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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죽고싶은 나 2
케르스틴 기어 지음, 전은경 옮김 / 책들의도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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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서른은 온다"는 구절이 생각나는 소설이다. 되짚어 보면 나 역시 "서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거 같다. 하지만 서른은 짐작과는 다른 나이다. 서른 즈음의 불안은 사실 서른 문턱에 들어서는 나라는 주체가 겪어온 인생의 황망함을 총천연색으로 직시하는 것에 다름 아닌 터. 서른이라고 다른 것도, 마흔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다. 고비고비마다 꺾어질 때마다 다른 시야를 갖게 되는 행운의 정조라고 봐도 무방할 터. 그래,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나이. ... 일찍 결혼한 탓에 난 서른 즈음 3살짜리 아이의 철없는 엄마였다. 결혼하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주인공와 다르지만 그 나이에 느끼는 허허로운 감정은 매일반인 듯. 시작은 했으되 별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 4년이 지나도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결혼생활, 그 와중에 왜 그리도 "나"에 대한 집착은 끊어버리지 못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주위 사람들을 참 어렵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뭐 보통의 삶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이 유쾌한 소설은 특별히 공감을 자아내는 구석이 많다. 내가 주목한 것은 가족관계. 게르다의 엄마나 아빠는 짐짓 속물처럼 보이지만-사실 우린 다 속물이다-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 않다. 우리 친정부모님이 아직도 나를 보면 "너는 교수가 되었어야 하는데, 끌끌..." 하시는 것과 하나 다르지 않다. 부모님에게 자식은 늘 특별하고 뛰어나고 영특한 존재니까. 그런데 자식의 입장은 좀 다르다. 처음엔 "죄송"하다가 좀 있으면 "뻔뻔"하다가 결국엔 "나도 엄마 맘 알겠어"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자식도 부모가 되니까. 게르다의 아버지가 "네가 안 쓴  학비"라며 게르다의 통장을 채워주는 대목에서 코끝이 시큰했다. 부모란 그런 거지 뭐...작중 인물 중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사람은 훌다 이모할머니다. 그녀는 "네가 사랑하는 걸 얻도록 노력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얻은 걸 사랑하도록 강요받게 될 테니까..."라고 게르다에게 충고한다. 참 멋진 말이다.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된 말은 아닐 터. 매사에 내가 얻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바를 위해 전력질주하는 것, 그 과정에소 실패를 맛보거나 좌절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의 그림자 가까이라도 갈 수 있었으니...행복하지 않을까...넘어졌다 일어나고 한없이 약한 나에게 여지를 남겨주고 때로는 나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을 준비하고 아름다운 가족과 친구들을 두는 것, 그게 진짜 인생이다. 그런 할머니가 되어야겠다... 사족을 달자면, 나도 게르다처럼 불편한 진실을 담은 편지를 보낼 사람이 제법 된다는 사실에 흐뭇. 나도 한 번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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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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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주, 내 눈을 번쩍 뜨게 해 준 기사 하나,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건가?", 상당히 실존적인 질문이다. 역으로 생각하자.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정말 내소관 밖일까? 나는 내 안의 친숙한 것들, 경험에 의해 알게 된 세계에만 존재하고 나머지 세계 안에서는 부유하는 존재일까? 내가 경험한 것들만 이해하고 알고 느끼면서 마감하는 생은, 단지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경험밖의 것들을 돌아본 적이 없었던가? 가지 못한 길, 겪어보지 못한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삶에의 열정, 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치명적 사랑, 혹은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나...를 훔쳐보고 열망한 적은 없었던가? ...물론 있다. 아주 종종, 많이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냥" 현실을 떠나지 못한다. 핑계는 많다. 가족이 있고(그레고리우스는 이혼남이다), 직장도 있다(그레고리우스에게도 직장은 있다), 통장에 잔고가 별로 없다(그는 많다), 웬지 죄책감이 든다(나만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갑자기 떠난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 향방을 가늠할 수 없는 삶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자동차를 운전해 가는 길 위에서, 낙엽 깔린 산책로에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고 사는 것, 사실 그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소설 속의 행복한 남자 그레고리우스(일탈 감행의 용기가 있으니까)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열린 길을 따라 나선다. 어쩌면 그 역시 살아오는 동안 여러 번 '새로운 길'에 눈길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대개 그러하듯, 지나치거나 외면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그러한 길이 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먼저 '갈망'이 있어야 하고,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잠재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 이 작품은 액자소설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책 속 책의 작가 프라두에 의해 통째 흔들린다. 프라두는 풍요롭고 진지하며 사뭇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유의 세계로 그레고리우스를 안내한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길을 따라 짧은 여행길 속에서 길고 영원한, 결코 "자기가 선택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던" 인생이라는 여정의 흔적을 되밟는다...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도 모룬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들 들었다. 난 흥분했다...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절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영원히 멈추어버리지 않기를, 절대 그런 일은 없기를..."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깊은 가을, 감춰진 열망과 억누르고 지냈던 "다른 삶에 대한 희구", 그리고 "Muss Sein"과 "Kann Sein" 사이의 차이를 짚어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데 용기백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거 정말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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