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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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면 참 쉽다. 선과 악,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라면 얼마나 모든 것이 명료할까? 하지만 밝음과 어둠, 그 두 가지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이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그러데이션을 배워가는 게 삶이 아닐까 싶다.


아주 명료하게 분리가 가능한 세상은 있긴 하다. 이진법의 세계. 컴퓨터의 세계는 모든 것이 1 또는 0이다. 0과 1로 이 많은 것을 해내는 그 세계가 놀랍다. 하지만 그 컴퓨터로 만들어진 세상이 이진법일까? 이상하게도 아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잣대가 필요하다.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잣대가 있어야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도덕, 윤리, 종교, 법 등 다양한 장치들이 그 잣대가 되어 지탱한다.


세상이 변하고 기술이 진보하면서 그 잣대들이 옮겨져야 할 때가 있다. 여태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고통스럽다. 변화를 싫어하는 뇌 입장에서도, 여태까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이유로 변화는 어렵다. 한 인간이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범위의 스팩트럼은 넓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뉴스 등을 통해 알게 되는 사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쉬워도 정작 내 일이 되면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작가들은 그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불편함을 조금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게 끔 만들어준다. 가상의 이야기로 현실을 비춰보고 깨달음을 준다. 문학의 힘에 대해 (소설을 가끔 읽어서...) 가끔 놀란다.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저, 자음과 모음, 2021)


이 책이 말하는 주제에 대해 처음엔 알지 못했다. '당신'이라 부르며 존댓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의사다. 주인공은 선배의 초대로 낙태법에 대해 반대하는 모임에서 칼럼을 쓰게 된다.

"언니가 오랜만에 연락해 온 이유는 낙태죄 헌법소원을 계기로 재생산권 이슈가 뜨거워지자 저명한 진보 시사지에서 언니에게 필진을 모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어요. (p.33)"


그러던 와중 동생은 갑자기 혼전 임신을 한다.


"당신을 알게 된 것은 작년 11월이 어느 일요일로, 그 성탄절 새벽으로부터 몇 해가 지나서였어요. (p.32)"

"어쩜 좋냐? 해수 임신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맥이 풀린 나는 큰 소리로 웃어버렸지요. 처음부터 당신의 존재는 그러했습니다. 내게 웃음부터 나오게 만들었지요. (p.38)"


동생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주인공의 엄마는 주인공에게 동생에게 준비가 된 다음에 아이를 갖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전하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낙태법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지우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고 한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에 있거나, 범죄 등으로 인해 임신한 사람들에게는 아이와 여성의 삶을 위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낙태 관련 약(미페프리스톤은 WHO에서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약물적 임신중지법의 주요 약제 p.32)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낙태를 찬성하고 소파 수술도 진행했지만 정작 자신의 소파 수술 시에는 죄책감을 느꼈던 의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추상적인 논리로 이야기하면 둘 다 맞다. 반대에는 반대할 이유가 찬성에는 찬성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저 서로 간의 다른 의견을 논의하는 자리라면 모를까? 이 문제가 법이 되면 좀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한쪽을 택하면 다른 한쪽이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면을 감싸안는 그런 완벽한 법은 없기에 불법이 되는 쪽은 항상 억울한 일이 생긴다.

주인공은 서성이고, 고민한다.


"희진 언니의 말처럼 우리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지가 있음을 해수도 알아야 하지 않나.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거리의 무례한 전도자들과 다를 게 무언지 물어야 했고 그럼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동생이라면 몰라서 질주하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수와 당신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만에 하나 그 말이 실수로라도 입 밖에 나온다면 그로 인해 나의 동생과, 다름 아닌 바로 당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는 않을지, 만약 그리된다면 어찌해야 할지

그때의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p.49)"


그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대부분 비슷하게 고민하지 않을까? 타인의 일이라면, 가족의 일이라면, 내 일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가부터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 꼬물거리는 손으로 당신이 내 손가락을 잡자마자 나는 당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는 또한,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중략)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

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p.70)"


책의 소개에 나온 "가장 동시대적인 윤리를 서성이며 구축하는 질문들"이란 글귀가 깊이 공감된다. 윤리 주변을 서성이며 계속 질문한다.


나 또한 안타깝게도 답을 낼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

답을 명확하게 낼 수 있는 그런 '다른 세계'가 궁금하다.

이런 고민이 없는 '다른 세계'가 궁금하다.

그런 다른 세계에서는 좀 더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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