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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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책
많이 기다렸다. 꽤 오래 전에 어떤 인문서를 읽다가 각주에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가 인용된 것을 보고 국내에 혹시 번역되었나하고 도서관을 뒤졌다. 발견한 책은 슈퇴릭(!)히의 <세계 철학사>, 상하권이었다.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순간, 난감했다. 한자에다가 고문에서 볼 수 있는 어투로 점철되어 있어 독서 의욕이 꺾이고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찾던 인용 부분만 겨우 읽고는 아쉬움만 간직한 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신문 서평을 보고 새롭게 번역된 사실을 알았다.
내게는 <세계 철학사>라는 타이틀은 처음부터 관심 밖이었다. ‘세계’라는 말과 ‘철학사’라는 말에 왠지 거부감이 들었고 오히려 이런 부류의 책일수록 반감이 들었다. 굳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크고 넓은 것은 허점이 많기 마련이다. 게다가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철학을 아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는 방대한 철학사 책을 읽으면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 제대로 독파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학과 역사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소감으로는 적어도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과 이론적 배경 그리고 철학자의 삶은 독서의 장애 요인이 아니라 독서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칸트의 칼같은(!) 생활 모습에서 지독하리만치 근엄한 의무론적 윤리의 윤곽이 그려지고, 쇼펜하우어의 어머니와의 갈등에서 여성 멸시(?)의 원인이 드러난다. 아니 이런 어머니와의 갈등도 원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겠구나는 추측도 가능하다.   

번역
무엇보다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번역이다. 니체의 경우 ‘Uebermensch’를 어떻게 번역하느냐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이 책에서는 관례적인 ‘초인’ 대신 ‘극복인’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충분히 공감이 간다. 흔히 ‘오성’이라고 번역하는 독일어 'Verstand’도 이 책에서는 지성이라는 말로 쉽게 옮겨져 있다. 김남두 교수는 오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깨달을 오라는 한자를 모를 경우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지성이나 이해능력, 계산능력으로 옮기’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인명 표기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이 책을 계기로 번역 용어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되어 국적 불명, 정체 불명의 용어가 순화되어 용어에서부터 철학공부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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