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야간비행 - 정혜윤 여행산문집
정혜윤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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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이지만 사진 한 장 없다. 필리핀의 보홀을 여행하며 지난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거닐 때 느꼈던 감정을 자유자재로 오버랩 시키는 저자의 글이 오히려 영상 기술에 가깝다. 영상보다 더 영상 같은 그의 문체에 이끌려가다 보면 어느덧 만나기 어렵다는 ‘나’의 심연에 닿는다. 그녀가 여행하는 목적이다. 여행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나를 알기 위함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출생의 비밀을 찾는 것은 아닐 거야. 탐정같이 겉에 드러난 정보를 한없이 수집하는 것도 아닐 거야. 그것 없이는 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무엇, 그 어떤 것을 알게 되는 것일 거야.”(79쪽)

‘겉’ 안에 들어찬 ‘속’을 알기 위해서는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린 섣불리 태그를 붙여댄다. “피렌체? 메디치와 르네상스의 도시야.” “파리? 멋과 낭만이지.” “스페인 플라멩코와 투우와 자유와 열정의 나라지.” 속을 알기도 전에 떠드는 이런 말, 우리는 ‘상투성의 포로’가 되었다. 심지어 상투가 강요된다. 사람을 알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려는 시도는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어. 주로 힘없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다름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해. 소수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다름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해. 나는 강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민들의 작은 세계가 파괴되지 않기를 바랐어.”(145쪽)

여행은 이에 맞서는 저항이다. 나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로 옮겨 가며, ‘나’에 대해 찾아가는 길이어야 한다. 쉽지 않다. 이 길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 또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날 알함브라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셀카봉이었어. 셀카봉을 창처럼 들고 카메라를 방패 삼은 사람들이 벽을 빼곡히 에워싸고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단다. …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들은 알함브라 대신 자기 자신을 감상하느라 그 유명한 알함브라의 세공 벽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어.”(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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