을 선출한다. 기독교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유럽 전체에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륙적 규모의 정당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인간적 얼굴의 자본주의’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미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의 형성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기에 초보적인 유럽 민족의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정책과 정치 활동이 조직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유럽적 민족 정체성의 형성을 동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민족은 그림자보다는 - 물론 조명이 여럿이면 그림자도 여럿이지만 - 갈아입거나 껴입을 수도 있는 옷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한 사람이 스코틀랜드인이면서 영국인이고, 동시에 유럽인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한민국인이며, 한반도인이고, 또 동아시아인일 수 있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 정치외교학





[경희대 대학원보 159호] 민족주의란 특정한 역사, 문화, 언어, 혈통, 이익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국가를 열망하거나 유지하려는 정신적 태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공유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도록 교육되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코리안은 단일민족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일본, 중국, 거란, 여진, 말갈, 심지어 아랍계 등의 피가 섞여 있다. 삼국 시대를 ‘우리’ 역사의 기원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백제가 살아남아서 ‘백제민국’이 되었다면 한국인들은 오늘날 충청도 일대의 지역을 ‘외국’으로 인식하고 충청도 사람들을 ‘다른’ 민족으로, 충청도 사투리를 ‘외국어’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에 백제에게는 신라가 ‘한핏줄’이 아니라 당나라와 같은 외세였을 뿐이다. 오늘날 백제, 고구려, 신라는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인식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삼국병합’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우연과 현재의 관점을 과거로 투여하는 국사 덕에 오늘날 한국인들은 삼국을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인식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이들이 오독하는 것처럼 그것이 실체가 없는 허구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민족 구성원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면서도 그 구성원을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상상력’ 때문이다. 국사, 국어 등을 통해서 이러한 상상력을 만들어내고 부추긴 것은 근대민족국가의 공통된 특성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이전에 민족의식이 존재했다고 착각한다.

‘평등’ 전제한 근대 초기 민족주의는 진보적 사상

민족이란 의식은 ‘우리’의 형성에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구성원들의 평등 의식을 필요로 한다. 신분제의 철폐는 민족의식의 결정적인 전제가 된다. 가령 노비가 양반을 ‘우리’에 포함시켰을까? 양반이 상민이나 노비를 ‘우리’라고 느꼈을까? 임진왜란 초기 단계에 많은 노비들이 왜군 편에 가담하고 그 일부가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노비에게는 양반이 ‘우리’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었을 뿐이다. “민족주의가 농민을 프랑스인으로 만들었다”는 유명한 얘기는 여기에도 해당된다. 한반도에서는 조선말 신분제 폐지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민족의식의 발흥이 비로소 노비, 상민, 양반을 ‘조선인’으로 만든 것이다.

민족주의는 적어도 근대 초엽에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그것은 신분적 평등을 지지하고 왕조에 대항하는 이념적 동력이었다. 또한 20세기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결합하여 제국주의적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현재 민족주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차별과 은폐, 근대 이후 민족주의의 산물

앞서 얘기 했듯이 민족주의는 ‘우리’라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밖에 서있는 ‘남’을 창출한다. 그래서 ‘우리민족’과 ‘타민족’이 생겨난다. 이 타자화는 평상시에는 타민족의 차별, 위기 시에는 타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인종학살)의 근거가 된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정당화된다. 한국 자본주의가 아류제국주의(sub-imperialism) 성격을 띠게 되면서 동남아시아 등에서 행하고 있는 착취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동질적 집단,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오인’되면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별 계급 간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을 맡게 된다.

‘우리민족’의 강조는 ‘내부’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지배계급의 특정한 이익을 ‘민족의 번영’으로 수용하도록 만든다. 외국에서 접하는 한국재벌의 광고에 감동하는 것은 이러 연유에서다. ‘민족=대기업=국가=사회=우리’라는 등식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타자 역시 동질화된다. ‘미국=정부=사회=기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따라서 최근의 ‘검역주권’ 논란에서 보듯이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한국 vs. 미국의 문제로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수입업자와 미국 축산농 간의 동질성은 은폐된다. 다시 말해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 주변부의 중심부와 중심부의 중심부가 이해관계를 같이 할 가능성, 주변부의 주변부와 중심부의 주변부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가능성은 숨겨진다. 민족을 기준으로 한 선 긋기는 실제 이익의 경계선과는 실제로는 매우 다르다는 얘기다.

민족주의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집단주의다. 생명, 환경, 인권, 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제된다.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한국내의 환경은 물론이고 외국의 저임금 노동 및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 되고 만다. ‘국익’, ‘국력’,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면 보편적 가치의 희생은 정당화된다. 또한 성, 계급, 지역 등에 따른 정체성 및 이익은 무시되거나 하위 의제로 서열화 된다. 하지만 여성주의자에게는 민족보다 젠더가, 노동자에게는 민족보다 계급이 더 중요한 범주가 될 수 있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에게는 미국이 제국주의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적은 사회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탈민족적 주체를 민족의 하위 단위로 포섭할 때 그것은 다중적인 주체를 억압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민족을 앞장세울 때 그것은 민족의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기재가 될 수 있다. 거기서 남성-부자-비장애인-이성애자-발전주의자들이 민족을 ‘대표’하게 되고 그들의 헤게모니는 여성-빈자-장애인-동성애자-생태주의자를 침묵케 한다. 후자는 ‘비민족’, ‘비국민’이 되고 만다. 우파적 민족주의는 물론이고 진보적 민족주의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것을 ‘일시적 부작용’이거나 ‘특수한 예’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얘기다.

‘민족’ 개념에 기반한 연대는 또 다른 선긋기

최근 세계화를 반대하는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되레 민족주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폐쇄적 민족주의건 ‘열린’ 민족주의건 그것의 본질은 배제 및 차별 그리고 은폐다. 민족주의를 소리 높여 외친다면 그것은 ‘민족=대기업(재벌)=국가’라는 등식을 더욱 강화할 뿐이며 선진국에서 요구되는 합리적 자본주의 효율성마저 뒷전으로 몰아놓고 한국사회에서 승자/강자 독식의 기재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 때 진보진영의 민족주의적 대응은 ‘내부’의 개혁에 대한 관심을 ‘미국의 음모’로 돌려놓음으로써 재벌을 되레 도와주지 않았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유럽연합’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근대적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국제적 정체성을 향해 가고 있지만 화폐통일까지 이루는 연합이 경제적으로 세계화와 어떤 관련을 맺을지는 아직도 애매하다. 반면 요즘 유행하는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 담론은 냉전체제의 유지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 부족으로 인해 길을 잃고 있다. 물론 다양한 집단 및 개인과 삶의 작은 테두리를 억압하는 민족주의로 퇴행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아니다. 여기서 다룰 수 없지만 민족주의적 개발독재가 파괴해버린 풀뿌리 작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국민국가와 세계화의 틀을 동시에 넘어서는 비민족적 작은 공동체를 살려내고 재구성하는 시민사회간의 국제주의적 연대다. 사람, 자본, 상품이 국경을 넘나들며 전 지구를 순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월경적 주체로서 여성과 생태주의자들이 맡을 역할이 매우 커 보인다. 민족/국가적 선 긋기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다.

권혁범 / 대전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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