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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 –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 빅터 E. 프랑클 / 옮김 – 정순희
신경과의사인
빅터 프랑클이 2차대전 당시 본인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풀어낸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가 직접 경험한 강제수용소에서의 이야기와 그가 창시한
이론인 로고테라피에 대한 요약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책의 2부가
빅터 프랑클이 창시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는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의 기본적인 개념을 요약하고 있다면 1부는 그가 겪은 수용소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로고테라피에 대한 실존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였던 빅터 프랑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이후 마지막 몇 주일을 제외하고는 정신과 의사나 의사로 고용되지 않고 평범한 죄수로 노역을 하며 수감생활을 했다. 여기서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일반적인 책들과의 차별성이 생기게 되는데,
그는 단순히 자신의 수감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과, 주위 죄수들의
정신상태에 대해 정신의학적 해석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수용소 생활에 대한 죄수들의 3단계의
정신적 반응에 의거해 설명한다. 3단계의 정신적 반응은 수감 직후의 시기, 틀에 박힌 수용소에 잘 적응하게 된 시기, 그리고 구출되고 해방된
직후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징후는 충격이다.
작가는 이 징후를 자신이 수감되던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작가는 당시 가지고 있던
필생의 작품이었던 자신의 원고를 빼앗기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말살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 중 몇몇이 가지고 있던 모든 환상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작가는 살기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살기 위한 노력을 위한 동기부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를 ‘자신에게 남아있는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표현하는데 수용소에서 그가 보고 경험한 노력들에는 가까이서 자신을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종교에 의지하는 것, 농담을 하는 것, 나무와 황혼 같이 마음을 치유해주는 자연을 바라보는 것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노력이 순간적인 위안밖에는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책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말이자 로고테라피의 핵심은 마지막 몇 주일간 정신과 의사로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만이 남겨진 상황의 죄수들이 외형적 운명을 초월하여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강제수용소의 동료들을 대상으로 했던 집단 치료를 통해 드러난다.
로고테라피는
의미중심이 정신 분석으로 보다 미래에, 환자가 앞날에 충족시켜야 할 의미에 초점을 둔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에서 logos는 의미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로고테라피가 인간 실존의 의미, 그러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 중점을 둠을 보여준다. 로고테라피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책에서 빅터 프랑클은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그날그날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고, 추상적 의미보다는 한 사람이 그 삶에서 실현해야 할 구체적 과제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과제는 그것을 수행하는 저마다의 특별한 삶만큼이나 독특하고
유일하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이 책이 자신이 매일매일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려준
책이라고 했다. 당시에 나는 이전에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고, 내가
이제껏 아무 의심도, 의문도 없이 믿어온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 나의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
빠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혹은 실마리라도-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선택했고, 읽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친구에게 보여줬을 때 친구가 읽었던 책보다 오래된 책이라는 것이 살짝 불안했지만, 별다른
여지가 없어서 그냥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 읽던대로 가볍게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말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처음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내 고민에 대한 실마리는 커녕 이 책으로 서평을 쓰고
발표를 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저자가 하고픈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천천히 책을 다시
읽었을 때에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야 할 이유, 삶의 의미를 추상적인 것에 두지 말라고 한다. 그는 앞날에 성취해야 할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내 고민에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3이
되기 전까지 나는 믿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험을 계기로
여러 이유로 인해 이제까지 미뤄두었던 믿음에 대한 회의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각 없이 그냥
믿는 것을 믿으며 사는 삶은 정말 쉬웠고 별로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사는 존재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라는
문장 하나로 내가 어떤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이유와 의미가 모두 설명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 한대로-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앞날에 성취해야 할 일의
의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였고, 나의 삶의 의미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미뤄두었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이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라는 편리한 의미부여는 더 이상 가져다
쓸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질문, 나의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를 주저했던 큰 이유 중 하나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내가 빅터 프랑클의 이야기가 나의 고민에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했던 이유는 그가
앞날에 무언가를 성취해야 할 이유는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앞날에 무언가를 성취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면 앞날에 성취해야 할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저자의 조언은 큰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에 깊이 믿는 바가 없이 인생의
이유에 대해 회의에 빠진 사람에게는 이 조언이 도움이 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신-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른 번역가에
의해 번역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