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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1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주, 내 눈을 번쩍 뜨게 해 준 기사 하나,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건가?", 상당히 실존적인 질문이다. 역으로 생각하자.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정말 내소관 밖일까? 나는 내 안의 친숙한 것들, 경험에 의해 알게 된 세계에만 존재하고 나머지 세계 안에서는 부유하는 존재일까? 내가 경험한 것들만 이해하고 알고 느끼면서 마감하는 생은, 단지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경험밖의 것들을 돌아본 적이 없었던가? 가지 못한 길, 겪어보지 못한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삶에의 열정, 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치명적 사랑, 혹은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나...를 훔쳐보고 열망한 적은 없었던가? ...물론 있다. 아주 종종, 많이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냥" 현실을 떠나지 못한다. 핑계는 많다. 가족이 있고(그레고리우스는 이혼남이다), 직장도 있다(그레고리우스에게도 직장은 있다), 통장에 잔고가 별로 없다(그는 많다), 웬지 죄책감이 든다(나만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갑자기 떠난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 향방을 가늠할 수 없는 삶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자동차를 운전해 가는 길 위에서, 낙엽 깔린 산책로에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고 사는 것, 사실 그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소설 속의 행복한 남자 그레고리우스(일탈 감행의 용기가 있으니까)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열린 길을 따라 나선다. 어쩌면 그 역시 살아오는 동안 여러 번 '새로운 길'에 눈길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대개 그러하듯, 지나치거나 외면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그러한 길이 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먼저 '갈망'이 있어야 하고,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잠재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 이 작품은 액자소설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책 속 책의 작가 프라두에 의해 통째 흔들린다. 프라두는 풍요롭고 진지하며 사뭇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유의 세계로 그레고리우스를 안내한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길을 따라 짧은 여행길 속에서 길고 영원한, 결코 "자기가 선택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던" 인생이라는 여정의 흔적을 되밟는다...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도 모룬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들 들었다. 난 흥분했다...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절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영원히 멈추어버리지 않기를, 절대 그런 일은 없기를..."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깊은 가을, 감춰진 열망과 억누르고 지냈던 "다른 삶에 대한 희구", 그리고 "Muss Sein"과 "Kann Sein" 사이의 차이를 짚어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데 용기백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거 정말 위험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