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의 시대 - 길들여진 어른들의 나라, 대한민국의 자화상
이승욱.김은산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절판


이반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미래 같은 건 없다.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다행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느껴야 하고 겪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결국 교묘한 진통제로 통증을 무화시키고 무감각한 채로 자신이 (사실은 우리의 후손이) 어떻게 다칠지 모르는 맹목의 상태로 달려나갈 것이다. 그때 우리를 보호해줄 유일한 것은 오직 ‘희망 없음’이다.
-235쪽

자기혐오란 무엇인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수치스러워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다. 죄책감이 유무형의 법적 책무에서 비롯되는 양심적 자기 처벌이라면, 수치심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적 자기혐오다. 뭔가 부끄럽다는 것은 사회적인 평가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고,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는 경험을 포함한다.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타인을 내 안에 비춰보는 행위다. 내 안의 타자가 수치심의 발원지다.-214쪽

임신 출산 관련서나 육아 관련 서적의 대부분은 어떤 아이로 만들 것인가에 집중한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감정의 변화나 의미 등은 생략되고, 엄마 노릇을 하는 것으로 바로 넘어간다. 결국 엄마 노릇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만 남는다.-50쪽

가족 공동체는 사라지고 경제 공동체 또는 생존 결사체로 남은 핵가족은 정서적 연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새로 태어난 생명을 돌보는 것이 가족 공동체 전체의 기쁨이고 마을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었던 시대에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역할은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이제 생존 공동체로 남은 핵가족 시대에 남자는 아내의 정서적 수용처, 감정적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아내는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원한다. 하지만 남성은 여전히 누군가를 수용하고 공감하는 존재로 키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이 시대에 갑자기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남아선호와 불평등의 전통이 만들어낸 오랜 고질이다.-52쪽

그들(20대)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효율성’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최대한 ‘수동적인’ 포지션에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매뉴얼’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이다.-57쪽

이미 갖추어진 삶에서 시작했으니 자신이 애써 뭔가를 만들거나 궁리할 필요가 없다. 그 수준과 조건을 유지하고, 거기서 더 나빠지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현재의 상황을 유지할 수 없다면’이라는 과잉된 불안을 생각해보자. 몰락에 대한 실제적 위협보다 그것에 대한 공포는 삶을 가혹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들은 이런 공포를 야기할 만한 몰락을 경험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IMF를 경험한 것이다. 부모나 일가친척 중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상황과 지위가 하락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삶의 기반이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62쪽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은 ‘고통을 느끼지만feeling, 겪어내지suffering 못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고통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단지 고통스럽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서둘러 없애고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자꾸 시도하는 데서 문제는 비롯된다. 고통은 나쁜 것이고, 가능한 한 느끼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지금 20, 30대의 부모는 그들의 자식이 실패하지 않고, 그 실패 때문에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인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인자는 무엇인가? 고통 없는 삶은 삶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 다름없다. 고통을 ‘겪어내는’ 과정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어떻게 그 고통을 마음에 품어 변화와 변형을 이끌어낼 것인가? 결국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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