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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다. (p52)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느냐 그렇지 않냐는 사람 마음가짐에 달렸다. 환경 자체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우리 몫이다. 이 구절은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소신대로 살아가기 위해
주인공이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자신만의 공간으로 재탄생 시키는지 이 소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920년대 러시아, 혁명 후 바깥세상은 격변과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로스토프 백작은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쓴 혐의로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는다. 스위트룸에서 좁은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옥상이나 창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을 바라봐야 했다. 자신이 투숙하던
호텔에 종신 연금되었을 때, 그는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은 나이였다. 좁은 공간에서 살기엔 그의 지식과 역량이 방대했다. 한때는 알렉산드로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이었던 그가 호텔에 종신 연금된 채 살아야 하는 삶을 쉽게 받아들이진 못했을 것이다.
할 일은 너무 없고, 할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p90)했지만, 그는 차츰 그 안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갔다. 니나의 친구가 되어
호텔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아름다운 여인의 연인이 되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깊은 친분을 쌓아가며 말이다. 끝이라 생각했던 순간 꿀벌이 가져다준 고향의 향수가 그에게
생명의 향기를 다시 불러일으키듯 말이다. 한정된 공간인 호텔 안에서 그는 비관적인 마음보다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삶을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사건이
벌어지지만, 백작은 자신의 품격과 예의를 잃지 않는다. 삶의 상황이 우리 자신의 꿈을 추구하지 못하게 할 경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꿈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p529)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가택 연금이 호텔이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바깥세상만큼이나 다른 이유로 다채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호텔은 그나마 그에게 견딜 수 있는 공간이었을 테니까. 또한 격변기인 당시 상황에서 호텔 안의 생활은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조금이나마 비켜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론 로스토프 백작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만의 방식으로 극복해 나갔을 거란 생각도 든다. 아름답고 근사한 계절의 변화와 평범한 삶 속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온갖 경사스러운
일들이 하루하루를 구별할 수 없는 암울한 나날로 대체된다는 사실에도, (p176).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기억하고 견뎌내길 원하기 때문이다.
백작에게 소피야(니나의 딸)가 찾아온 순간 그의 삶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소피야로 인해 호텔 안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야 했던 백작은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다.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딤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p608)란 그의 말처럼, 비로소 자신과 소피야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 너머를 탐험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주어진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백작은 그다운 모습으로 이를 실천해 나간다.
읽는 내내 나는
주어진 자유를 얼마나 잘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한다. 자신을 어떠한 상황 안에 가두는 것은 외부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이 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때론 누군가의 통제 아래 있기를
원하다가도, 구애받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기도 하니까 말이다.
당시의 상황을 드러내는
세세한 문장들과 백작의 품위만큼이나 우아하고 세련됐던 작가의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지만 백작을 통해서 보여줬던 러시아의 문화, 역사,
철학, 음악 등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지식들로 인해 소설을 읽는 내내 풍족함을
느꼈다.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 혁명 후 약 30여 년 간의
세월이지만 “혁명”이란 단어보다는 “인생”이란 단어에 방점을 두고 쓴 소설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보여줬던 백작의 용기와 실천은 책을 덮을 때 미소 짓게 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p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