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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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사로잡아 사유를 강제하는 것은 절차탁마된 노회한 시들이 아니라 온몸이 악기인 자가 연주하는 이와 같은 혼신의 노래들이다.-29쪽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陳)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36쪽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 사전에서 구출해 개인 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37쪽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42쪽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98쪽

빼어난 시가 노래하는 것들이 때로 그 '극단에서의 슬픔'이다. 한순간의 달뜬 감정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냥 좀 내버려두었다가, 그것이 슬픔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내 마음의 세입자나 되는 듯 적요해질 때, 그때 쓰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어려운 일은 시를 쓰는 일이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이다.-44쪽

불필요한 곳 혹은 엉뚱한 곳에 나태하게 찍혀 있는 쉽표는 글의 논리와 리듬을 망쳐놓는다. 쉼표는 전혀 사용하지 않거나 아주 많이 사용해야 한다. 쉼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천의무봉의 문장을 쓰거나 쉼표의 앞뒤를 섬세하게 짚게 하는 치밀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느낌표를 남발하는 사람은 얼마 안 남은 총알을 허공에다 난사하는 미숙한 사격수와 같다. 느낌표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거꾸로 행동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감탄할 만한 대목에는 느낌표를 찍으면 안 도니다. 자아도취적으로 찍혀 있는 감탄 부호 앞에서 독자는 저항감을 느껴 감탄하지 않으려 기를 쓸 것이다. 작가가 먼저 '느끼면' 독자는 냉담해진다. 반대로 전혀 감탄할 만하지 않은 대목에 의외로 찍혀 있는 느낌표는 유혹적이다. 그때의 느낌표는 어쩐지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싶다는 고분고분한 선의를 불러일으킨다.

말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이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254쪽

삶의 진실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유지태가 아니라,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변화 때문에 말없이 등을 돌리는 이영애 쪽에 있으니까요.-337쪽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건, 그것이 한 생이 함유하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배합 비율을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방식이겠지요.-338쪽

이제 그녀는 진실한 시를 얻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공간이 아니라 장소를, 풍경이 아니라 인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355쪽

시는 진실 혹은 진심과 더불어 써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대개 다들 잊어버렸고 이제는 오히려 우스워진 그 정의. (...) 이 영화는 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본래 어려운 일이고 오늘날 시를 쓴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니 시를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다고 투덜거렸던 첫 수업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를 쓴 사람은 거의 없다.-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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