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생애 에버그린북스 10
로맹 롤랑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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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로맹 롤랑이 <미켈란젤로의 생애> <톨스토이의 생애>에 이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일대기이다. 나는 아주 얇은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분량과는 상관없이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이 나기까지 했다.

얼마 전,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이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 발가락이 보기 흉하게 변형되도록 끊임없이 연습에 또 연습을 하였기에 세계적인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을 수가 있었다고 언론마다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 책의 84쪽에는 요셉 단하우저라는 사람이 스케치한 베토벤의 손가락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바로 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그런 노력을 한 사람이었기에 세계 제1의 악성(樂聖)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이 아닐까.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12월 퀼른 인근의 본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은 어린 나이부터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는 소년 가장이었다. 열한 살에 극장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으며 열세 살에는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열일곱 살에 사랑하던 어머니마저 폐병으로 돌아가시고부터는 두 동생의 교육까지도 떠맡았다.

베토벤은 열아홉 살인 1789년에 본 대학의 청강생이 되었으며 20대 중반부터는 청각장애와 위장병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이 인류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 시절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 하여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활동하고 있던 빈이라는 도시는 음악가들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베토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잃게 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음악 애호가들이 있었다. 1809년에는 빈에서 가장 부유한 세 귀족인 루돌프 대공, 로코비츠 공, 그리고 킨스키 공이 베토벤에게 빈을 떠나지 않겠다는 조건 대신 해마다 4천 플로렌의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사람이란 물질적 근심이 없어야만 전적으로 예술에 헌신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비로소 예술의 영예를 빛내는 숭고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음은 자명한 이치이므로, 본인들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활을 보장하여 그의 천재적 자질의 발휘를 막아버릴지도 모를 야속한 장애를 제거하기로 결의한다.”

30대 중반인 1806, 베토벤은 사랑하는 여인 테레제와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온갖 열정을 다 바쳐 사랑했던 여인은 끝내 베토벤을 버렸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던가 아니면 베토벤에게 재산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베토벤의 만년에 어떤 친구가 그를 찾아가 본즉, 베토벤은 혼자 테레제의 초상에 키스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40대 중반이 되자 그의 귀는 완전히 막혀 버렸다. 1822년의 <피델리오> 공연 후 쉰들러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베토벤은 총 연습 때 자신이 지휘하고 싶어 했다. 1막의 2중창에서부터 그가 도무지 듣지 못한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대로 움직였지만 가수들은 제멋대로 나갔다. 전반적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평상시의 지휘자 움라우프가 잠시 휴식할 것을 제안하였다. 가수들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까보다 더한 혼란이 일어났다. 베토벤이 지휘를 계속할 수 없음은 명백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퇴장하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베토벤은 불안한 마음이 되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는 눈치였다. 실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내가 그의 곁으로 가서 수첩에다가 연주를 계속하지 말게. 이유는 돌아가서 설명하겠네라고 썼다. 그러자 그는 관중석으로 뛰어내리면서...”

 

동생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청각장애에 관한 비통한 마음과 동생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너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따로 살고 있는 나를 용서해 다오. (...)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내 병세를 남들이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하는 무서운 불안에 사로잡힌단다. 지난 여섯 달 동안 내가 시골에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청각을 정양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던 것인데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번 나는 시림들과 사귀고 싶어 하는 내 성미에 못 이겨서 사교모임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옆의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던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랴! 그러한 경험들로 하마터면 나는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 버릴 뻔하였다. 그것을 제지하여 준 것은 오직 예술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이 세상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잊지는 말아다오.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했으니, 나를 잊지는 말아다오.”

- 1802106일 하일리겐수타트에서 르트비히 판 베토벤

 

동생들을 극진히 아꼈던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했던 휴머니스트, 평생을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고생했던 음악가, 임종 시에 모르는 사람이 눈을 감겨주었을 만큼 쓸쓸하게 이 세상을 하직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두고두고 인류의 사랑을 받는다.

그가 천재라는 사실은 5번 교향곡과 엘리제를 위하여를 비교하여 들어보거나, 9번교향곡과 월광소나타를 비교하여 들어보면 누구라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떻게 그다지도 상반된 음악을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고 숲속에 있기를 즐겨했던 사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그의 다음 글귀를 회상한다.

전원에 있으면 내 불행한 청각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거기서는 한 그루의 나무가 나를 향해서 신성하다신성하다라고 말을 건다. 숲속의 환희와 황홀, 누가 감히 이런 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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