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 시인선 46
최승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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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승호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소모임을 통해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과서의 시가 전부였고, 특별히 시집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나였다. 그런 나에게 그의 시는 전율을 불러 올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런 느낌 때문이었는지 방학 중 그의 첫 시집을 읽어보았고 그가 이 시대에 대한 나름의 시적 탐구를 지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승호의 두번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1985)은 그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가 보여준 삶과 사물에 대한 깊은 관찰과 이를 통해 삶의 충동이 억압받는 현실을 드러내려는 모습이, 이번에는 현대사회의 삶의 이면에 있는 부정성을 형상화하는데 이른다. 눈뭉치의 둔중함에서 가시의 날카로움으로의 변화다.

'짓밟힌 뼈'에서는 80년대에서 지금에 이르는 억압의 상황이 표현된다. 잘못된 권위와 물질의 노예가 된 종교, 돈이 우상화되는 현상. 이것은 인간이 건강한 삶의 진정함을 상싱하고 왜곡되는 비극적 상황이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칭얼거리는 세계,찌그러진 삶이 이를 말한다면, 비통한 가죽자루를 찟듯 억압의 고리를 벗는 날은 불행하게도 죽음 밖에 없다. '자동판매기'라는 시는 이 문명의 산물을 매개로 현대사회가 지닌 타락상을 사실성 있게 그려낸다. 돈만 넣으면 작동하는 자동판매기. 우리가 믿고 있던 인간적 가치가 한낱 돈으로 치환되어버리는 현대문명의 기만성이 자동판매기라는 현대문명의 상징물을 통해 드러난다.

돈으로 환전된 性의 聖스러움, 종교의 신성함. 우리가 얻는 것은 왜곡된 쾌락과 구원 뿐이다. 삶은 쳇바퀴 마냥 돌아간다. 반복되는 일상, 그 속에서 사람들은 맡겨진 의무를 다하며 살고 있다. 여름의 도시처럼 인간들이 무기력한 존재로 내몰아 넣어지는 빌딩의 안. 네모는 일상을 넘어서 현대인들의 삶의 공간인 도시를 나타낸다. 사실 네모를 이해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만이 아니다. 우리가 '던져진 주사위' 같은 존재라는 것은 이미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굴비를 두려운 존재로 말하는, 시인의 의도는 언어놀이에 의해 뒤바뀌는 '비굴'에 있다. 굴비의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굴함. 주사위 같은 인간의 모습을 바로 이 굴비로 말한다. 굴비로 구체화된 우리의 자화상. 시인은 굴비에서 현대인의 무력한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삶의 음울함과 불안감은 현대 사회가 빚어낸 그늘진 모습이다. 이 시집에서 자주 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는 그것과 결합해 운명적 비극을 더욱 고조시킨다. 최승호 자신이 지속적으로 탐구했던 자동화된 일상에서 느껴지는 삶의 진부함과 음울함.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도달할 수밖에 없는 죽음. 우리의 삶은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실을 재확인시켜준다.

최승호의 시는 딱딱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을 지닌다. 그것은 시대적인 진실에서 머물지 않고 보편적 삶의 진실로 확장된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같은 운명적 비극과 타락한 현대사회가 만든 그늘진 길을 가는 여정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늘보다 어질게 느껴진다는 시인이다.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변하지 않는 인간적 믿음이 서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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