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역사 강의 - 유토피아 사회주의에서 아시아 공산주의까지 새움 총서 1
한형식 지음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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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사회학과 백승욱 교수  ([자본주의 역사 강의], 그린비. 저자]   

 
영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할 즈음에 인터넷을 통해 그린비 출판사에서 [맑스주의 역사 강의]라는 책이 출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실린 책 소개를 보고 처음 든 느낌은 불쾌함이었다.
   그린비에서 [자본주의 역사 강의]를 낸 적이 있었는데, 소개된 바로 보자면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담고 있는 책을, 같은 출판사에서 마치 시리즈 저작물처럼 매우 밀접한 제목을 달아 출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출판사가 어떤 책을 내는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서로 연상되는 유사한 제목의 책을 낼 때는 그로 인해 생길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특히 '마르크스'라는 매우 어렵고 중요한 주제의 낼 경우는 더더욱 말이다.
  귀국 후 이에 대해 출판사에게 강하게 항의를 했었고, 책을 받아 읽어보았는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왜 필자와 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려 했는지 아직도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진지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이 목표라기보다는 '역사적 진열장 속에 있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유물을 다시 꺼내 먼지를 후후 불어 털고 다시 한 번 감상해 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정세에서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단지 '역사적 변호론'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성과 유의미성을 살려 낼 수 있는 것일까?

   강의로 책을 낸 후 나도 후회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강의라는 형식상 생길 수 있는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불만족스럽다. 20년 전쯤 나왔으면, 여러 입문서 중의 하나로 읽힐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시점이라는 것이 생뚱맞다. 지난 20년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마르크스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국내외에서 진행 되어온 나름 심도있는 연구의 결과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우리의 논쟁을 다시 20년 전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다시 읽으면서 책이 제기하는 쟁점과 질문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떻게 그 역사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려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체 구도에서 한 가지만 먼저 지적해 보면, 마르크스주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당'이라는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거의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러시아혁명의 역사와 관련해 짜르체제의 정세적 엄혹함 하에서 출현한 전위정당을 다른 당과 혼동하면 안된다는 경고 정도가 보이는데, 이건 오히려 지하당과 전위당을 혼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니까.
  당의 문제는 2인터 내셔널이나 러시아혁명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이 가장 심각한 쟁점으로 떠오른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설명하면서도 쟁점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필자의 어떤 정치적 견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데, 그건 양비론에 입각한 스탈린주의의 역사적 옹호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책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너무나 쟁점없이 다루고 있다. 2인터내셔널의 시기가 그래도 역사적 사건들을 그런대로 정리해 잘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과도하게 소략하다.
   마르크스를 다루면서 [자본]에 대한 논의를 별도의 책에서 다루겠다고 하면서 '정치경제 비판'의 핵심적 논의를 모두 배제했는데, 그건 이후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왜 수많은 분기와 논쟁이 벌어지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을 배제한 것과 다름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 이전으로 가면,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이전의 정통적 해석의 문제를 크게 넘지 않는 수준에서 소개를 마무리 하기 때문에, 이것이 왜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에서 쟁점이 되는지를 알기 어렵다. 전사들은 전사들이니까 일단 그렇게 놓아 두자.

   러시아혁명부터 중국혁명까지 20세기의 중요한 역사를 다루는 내용들에는 눈에 거슬리는게 너무 많다. 이야기들이 충분한 연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야기이다.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역사는 과거 소련의 공식 교과서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야기들과 그다지 다른지 모르겠다. 레닌과 관련되어, 1905년 혁명 시기의 [사회민주주의자의 두 가지 전술], 1917년의 '4월테제', 그리고 내전 후의 NEP에 대한 해석은 이를 '트로츠키로의 경도'나 '스탈린의 전사'의 어느 한 축으로 끌어들여 해석하려는 통상적 해석 방식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리고 여기도 늘 '당'의 모순이라는 문제는 논의에서 배제된다.
   262쪽에서는 "레닌은 제국주의의 주체로서 독점자본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것과 같은 형태의 독점자본이 10월 혁명 이후에 러시아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라고 대담하게 주장하는데, 이는 1917년 레닌의 핵심문헌 중 하나인 [임박한 파국,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보지 않았거나, '4월테제'와 [임박한 파국] 사이의 모순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하는 문제가 있을 경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레닌을 NEP 시기로 마무리 하면서, 여기서도 공식 당사에서 정리하는 방식을 벗어나지 않는데, 특히 NEP와 관련해 레닌이 제기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쟁점, 첫째는 국유화와 구분되는 사회화라는 쟁점과, 두번째로 '협동조합'에 대한 재인식이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4월테제'와 [제국주의론]을 출발로하는 레닌의 인식 상의 혁신(비록 한계 속에 있었다 하더라도)을 포착하기 힘들고, 그럼 굳이 이 시기의 논의를 다시 재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스탈린 시기의 논의는 다소의 양비론과 역사적 제약론에 기대는 방식으로 비껴가는데, 역사적 불가피성에 과도하게 실리는 무게에 동의하기 어렵다. 역사적 제약 하에서 대응은 늘 동일한 것은 아니고, 그 돌파를 위해 어떤 쟁점을 남기는가가 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 혁명 시기를 다루면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좌익반대파와 우익반대파는 거론하면서도 러시아혁명 이후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노동자반대파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혁명 하에서 '대중의 정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혁명의 논의는 몇 개의 문헌에 의존한 소개로 보이는데, 따라서 중요한 쟁점들이 묻히거나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310쪽에서 쑨원의 삼민주의를 이야기하는데, 공산당과의 협력에서 이후 지속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신삼민주의'였다.
   그리고 중국혁명의 과정은 코민테른과의 대립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 문제를 너무 소략하게 다룸으로써, 이것이 이후 왜 중소분열과 나아가 국제주의의 의제 자체가 붕괴하는 후과를 낳는지를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316쪽에 이야기되는 '토지개혁'과 관련해서도 중국혁명기 토지개혁은 정세와 지역에 따라 '몰수'와 '감조감식'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여기서는 과도하게 단순화되고 있다.
   중국의 '소련파'와 관련한 317쪽의 주장도, 1920년대 말 소련의 '중산대학'에서 수학한 지식인들과 왕밍, 보쿠 등 코민테른과 소련의 정치적 후광 하에 당 지도부를 장악한 세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의 중산대학 출신 세력에는 마오에게 늘 이론적으로 중요한 관계였고 문혁기에도 중요한 인물인 천보다가 포함되고, 지도부의 자녀들도 다수 포함된다.
   320쪽 쭌의회의의 위상은 과대평가 되었는데, 쭌의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군사노선'의 문제이고, 이로부터 옌안문예 강화까지 마오사상이 당 내에서 지도적 위상으로 자리잡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330쪽 마오의 모순론 소개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어떤 조건하에서는 생산관계가 생산력보다.... 결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모순론의 핵심 주장은 아니다. 마오는 어쩌면 거의 항상 생산관계가 생산력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 주장의 의미는 1950년대 말 마오가 쓴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평주]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순론]의 의미는 오히려 모순에 대한 일반이론은 없고, 모든 모순은 구체적이고, 따라서 모순의 구체적 분석만 필요하며, 결론적으로 정세우위의 사상을 정립한 데 있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는 정확히 [제국주의론]과 '4월테제'의 레닌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332쪽에서 '마오주의는 레닌주의 틀로도 설명할 수 없는...'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이는 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이 제기한 '정세우위'라는 사고가 왜 볼셰비키에게 수용될 수 없었고(그런 점에서 레닌은 트로츠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점에서 레닌과 마오의 '모순론'이 연결되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레닌-마오의 연계성에 대한 경시는 333쪽 이하에서 1949년이 '공산주의 중국의 성립'이 아니라 '신민주주의국가'의 수립이었고, 이 신민주주의적 이행기라는 모호하고 모순에 찬 규정이 사실은 '4월테제'에서 NEP까지의 시기에 레닌의 사유에서도 어떻게 동일하게 나타나며, 그리고 이것이 현실에서 어떤 난점과 모순을 낳는지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고 보인다.

   336쪽에서는 마오의 '부단혁명론'과 '계속혁명론'을 혼동하고 있다.

   이후도 여러가지 많지만, 무엇보다 1957년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의 연계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 348쪽에서 나오는 '5.16 통지'는 1966년 공식 발표되지 않고, 1년 후에 공개된 문헌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고, 354쪽 류사오치의 딸은 칭화대에서 홍위병을 조직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354쪽에서 355쪽의 "실제로 인명손실 자체가 홍위병들에 의해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희생자 중에서 홍위병 특히 조반파에 의한 사망자의 비중이 적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이들에 의한 피해가 적었던 것은 아니다. 또 문혁이 이후 당 주도로 전개되면서 대대적인 지식인의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도 그 다음 쪽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이 보인다.
   356-7쪽에서는 상하이 인민공사와 상하이 공작기계창을 혼동하고 있고, 358쪽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체였다고 할 수 없는 농민을 주체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358쪽 이하에서 문화대혁명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당-대중'의 모순은 쏙 빼놓고 있다.

   그 이하는 간략한 정리들이어서, 쟁점을 보기는 어렵지만, '아시아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그 외적 제약의 지적은 보이지만, 그 내적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계기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그런 점에서 이를 415쪽에서 '새로운 성격의 맑스주의가 생겨났"다고 평가하는 근거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마르크스의 현실성과 그 이론적 힘이 강력한만큼,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시절의 잊힌 '역사적 퇴물'처럼 오해되고 있는 것 만큼, 마르크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간단치 않고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언제나 그래서 마르크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신중을 기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래야 변호론이 아닌, 마르크스의 진정한 발전과 현재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사실 새움과 그린비의 이 공동기획은 이 책에만 불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최근 열렸던 알튀세르 심포지움에 대해서도 비슷한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굳이 찾아가서 나름 몇가지 '딴지'를 걸어보려 한 것이었는데, 결과는 잘 모르겠다.
   내 불만은 지금, 알튀세르 사후 20년에 알튀세르를 다시 논의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고, 그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심포지움은 그렇게 해석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세 번의 질문을 한 셈인데,
   (1) 바디우나 랑시에르를 알튀세르와의 관계 속에서 논의하려면, 그들이 단지 알튀세르의 제자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와의 관계에서 이들 사이에 왜 결별이 발생했는지가 중요하고, 이 문제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비판,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해, 이들과 발리바르 사이의 대립선 세 가지에 비추어 볼 때 함의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
   (2) 2천년대 발리바르의 단절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일 뿐이며, 그것은 발리바르 자신의 논의에 적용해 볼 때 오히려 문제를 낳는다. 차라리, 그것을 '정치의 맹목점'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고, 특히 'transindividuality'의 철학자로서의 발리바르라는 쟁점을 부각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으로 생각된다.
   (3) 알튀세르의 변증법의 주장을 평면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다지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왜 변증법의 한계를 계속 발견하고, 변증법을 떠날 수는 없지만, 유물론적 사고를 우위에 둠으로써 '정세'와 '정치'에 대해 계속 사유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는지를 다시 분석해 보고, 여기서 변증법과 계보학의 관계라는 쟁점을 만들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등이었다.

   책의 최종 결과물이 나와보아야 알겠지만, '더욱 많은 마르크스'와 함께하지 않는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 대한 '역사적 변호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식효과를 낳을 것으로 우려된다. 내가 그 기획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결국 하지 않기로 한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었다.

   '다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건 아주 긴박하게 필요한 것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모든 시도가 플러스 효과를 낳기보다 마이너스 효과를 낳기 때문에 늘 신중해야하는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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