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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후지와라 신야 지음, 강병혁 옮김 / 푸른숲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낙관이 아니라면 비관으로, 자부가 아니라면 자책으로, 기쁨이 아니라면 슬픔으로, 가능성이 아니라면 불가능성으로. 그렇게라도, 잘 타지 않는 그것들로 불을 지펴 때서라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죄책감으로, 부채감으로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물러서고 돌아설 용기가 없다면 그렇게라도 살아지지 않겠는가. 체념도 아니고 달관은 더욱 아니다. 그냥 그렇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위화의 말처럼 요즘 나는 그렇다.
어떤 책을 읽건 읽고 싶은 문장만 눈에 들어온다. 요즘에 밑줄 그어놓은 말들이 다 그런 말들이다. "사진이란 우연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필연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기타큐슈(北九州) 시의 소도시 K에서 페리로 30분이면
가는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가 초상집의 밤처럼 정적에 감싸여
있는, 이른바 한계취락이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다. 무성한 산에서는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페리가 들어오는 항구에는 어선이 정박해 있으나, 어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도시의 폐기물이 쌓인 모래톱에
철썩철썩 밀려오는 파도 소리뿐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황폐해진 쓸쓸한 집의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어둑어둑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 텔레비전이 휘황한 빛을 발하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공허한 웃음소리를 퍼트리고, 그 앞에는
브라운관의 희고 푸른 광선이 얼굴에 비치는 노인이 누워 있다.
섬의 샛길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에 화산재와 같은 빛깔의 밭이랑이
보이고, 허리가 굽은 한 노파가 쪽파를 다듬고 있다. p42-43
롱 테이크로 찍어도 정물처럼 어느 하나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다. 그저 그런 에세이에 수없이 등장할지도 모르는 문장들이다. 또 어쩌면 흘려들어도 아쉽지 않은 제목일지도 모른다.
대충 흔들리는 사진, 끊어 흘린 말들, 톡 건드리고 날아가는 제목의 책들이야말로 서점에서 점점 자리를 넓혀가는 중이 아닌가.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마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어느 글, 어느 사진에 갖다 붙여도 될 만한 제목이다. 굳이 루앙프라방이니 아이슬란드니, 프라하니 가지 않아도 깊은 밤에 혼자 캔맥주 하나를 까고 앉아 끼적여도 될 만한 글이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후지와라 신야는 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홀로 거리를 걷기 시작하자, 보통 때는 시끄럽게만 들리던 거리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잡다한 인생의 집적(集積)처럼 들렸고,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p148
이제 그녀(영화 <시>의 양미자)는 진실한 시를 얻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공간이 아니라 장소를, 풍경이 아니라 인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p355
“구하지 못한 소녀를 찾아 나선 정신과 의사, 편의점의 냉기를 녹여준 오르골과 고로케 샌드위치, 무명의 카메라맨에게 찾아온 수국 사진, 시부야 인터넷 카페에서 피어난 코스모스의 인연, 누군가에겐 구원이 된, 세상에 하나뿐인 수첩. 딱 한 정거장이 지나는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 그 아름다운 한 순간”
뒤표지에 나온 대로 딱 그런 이야기다. 안 보려고 하면 안 볼 수 있는, 아니 보려 굳이 애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자가 자살을 했다고 정신과 의사가 거리에 나와 그와 비슷한 소녀를 구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무심히 지나쳐도 좋을 국도 변 카페 선반에 놓인 머그 두 잔으로 주인 남녀의 삶을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나는 대개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다 종종 눈물을 흘린다. 쓰러질 듯 쇳소리를 내가며 부르는 임재범의 <여러분>. 영화 <로큰롤 인생>에서 링거를 달고 나온 할아버지가 부른 <Fix You>. 뇌성마비로 몸도 못 가누고 발음도 또렷하지 않은 채 ‘나 가진 재물 없으나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걸 갖게 하셨네’ 부르는 시인의 노래.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를 부르던 추기경의 노래. 울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량하고 겸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량하고 겸손해지고 싶을 때에야 그 소리들이 들려 눈물이 나는 것이다. ‘거리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은 제목, ‘당신이 전철의 다른 방향을 보았을 때’ 같은 제목처럼 그런 말들이 귀에 꽂히는 시절이 있는 것이다.
담배를 사러 야밤에 편의점을 찾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 저래 가지고 원금이나 건질까 싶게 인적도 없는 도로변에 앉아 삶은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 자정 가까운 시각에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아이폰으로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을 보면서 귀가하는 남자, 한낮 버스에 한의원 탕약 박스를 들고 올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아주머니. 내가 스쳐 지났던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후지와라 신야는 만나고 듣고 기록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p42-43
이 책은 어쩌면 우리 같이 그러자는 기대 없는 호소일지도 모른다. 이 책 ‘저자의 말’ 첫 문장은 이렇다. “이 책에 실린 열네 편의 이야기 중 열세 편은 일본 지하철에 놓이는 무가지 <메트로 미니츠>에 6년 동안 연재한 일흔한 편의 글 가운데 골라 수정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다가 가장 울컥한 말은 바로 저 문장이었다. 무가지가 뭔가. “전철로 이동하는 15분에서 30분쯤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사진과 기사를 훑어보고, 회사에 도착하면 이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는 지은이의 말처럼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통근길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 저 비극적인 메트로에 타임즈도, 타임도, 아워도 아닌 미니츠라는 제호의 신문을 쫓기듯 읽는 사람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날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호흡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일기를 쓰지 않게 된 것은 단지 피곤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기에 ‘기록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없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p156
최악의 경우에 인간의 삶은 비극적이지 않고 무의미하다. 영혼은 부서지지만 삶은 계속된다. 의지가 실패하면서 비극의 가면도 부서져 내린다. 남는 것은 고통뿐이다. 최후의 슬픔은 이야기될 수 없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p135
우리의 무가지와 같다면 광고와 기사가 구분이 되지 않는, 온갖 연예인 이야기가 난무하는 지면에 글을 쓴 지은이가 바라는 것은 공명(共鳴)이 아닐까. 너도 슬프냐고, 나도 슬프다고. 아니, 니 옆에, 앞에, 뒤에 있는 모두가 다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간다고. 누군가에게는 체념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올라 레이먼드 카버라는 이름을 끼적여두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소개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종소리처럼 긴 여운, 스산한 일상의 풍경에서 건져올린 삶의 신비.” 후지와라 신야의 이 책에 그대로 옮겨 써도 좋을 말이다. 사는 일은 전혀 신비롭지 않은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신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글을 읽고 3일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떠났다”고 할 만큼 후지와라 신야는 청춘의 열병을 스스로 앓았고, 전염시켰다고 알려졌다. 옮긴이가 날선 칼날, 강렬한 개성, 반골 청년, 기이한 광채 등의 말로 수식한 이 노회한 작가가 일상의 스치는 순간을 기록했다고 하니 뭔가 소품집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스케일이 작아지고 기력이 쇠한 것은 아닐 테다. 그런 방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들, 그래서 저자가 “지금의 도쿄, 그리고 쇼와 이후의 일본을 살아온 사람들의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갈증’”을 그제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도, 티베트, 아메리카라는 장소가 아니라 삶 자체를 말하니 스케일은 더욱 커졌다. 또한 쇠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연민이 자기를 벗어나 타인의 삶으로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열린 것인지도 모른다. ‘죽지 마! 살아라!’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열다가 쓰나미가 발생하자 수익금을 기부하고, 차에 생수를 싣고서 바로 재해 현장으로 달려갔다는 옮긴이의 전언을 듣자면 그렇다.
잘 지어진 에세이 하나 읽었다고 삶이 달라지기를 바랄 만큼 순진하지도, 이 책으로 응원과 위로와 공감을 얻었다고 할 만큼 내 삶이 명쾌하지도 않다.
다만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위화의 말이 체념도 용기도 아닌 그저 사실로 여겨지는 요즘이므로 책들을 읽고 이런 말에 밑줄을 그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살아 있었다. 오늘 밤 내가 내 딸 경미를 생각하며 다시 가슴을 후비어판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환한 내일을 맞을 것이었다. 모든 죽은 영혼들이 그리워하는 삶의 독한 괴로움, 칼끝 같은 아픔을 나는 아직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귀가도》, 윤영수, p115-116
다시 읽어보니 거기에는, 인간의 일생은 무수한 슬픔과 고통으로 채색되면서도, 바로 그런 슬픔과 고통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받고 위로받는다는, 삶에 대한 나의 생각과 신념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 같다. 슬픔 또한 풍요로움이다.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