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 : 숲 Dear 그림책
조원희 지음 / 사계절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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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생태로 다시 살아나는 자연을 기대한다.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숲속에 살고 있다. 이 그림책의 화자는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가 굉장히 크고 무섭게 생겼다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이 쓰인 그림책의 페이지에서 고개를 갸우뚱했어야 했다. 무섭다는 표현에 공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육 아저씨는 다소 험악해 보이지만 익살스러움이 뚱보 아줌마는 둔해 보이면서 상처를 가진 이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검은 색의 긴 머리카락과 거대하고 완만하게 둥근 몸의 뚱보 아줌마에게 제 안에 숨겨버린 어떤 욕구가 있는 듯해서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왜 숲에 사는 걸까? 뚱보 아줌마는 원래부터 개미들을 밟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뒤뚱뒤뚱 걸었을까?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철저하게 이익에 우선한 현실에서의 삶을 감당하지 못 하고, 혹은 버리고 숲속으로 간 것은 아닐까? 작은 것들을 위할 줄 아는 뚱보 아줌마를 지켜줄 수 있는 근육 아저씨가 있어 아 참 다행이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근육 아저씨는 뚱보 아줌마를 만나 여리고 여린 것들을 보살필 수 있는 마음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한하운의 <전라도 길>이라는 시에는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라는 시구가 있다. 황톳길은 건강을 상징하지만 그 이면엔 피의 땅이라는 역사적 속사정이 있기도 하다. 전라도 길에 깃든 황톳길의 붉은색의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의 붉은 피부와 중첩 되었다. 아픔이 깃든 건강한 땅의 이미지를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에서 만난 것이다.

 

울퉁불퉁한 근육 아저씨의 몸과 풍만하고 동근 한 뚱보 아줌마의 몸은 변화무쌍하지만 늘 세상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자연으로 은유되기에 충분했다. 다친 새를 치료해주는 아저씨와 개미들의 행렬을 방해하지 않은 아줌마 그리고 이런 보살핌 덕에 다시 또 새와 개미의 보호와 배려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삶이 상호 순환되는 자연의 이치처럼 느껴졌던 것.

 

둘은 굉장히 크게 무섭게 생겼지.

자연은 굉장히 크고 무섭지

크고 무섭게 생겼다 해서 해로운 것은 아니지, 다 우리들의 편견이지.

그렇지.

 

뚱보 아줌마가 나팔을 불며 나타난다.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다.

길을 가던 개미들이 뚱보 아줌마를 비켜 양 갈래로 갈라진다.

개미들을 밟지 않기 위해 뒤뚱뒤뚱 걸어가던 뚱보아줌마를 위한 배려다.

뚱보 아줌마는 이제 멈추지 않고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쩐지 침울해보였던 뚱보 아줌마가 마지막에 나팔을 불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는 장면은, 숲속에서 아이스런 생명력을 얻어 한층 건강해질 것을 암시하는 듯 즐겁기까지 하다. , 다행이야, 라는 안도의 숨을 쉰다. 우리의 아프고 침울한 자연이 건강하고, 유연하게 다시 되살아나는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 그림책이 크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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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 개정판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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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탕자들

한 낮의 시선, 이승우, 2021

 

이를테면 이방인은 자주 오래 멈춰 서 있는 자이다.

- 한 낮의 시선, p87

자주 오래 멈춰 서 있는소설 속 이방인’ ‘모퉁이를 돌면 불쑥 마주칠 것 같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알 수 없는, 모르는 존재에 대한 공포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언제든 일어날 것 같은 기약할 수 없는 자기 암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와 같다. 어느 날 결핵 진단을 받고 요양 간 천내에서 노교수의 방문을 받은 나는 그와 대화를 하던 중 없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테면 아버지는 왕성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한낮과도 같으며, 나는 한낮의 시선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천내에서 느꼈던 자연의 안락함에 기대어 요양을 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나는 천내를 떠나 휴전선에 가까운 인구 3만의 도시로 가며 나는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내게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휴전선에 가까운 인구 3만의 도시에 살기 위해서 가는 것일까, 죽기 위해서 가는 것일까.

 

영화농장의 공동대표이자 기초단체장 후보 기호 2번의 연설이 있던 날, 나는 기호 2에게 한명제예요. 내가, 한길숙이 아들. 생각나세요? 한길숙?”이라고 외치지만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듯하다. 냉담하기까지 하다. 나와 어머니의 이름을 밝히며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나는 좌절한다. 또 나는 경쟁 후보의 덫에 걸려 기호2번의 도덕적 결합을 문제 삼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어느 날 영화농장 주변을 배회하던 나는 기호2번과 마주치게 되고 기호 2번은 타이밍이 좋지 않을 때 찾아왔다는 말을 나에게 남기고 딸과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달려간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객혈한다. 그리고 기호2번의 명령을 수행하는 수하들에게 감금당한다. 영화농장, 창문이 다 가려진 어느 외딴 집에. 그곳에서 나는 존재에 부정당한 절망감을 피를 토하듯 웅크려 글로 드러낸다. 게걸스럽게 글을 써 내려간다. 그리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상태에서 아버지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아버지는 죽었는가. 아니다. 아버지는 전보다 아주 강한 존재로 나의 내부에 살게 된다. 모퉁이를 돌면 부딪칠 것 같은 알 수 없는 존재는 낮에는 햇빛 아래서 밤에는 가로등불이 비추는 빛 아래서 환하디 환한 영화농장에 살고 있는 그분이었다. 나는 그분의 시선에 갇혀 쓰는 자가 된 것이다. 탕자가 된다, 오직 한 사람만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승우의 소설에서 그분은 내가 애써 찾는 존재 혈육의 아버지에만 한정되지 않은 듯하다.

한낮의 시선은 전능하다고 익히 알려진 신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신은 기호 2번처럼 냉담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을 드러낸다.

 

한 낮의 시선에는 허술한 존재들이 의 이야기에 가지처럼 매달려 있다. 태양의 아들, 통신사 직원, 탈영병, 김중사, 오르한 파묵의 소설 속 인물. 그들은 모두 누구’ ‘무엇을 기다린다. 그리고 누구’ ‘무엇이 그들에게 웬만해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말한다. 그러면 안 되는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올 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면 안 되는가, 라는 그들의 하염없는 말이 덧없고, 집착 같아서 무서우면서도 일면 수긍이 간다. 그러면 안 되는가. 나와 그들과 우리는 시선에 머물며 시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인식하기 시작한 것들은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언제든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없지만 있는 것들의 존재는 거부하면서 기다리는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들이 기다리는 이들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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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있잖아 시모카와라 유미 아기 동물 그림책 1
시모카와라 유미 지음, 이하나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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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모카와라 유미 <<있잖아 있잖아>>


책장을 넘기기 전, 일부러 오래 책표지를 바라본다. 표지의 그림에서 눈을 찡긋 감은 노란 병아리가 생쥐의 귀에 대고 쫑쫑쫑, 삐약삐약, 무슨 말인가를 아주 많이 빠르게 쏟아내고 있다. 병아리가 살짝 당돌해 보이기도 한다. 두 손을 모은 생쥐는 병아리 쪽으로 귀를 쫑긋,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생쥐에게서 기대감이 감돈다. 풀밭 위에 선 병아리와 생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호기심으로 표지를 넘긴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병아리색의 속지를 빠르게 넘긴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가 궁금해서다.

! 살짝 당돌해보였던 병아리가 고개를 외로 틀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바라본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 그림 아래로 병아리가 말했어요.”란 문장이 적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은 표지에서 봤던 병아리와 생쥐의 모습이다. “삐약 삐약 있잖아 생쥐가 제일 좋아.” ~! <<있잖아 있잖아>>의 표지그림은 병아리가 생쥐에게 고백하는 것이었구나. 그러니까 병아리가 골똘히 바라봤던 것은 생쥐였고, 생쥐에게 고백하기 전 병아리는 부끄럼쟁이였으나 고백할 때는 눈을 질끈 감고 제일 좋아.”라고 빠르고도 기쁘게 노래하듯이 삐약삐약 말하고 있는 것이었구나. 절로 푸릇푸릇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고백하는 마음의 과정이 단 두 장의 그림으로 명료하게 전달된다. 단순하고, 명료하며 시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림책 한 장을 더 넘긴다. 고백을 들은 생쥐가 잔뜩 차오른 기쁨으로 펄쩍 뛰며 즐거워하고 있다. 생쥐의 기쁨이 곧 나에게 옮겨온다. 나도 활짝 웃는다. 어쩜, 아구구구, 설레라. 저리 좋을까. 생쥐의 기쁨은 독자의 기쁨. 한 장을 더 넘기니 생쥐가 오리에게 네가 좋아.”라고 말한다. 이 페이지를 보는 순간, ! 하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생쥐가 병아리에게 나도 네가 좋아.”라고 말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오리는 토끼에게 토끼는 닭에게 있잖아, ……, 제일 좋아.”라고 말한다.(고백한다, 읆조린다.) “네가 좋아.”라는 고백을 들은 동물들(오리, 토끼)는 온 몸으로 기쁨을 활짝 드러낸다. 사랑은 마음을 타고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당사자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아쉬움은 최은영선생님이 강의 중에 했던 말이 떠올라 달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받은 사랑의 힘으로 호기심과 함께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받은 사랑을 되돌려 받으려는 것은 어쩌면 성숙하지 못한 어른의 속성. 아이들은 좋으면 그만!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 엄마로써 심히 공감이 가는 한 장면! 토끼의 고백을 들은 닭은 자신의 아이 병아리에게 꼬꼬댁 꼬옥 제일 좋아.”라고 말하며 꼭 껴안는다. 병아리는 다시 생쥐에게 가 네가 좋아라고 말하겠지만……. 엄마에게서 받은 병아리의 사랑은 그들이 사는 어느 곳으로든 쏙쏙 퍼질 듯하다. 사랑의 바이러스가 원래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

네가 좋아, 라는 말 참 좋은 말. 이 참 좋은 말로 온 몸이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경이. 새삼 짧은 그램책 한 권으로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아주 오래전의 시간, ‘나의 아이였던 시간을 소환하여 이곳에 가져다놓는다. 나는 병아리에게서, 생쥐에게서, 오리에게서, 토끼에게서 있잖아, 있잖아, 네가 좋아.”라고 이미 고백을 받았던 터. 나는 이제아이에게 혹은 누구, 누구, 누구에게 있잖아, 있잖아, 네가 좋아라고 수줍지만 빠르게 말하고 줄행랑칠 준비를 한다. 이 말을 하고 나는 기뻐질 것이다. 아이의 웃는 모습이 그려진다. 누구, 누구, 누구의 어색한 듯한 웃음과 그들의 몸에 피어나는 기쁨의 꽃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림책 서평을 해보겠다고 다짐한 것은 그림책과 친해지고 싶어서다. 아이에게 오랫동안 책을 읽어줬지만 정작 그림책이 가진 힘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의무적으로 읽어주는 날이 더 많았다. 아이가 커서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도 책을 읽어주긴 했으나, 애정을 듬뿍 담아 책을 읽어주지는 못했다. 어쩐지 그림책들에 공감할 수 없는 마음이 더 많았다.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줄글을 읽어줄 때는 더 흥이 났었다. 아귀가 맞는 논리적인 글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 나이의 사람이이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다소 엉뚱하고, 이야기의 얼개가 맞지 않은(개연성 없는) 그림책을 못 읽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참 웃긴 게 그림책을 졸업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 시기에 아이에게 줄글을 읽어주면서, 이제껏 봤던 그림책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책의 내용이나 그림들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런 아른거림이 아니라, 그림책이 가지고 있는 여유 같은 것. 많지 않은 글자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선명한 그림들(혹은 형체들) 그리고 남은 종이의 흰 부분. 이러한 것들이 여유를 동반한 여백으로 아른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림책들을 펼치게 되었고, 그제야 그림과 글들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림책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참 오래 걸려 얻은 듯하다. 그림책을 졸업하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다시 또 많이 큰 아이에게 천천히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 내 마음의 변화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처음 본, 낯선 이의 그림책, 이제 갓 나온 그림책을 한번 읽어보며 그림책이 전해줄 수 있는 힘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었다. 그림책을 읽는 마음은 아이의 마음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이며, 그들의 언어를 터득하는 일이며 마음과 언어를 터득해 어른인 우리의 세계에서 더 귀한 덕목으로 살아날 수 있는 가치인 듯하다. 가치였으면 한다. 가치여야 한다.

 

<<이 책은 미디어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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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맑음 -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3
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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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해야 할 환각

 

19895, 4차선 도로를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꽃잎처럼 금난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로 시작하는 민중가요를 부르며 법원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간 지 얼마 안 된 열세 살 아이가 본 그 광경은 낯선 것이었지만, 마음을 잡아채는 무엇이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저 인도에 서서 팔을 휘두르며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그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 몰랐다.

당시 법원 앞은 밤낮으로 전경들이 서서 보초를 섰는데 그 광경도 낯설고 이상한 것이었다. 엄숙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전경들이었지만 그들 앞을 지나는 누구도 엄숙하거나 경직되지는 않았다. 늘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일상이 되었던 것이리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늘 전경들 앞을 지나야했는데, 어떤 날은 가방에 있는 간식거리를 그들 중 누군가에게 주기도 했다. 여름 밤에는 법원 광장에 와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후 내가 본 그날의 광경이 19805월 이후 광주에서 해마다 열리는 집회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여 예술철학 시간에 전태일과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영화 꽃잎을 알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닌 덕에 518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도, 이야기할 사람도 많았다. 눈치 보지 않고 기꺼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D시에 살고 있는 지금, 예전만큼 자유롭지 못 하다. 내 스스로 편을 나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아니다. 좀 더 솔직해져야한다. 나는 광주의 518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알지만, 지역이나 색깔을 덧씌워 말하는 그들에 대적할 만한 앎이 없다. ~척 할 수는 있겠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때문에 나는 518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한번쯤은 518에 대해 말하는 연습을 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198051810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을 진압하는 과정 중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광주 시내로 들어가 시위대는 물론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원을 향해 박달나무로 특수제작된 곤봉으로 구타하고, 총에 꽂힌 대검으로 찔러댔다. 부대원과 마주친 모든 이들은 그 자리에서 죽어도 되는 =물건이었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길고 긴 겨울 공화국이 끝나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시민들은 신군부의 폭력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신군부는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여 뻗어나가려는 항쟁의 불씨를 깨끗하게 꺼트릴 작정이었다. 날씨 맑았던 518일 일요일이 지나고 광주에도 월요일이 찾아왔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겪은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도 금난로에 모여 들었고, 신군부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공수 부대의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공격이 되풀이되었다. 시민들은 두려워했으나 두려움을 집어 삼킨 강렬한 생존본능으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신군부와 대립하게 된다.

 

기자로서는 이 같은 행위를 적절히 표현 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등의 단어는 너무 밋밋해서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 당시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의 말

 

1980년 광주의 518을 요약하는 일은 여기서 멈춰도 될 것 같다. 18일부터 시작된 열흘 간의 항쟁을 여기에 다 담을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 군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저는 그 사람들이 다른 나라 군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군인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으니까요.”

 

19805월 당시 열세 살 아이가 본 그날의 풍경이다. 201952살이 된 그는 지금쯤 군인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에게 51839년이 지난 과거가 아닐 듯 하다. 아마도 늘 반복되는 현재가 아닐까? 시민들을 지켜야 할 군인들의 공격, 그 뒤 전두환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순명료한 518이지 않을까. 전두환은 종신권력을 꿈꾸다 감옥 밖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 그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그의 감옥 밖 옥중 생활은 자명한 것이다.

518을 비롯, 권력의 무력에 죽어갔던 아픈 사람들의 변호는 늘 지속되어야 한다. 무고한 시민을 총과 칼로 죽였고, 죄의식도 없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세상을 하대하는 대단한 속성은 권력 가진 자들의 이면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주 망각한다. 우리 민중이 지나온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규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덧없는 환상 속에 살게 될 것이다. 망각과 무너짐이 일상인 하찮은 사람으로서, 두렵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허상이 된다. 권력자들은 민중의 기억이 허상이 되는 것을 시시때때로 노리고 있다. 지난 역사의 잘잘못을 따져 물어야하는 이유다.

나의 518은 감상적인 데가 있다. 군중이 부르는 노래에 가슴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던 나는 지금도 거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민중가요에 걸음을 멈추고 눈시울을 붉힌다. 자동반사다. 그 사람을 자극하는 음악모드가 분명히 있기 마련인데, 나는 굵직하고 웅장한 느낌의 음악에 더 감동하는 듯하다. 518보다 노래를 먼저 알아버려서 분노하지 못 하고 감동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나에게는 늘 있었다. 바란다, 나와 같은 사람들 노래와 문학과, 영화로 역사를 접한 그들이 감동의 시간이 지나면 한 번 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 그것에 대해 알고 분노했음 한다. 그 분노가 오래오래 각인되길 바란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 했다. 승리는 늘 작고 보잘 것 없는 힘없는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다시 또, 나는 노래가 불러오는 환각을 극복하고, 역사를 바로 볼 필요를 느낀다.

 

영화 꽃잎의 장면,

거리에서 총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난 소녀는 모르는 이의 무덤 앞에 앉아 있다.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은 눈으로 몸을 좌우로 흔들며 방언을 뱉어내는 소녀는 미쳤다. 소녀는 무덤 앞에서 어머니와의 접신을 꿈꾸고 있는 듯 하다.

그날의 일을 접한 사람들은 다들 미치지 않고 살 수 없었다고 말한다. 가슴에 불이 솟구친다. 역사적 대의 이전에 개인의 상처인 것들을 모략하여 색깔을 뒤집어씌우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먼저 앞선다.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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