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견문록 홍신사상신서 49
마르코 폴로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4월
평점 :
절판


세계여행을 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그것도 우리가 흔하게 갈 수 없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800년 전에 그런 여행을, 그것도 단 몇 달이 아닌 장장 20여 년을 하였다면 어떨까? 여기에게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 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버지 니콜로, 삼촌 마페오와 함께 1271년부터 1275년까지 장장 24 동안이나 중동,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 이란, 인도, 수마트라 등지를 여행하며 기록으로 남긴 마르코 폴로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는 단어가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모진 풍파가 만 길이나 펼쳐져 있다는 뜻이니 그 고생이 오죽이나 심하였을까?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해 보자. 원체 이들의 여정이 복잡하므로 그냥 큰 줄기만 이야기하여야 하겠다.

무역상이었던 아버지 니콜로는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전 보석 무역을 위해 동생인 마페오 폴로와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도중에 원나라의 사신을 만났는데 그의 제안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1년을 여행하면서 동방의 이국적이고 신기한 풍물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원나라에 도착하여 쿠빌라이 황제를 알현하게 된다. 니콜로와 마페오는 쿠빌라이가 서방의 교황에게 파견하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지만 당시 교황이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선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69년 아버지와 삼촌이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오자 마르코는 15년 만에 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새로 선출된 교황이 이들 3명을 만나 쿠빌라이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원나라에 파견한다. 이렇게 하여 1271년 지중해를 건너 터키를 지나 호르무즈해협에 도착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해로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결국 육로를 이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파미르 고원을 경유하여 타림 분지에 이르렀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지나,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쿠빌라이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上都:현 네이멍구자치구의 도시)에 도착하여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그것이 1274년이었으니 길로 3년의 긴 여행이었다.

당시 20세가 채 되지 않은 마르코는 원체 총명하여 원나라의 말과 습관을 금세 익혔으며 그런 마르코를 쿠빌라이는 극진히 총애하였다. 마르코는 원(중국)에 머물며 여러 차례 황제의 특사로 외국에 파견되었다. 마르코는 17년간 원나라에서 머물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쿠빌라이칸에게 청하였지만 그를 총애한 칸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마침 마르코 폴로 일행은 이란의 몽골왕조인 일 한국(汗國)의 왕비가 사망하자 그 나라 왕에게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겨우 원나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행은 이번에는 해로로 자바 ·말레이 ·스리랑카 ·말라바르 등을 경유하여 이란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는데, 또다시 우여곡절 끝에 1295년에야 겨우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런 엄청난 거리를 당시 폭도, 산적, 해적, 풍토병의 위험이 도처에 널려있는 상황에서 20여 년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보아야 하겠다.

우리들이 읽는 이 책도 우여곡절 끝에 마르코 폴로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옆 사람에게 구술한 것을, 원본은 없어지고 여러 사본들(F, FG, VA, P, R, Z본 등이 있다) 중에서 F본을 바탕으로 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에는 수백 가지의 진기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지면상 겨우 다섯 개 정도만 소개하겠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소재한 쿠빌라이 칸의 황금패자(일종의 마패로 46cm x 10cm2kg 무게의 순금)는 어느 곳에서든지 내보이기만 하면 필요한 모든 물품, 장비, 인원, 숙소 등을 제공받을 수 있다. 만약 어기는 족장, 성주, 국왕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티베트의 어느 지방에서는 처녀를 아내로 맞지 않는다. 남자를 전혀 모르는 여자는 신이 잃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처녀의 어머니들은 그들에게 제발 자기의 딸과 동침하여 달라고 사정사정한다.

중국 사천성의 어느 부족은 lq에 손님이 찾아오면 자기 아내를 빌려주고 저기는 계속 외부에 머물러 지낸다. 부인은 손님이 갈 때까지 집 문 앞에 손님의 모자나 옷을 걸어 놓아 손님이 아직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남편은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집에 돌아온다.

수마트라 섬에서는 병자가 죽으면 그 가족들이 죽은 시체를 뼈만 빼놓고 살은 모조리 발라 먹는다. 뼈에 조금이라도 살이 붙어 있으면 벌레들이 파먹게 되는데, 그러면 망자의 넋에 재앙이 닥친다고 믿는다.

인도의 바라문교도들 중 어떤 족속은 완전 나체로 지낸다. 남자건 여자건 그들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원래 알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알몸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팡구(일본)는 손바닥 두께의 황금으로 길이 뒤덮여 있다는 이야기며(이것은 저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바그다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하여 산을 1km나 옮겼다는 이야기, 칸의 궁전에서는 술잔이 이리 저리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신하들에게 술을 전달한다는 등, 믿기 어려운 대목들도 여러 군데 있지만, 1280 ~ 1290년대 세계의 절반이나 되는 지역의 풍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진기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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