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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 열림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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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고 싶은 책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참 좋다

 

시집을 접해 보니 시인의 어머니 또한 분명 시인임에 틀림없음을 알겠다! 그것도 내가 아는 어떤 시인보다 훌륭한 시인임을..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내 아이가 제 손으로 한권의 시집을 골라 읽을 정도의 나이가 될 때 쯤에는 이미 한권의 빛나는 고전으로써 자리매김되어 스스럼없이 찾아읽게 될 것을 간절히 바라고...또 믿어본다.

 

시를 읽으면서 왜 내 어머니는 이같은 재치어린 말씀을 못하실까, 자식에 대한 이같은 절절한 사랑을 표현못하실까, 이같은 통쾌한 풍자를 풀어내지 못하실까...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시인이 부러운 것도 없지않았지만 진정 따지고 들자면 먼저 나 자신 시인같은 자식이 못되었음을 탄식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머니 말씀 하나라도 허투로 듣지 않고 얼마나 정성껏 기록해두었던가, 살면서 어머니와 다정다감 안부전화를 몇번이나 주고받았던가, 일평생 농군의 자식으로서 농번기철을 이용해 그 노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얼마나 땀흘려보았던가...

 

시인의 어머니는 세상의 여느 어머니와는 다른 섬세하고 타고난 감성의 소유자요 시인임이 분명하지만 만약 평범한 자식 밖에 없었다면 이 시집이 탄생했을까? 결단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자식이 단순히 시인의 직업을 가졌다고 탄생될 수도 없는 시집이다. 어머니 시인의 남다른 점을 아시고 끊임없이 그 분에게로 시인의 촉을 기울이고 애정어린 세심한 마음을 기울이고 나누었기에 탄생할 수 있는 시집이란 뜻이다. 그러니 참 소중한 시집이다. 세상에 좋은 시집은 많지만 이런 귀한 사연으로 태어난 좋은 시집은 많지 않다.

 

꿈꿨는데 말이여, 얼굴은

니가 분명한데 몸뚱이는 노루인 겨.

근데 가만 살펴보니 발이 셋이여.

조심스럽게 노루에게 물어봤지.

큰애야, 뒷다리 하나는 어디다 뒀냐?

그랬더니 머루눈을 반짝이며 울먹울먹 말하더라.

추석이라서 어머니께 드리려고 다리 하나 푹 고았어요.

잠 깨고 얼마나 울었는지, 운전 잘해라.

뭣보다도 학교 앞 건널목 지날 땐

소금쟁이가 풍금 건반 짚듯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쓴다.

 

<노루발 전문> 어머니학교 24

 

이 시를 읽고는 가슴이 싸아아해지면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시인의 어머니를 향한 진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시이기에 시인에게 더한 믿음이 갔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내 마음 속에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면서...

 

땅바닥에 절하고 댕기느라

허리가 끊어지겄다.

 

-평생 논밭에다 절하셨잖아요?

 

꼿꼿하게 힘을 줘도 금세 활처럼 휘어야.

 

-활은 만들어서 어디다 쓰시게요?

 

힘 남았을 때, 한번

오지게 당겨보려고 그런다.

 

-멧돼지라도 잡으시려고요?

 

미친놈! 단박에

저승 문짝에 명중시키려고 그런다.

 

<저승문짝> 전문 어머니학교 27

 

아마도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같다. 아들은 일부러 변죽을 울리고(어머니의 노쇠함을 어찌 해줄 수 없기에)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죽비를 내리치듯(이승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명쾌하지만 비장한! 해답을 제시하신다. 

어른들은 흔히들 "잠자듯 죽었으면 좋겠어..", "잠자리에서 갔다니 복받은 양반이지..."라는 말씀을 하신다. 시인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금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바람들을 새기게 된다.

 

 

지금 어머니가 고속버스를 타고 이 못난 딸에게로 오고 계신다. 마을에서 차를 타고 읍내 나와 읍내서 목포로 목포에서 다시 이곳으로....나는 고작 닭한마리 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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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는 합창단에서 노래하곤 했다
죠 메노 지음, 김현섭 옮김 / 바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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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파랑새는 합창단에서 노래하곤 했다

저자
죠 메노 지음
출판사
바움 | 2012-06-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현대인의 불편한 일상을 해부하다!넬슨올그런 단편문학상 수상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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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기는 커녕 첫번째 짤막한 단편을 읽으면서도 끊임없이 낯선 길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번역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고 최근엔 호흡이 짧은 시나 동시류를 주로 접했던 이유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오밀조밀 남다른 문체와 내용전개들이 기이하고 낯설고 독특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유독 퍼즐맞추기나 미로찾기 게임을 싫어한다

답이 뻔한 상황을 에둘러 가는 복잡한 놀이는 놀이라기보다는 일거리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이 책의 전체적인 소감이 다 즐거움으로써가 아닌 일로써의 독서였던 것을 글쎄, 굳이 숨겨야 하나?

 

아이들은 퍼즐맞추기나 미로찾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결과보다는 목적지나 완성된 그림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과정 하나하나에서 순간순간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 하면 좋겠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놀이나 취미 자체의 완성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책을 모짜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곁에 두고 일상이 지독하게 싫증이 날 때 가끔씩 꺼내 읽고 싶다

또는 끔찍하고 불행한 뉴스를 접하고 마음이 어두울 때도 샤갈의 그림을 대하듯 이 책을 펼쳐 읽어도 좋으리라

 

그래서 이 책은 17편의 단편이라고 하지만 단숨에 읽는 책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또 재미 있게 읽으려면 마음에 드는 주인공을 택해 그 주인공과 열흘 아니 한달 이상 은밀한 친교의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와닿는 주인공이 있다면 <우리동네 이야기> 속 보브 언더우드라는 남자다.

자신이 십장으로 일하는 플라스틱 공장에 새로 온 여직공의 슬프고 불행한 노래를 들어주고 왜 슬픈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자신이 믿어온 절대적인 가치와 질서를 저버리면서까지 그녀에게는 은총이나 구원으로 보이는 행동을 한 남자.

이 세상 어딘가에 또는 내 주변에 진실로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없이 마음이 촉촉해지고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는 의술로 치료할 수 없다>는 엽기적인? 쌍둥이 남매가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심리치료 성장일기 같다.

병상에 있는 어머니로 인해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의사인 아버지의 낡은 가방 속에서 발견한 진정제를 이용해 동물이나 곤충들을 마취하다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고 하는 장면이 나오고 결국 치명적인 투여로 인해 대량으로 죽어버린 동물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하필 엄마의 생신날에 자살을 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던 일을

이만큼 성장한 후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는 얼마 전 접한 신이현의 말이 언뜻 떠오르기도 했다.

나라가 전쟁이나 기근, 경제 공황과 같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방적인 희생을 당한 세대는 노인, 청소년, 유아들이다..

 

처음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하고 괴상하고 작위적인 설정의 내용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이상스런 풍경들은 분명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작가의 눈으로 그린 뒤틀린 현실, 그 안에서 과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따뜻한 판타지와 그로테스크한 동화와 알 수 없는 밋밋함 등등의 요소로 버무려진 이야기들은 한편 한편 우리 안의 단면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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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 - 인간의 꿈을 현실로 만든 인류문명사 160년
오룡 지음 / 다우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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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부부가 외출을 하고 돌아오자 아이는 잠깐만요, 눈을 감아 보세요 하고 잠시 자리를 뜨더니 자, 눈을 떠보세요. 하며 식탁 앞에 자기가 만든 레고작품을 선보였다.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에펠탑이 위풍당당(?) 서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에펠탑을 만들어 볼 생각을 했지? 예리한 끝부분과 아치형의 모양까지 너무 그럴듯해서 사진으로만 접한 실제의 에펠탑보다 훨씬 실감났다.

 "와! 이걸 진짜 네가 만든 거야?" 하고 한껏 아이를 추켜세워주는 남편.

 "그렇다니까요."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요즘 내가 읽는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에 실린 표지 사진을 보고 만든 것인데 정말 생각도 못한 부분에서 책을 선물받은 보람이 나타나서 속으로 깜짝놀랐다. '아, 이래서 간접체험이라도 다양하게 시켜줘야 되는구나..."

 

사실 책이 너무 두꺼워서 스을쩍 기가 눌린 판이었다. 시설물과 설계도 중요인물과 당시의 생생한 현장 사진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고 엑스포에 관련된 일화나 비화 등의 에피소드들이 부분부분 삽화로 끼어 있어서 정독을 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긴 했지만 요즘따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제대로 마칠까 하는 우려마저 없잖아 있었던 것인데 아이의 깜짝 이벤트로 인해 나는 새삼스레 흥이 나서 어디론가 외출나간 진정과 열정을 서둘러 불러들였다.

 

엑스포 역사 160여년의 궤적을 잘만 훑어가도 학창시절 애매했던 역사의 족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만 같다. 세상에나, 복잡하고 미로같고 지루하기만 했던 역사책 아니던가. 하긴 엑스포의 역사는 정치와 시대사의 숙명적인 한계와 속성이 빚어내는 지지부진과는 정반대의 인간의 최고의 정신과 상상력과 과학과 지성의 결합으로 이어진 발자취이니 여타의 오류많은 역사와는 분명 그 태생부터 다르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물론 엑스포에서 선보였던 각종첨단 무기류들이 인류를 위협하고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자연을 훼손하여 초기 산업문명과 과학의 진보라는 주제를 지나 근래의 엑스포 주제는 인간과 환경이 주테마가 되고 있다

 

초기 엑스포는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국제주의와 국민통합을 꾀하려는 민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유럽 제국등에서 잇달아 일어난 엑스포가 그러했고 뒤이어 신흥강국 미국도 유럽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룰만한 강국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국가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일환으로 엑스포를 적극 유치했다.

 

엑스포란 어머니를 통해 빛을 보고 이름을 얻게 된 것들은 각 지역의 명물이 된 랜드마크에서 뛰어난 건축가, 전위적인 예술가, 문명의 획을 긋는 발명가는 물론 지금에까지 두루 애용되는 놀이기구는 물론 미싱이나 자동차, 전화, 티비 등 각종 생활 이기와 아이스크림, 케첩, 포도주와 같은 식품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다.

현재 파리의 명물이 된 에펠탑은 엑스포를 위해 최초로 기획되었으며 에펠탑의 "에펠"은 시공자이자 건설자 구스타브 에펠에서 따온 이름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또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의 선물로써 처음엔 횃불을 든 오른팔부분만 전시가 되었던 점도 이채로운 내용이다.

 

우리와 지정학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한때 우리의 지배자로 군림한 일본의 경우

1867년 파리 박람회 때 첫 발을 내딛은 이래 꾸준히 세계 각 곳의 박람회에 동양적 특성을 드러내며 유럽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들이 1970년 아시아로선 첫 엑스포 개최국으로써 이름을 올리기 전 조선의 식민통치기간 중 열었다는 수많은 박람회(조선물산공진회란 명칭으로)와 그것을 개최하기 위해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허물고 궁 본래의 모습을 훼손했다는 삽화를 통해서는 오싹한 전율이 일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치밀한 접근과 계획과 더 나아가 동아시아 패권자로서의 꼼수가 백여년 전부터 이미 주도면밀하게 작동되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 계획의 희생양과 시험대의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골깊은 반일감정과 별개로 환경 문제에 눈돌린 2005년 일본의 아이치박람회만큼은 생각해볼 점이 많았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철저히 순환형 재활용 자재를 사용하고 박람회장의 폐 구실을 한 '바이오 렁'이란 녹음 벽은 도심과 자연의 공존공생의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살아 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라는 주제 하에 여수 세계 박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개최를 앞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어서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왜들 저러나? 싶었는데 그런 것들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란 것을 여기 나온 세계 박람회를 유람하며 알게 되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리는 정책이나 사업은 지구촌 어디에서나 통용-물론 모든 면에서는 아니지만-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행사를 치르는 일 자체에 지나치게 올인하는 점만은 지양했으면 한다. 국민적 정서나 공감대와 상관없이 모호하게 전세계인을 유치하려는 바람이나 노력보다는 우리의 무엇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구현하고 형상화할 것인지를 고민하되 연륜깊은 세계무대 선수들에게 배우고 단련함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의 방대한 내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하기엔 여러모로 역량이 못미침을 절감한다.

일단 책을 보시라! 세계가 한결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믿고 지지하시라! 당신, 또는 당신 자녀의 발명품이 언젠가는 세계무대에 전시될 것임을, 나아가 주인공이 될 것임을.

 

머리말 중에서

 

....

엑스포는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과 기술, 자본과 인력이 총동원된 문명 전시장이다. 인간은 박람회에서 정보를 나누고 미래를 가늠하고 공통과제를 논의해 왔다. 박람회의 역사는 근현대사를 꿰뚫는 인류의 궤적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거기엔 평화와 진보를 염원한 지도자들의 미래지향적 안목이 들어 있는가 하면 국가위용을 과시하려는 패권적 욕망이 숨어 있다. 때로는 유력한 통치수단이 되었고 기업과 개인의 돈벌이 사업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엑스포는 이렇게 중층적 의도와 성취욕 속에 성장하면서 인간사 모든 분야에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엑스포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거대한 문명 양식을 만들어 낸 인간 활동상과 그것이 몰고 온 세상의 변화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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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불 들어갑니다 - 열일곱 분 선사들의 다비식 풍경
임윤수 지음 / 불광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이름 높은 스님들의 다비식이 있었다.

생전의 인품과 세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따라 위로는 정재계 인사에서부터 아래로는 스님의 사랑을 받았던 흙먼지 뽀얗게 털에 밴 개나 산새 들새에 이르기까지 다비식에 참석하였다. 연화대에 불길이 치솟음과 동시에 자리를 뜨기도 하고 끝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키는 이들. 절에 따라 스님들이 연화장 주변을 돌며 나무아미타불을 외기도 하고 어떤 곳은 테잎으로 틀어놓다가 그마저 다비식이 채 마쳐지기도 전에 거둬버리는 야박한 인심도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첫 제사를 지낼 때 우리 형제들은 제사의 기본을 몰라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작은 아버님이 오셔서 이렇게 저렇게 올바른 방식과 순서를 가르쳐주셨다. 나는 마음 깊이 감사함보다 아버지께 대한 자식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어딘지 개운치가 않았다.

이 일은 다행히 나 혼자만의 짧은 생각이었기에 작은 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제사를 마칠 수 있었다.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오른 것은 이 책의 어느 절 스님들의 태도가 꼭 그때의 내모습 같이 지나치게 아집에 사로잡힌 듯한 생각이 들어서이다.

큰스님이 돌아가셔서 다비식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나그네(저자)의 진심어린 걱정과 조언을 "남의 일에 참견마라"는 식으로 무시하신 스님들. 걱정은 그대로 나타나 법구가 다 소실되기도 전에 연료는 끊어지고 드러난 법구의 일부를 막대기로 끌어올리고 부족한 연료를 뒤늦게 보태는 식의 망측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규모가 작은 절이라 다비식에 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미흡함이야 당연하겠지만 지켜보는 이의 참된 마음마저 속된 참견으로 받아들이신 스님들의 태도에는 어쩔 수 없는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다비식 하나 성의껏 모시지 않은 절에 그 무슨 도타운 불심이 있겠느냐는 생각이다.

절 마다의 전통과 상황에 따른 절차나 형식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 책은 다비식의 올바른 지침과 참고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믿어진다. 그런 이유로 일반인보다 스님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 아닐까 한다. 스님이라면 누구나 이 다비식을 치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미지의 어느 시간에 맞이할 죽음. 역지사지의 심정이 된다면 이 세상 마지막 길에 최소한의 예의와 존의의 염송을 다하지 않을까.

절집의 시계는 세간의 시계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그것은 스님들의 생활이 조용하고 정갈하며 흐트러짐이 없고 시끌벅적함이 없는 정중동의 고요 속에 모든 참선을 행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신도가 아닌 어쩌다 가는 관광객의 입장이 되어서도 절에선 함부로 언행을 삼가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절의 행사, 그것도 한 생의 마지막과 관련한 다비식에서의 스님들의 태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신도들이 감화를 입고 안 입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예전엔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 자식은 3년 동안 그 묘를 돌봤다.  시묘의 풍습이 누구나 따라야 할 훌륭한 전통이기엔 무리지만 인간 효심의 지고지순한 면을 대표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풍습에 비하면 요새의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하는 간단한 절차야 말로 춘풍추우의 세월동안의 자연스런 결과라 하더라도 스님들의 다비식에서조차 세간의 건조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맘도 없지 않다. 처음부터 우리네 세속과는 분명한 차별화를 둔 범탈속의 삶을 영위하시기 때문이다.

죽음을 엿보았다.

법구를 이운할 상여의 안쪽 천장까지 생화로 곱게 꾸민 화려한 꽃상여거나 꾸밈이라곤 없는 알관상여거나 마지막엔 물과 불과 흙과 바람으로 스러지고 한줌의 뼛가루만 남았다. 영화롭게 꾸민 연화대일수록 타고 남은 빈자리가 더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숱하게 모인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 자리의 헛헛함이 큰 이유는 뭘까. 다비식은 선승들의 중생을 위한 마지막 가르침이요 색즉시공의 불교의 진리를 격렬한 불꽃으로써 공증하는 의식이다. 삶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죽은 이만이 가능한 섬뜩한 진리임에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죽음이 각자의 몫이듯 삶 또한 온전한 제 몫이기에 찧고 까불고 길고 날뛰거나에 관여치 말라는 뜻이겠지만 모든 것을 헤아린 분들의 눈으로 볼 때 한갓 원숭이들의 날뛰움과 무엇이 다르랴. 자비심이 충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리라.

인간의 가장 큰 이상은 무엇일까. 종교에 귀의함일까, 삶의 매 순간 불꽃같이 살고 싶은 것일까.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라 후자의 삶을 원한다. 그 길을 가되 힘들고 의지가 꺾일 때마다 종교에 의지해 힘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금 그어둔 삶의 공간내에서 한발짝도 양보하지 않고 손해봄도 없이 종교의 향내만 맡고 적당히 흉내만 내다 말겠다는 식의 얄팍한 정신으로 결국 얻고 깨달을 수 있는 것 또한 많지 않을 줄을 안다.

어떤 순간엔 아웃사이더의 느낌으로 괴롭다. 깊이 있는 삶 속에 뿌리내릴 수 없을 때, 남들은 다 느끼는 공감을 못할 때,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혼돈스러울 때...간단히 "그게 너야. 자책하지 마"하고 말지만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 심정이 그리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면, 이 책을 읽은 후 찾아온 느낌이 그렇다.

처음엔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삶의 전면을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에서 최대한 멀찌기 떨어지고 싶었으리라. 끝내 그 일을 못한 채 수박겉핥기란 이런 때 쓰는 말이겠다. 두고두고 여기 이 책의 죽음을 새겨 읽으며 내 삶을 반추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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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메리지
앤 타일러 지음, 민승남 옮김 / 시공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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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학창시절만 해도 이혼한 가정이 별로 없었다. 특히 시골태생인 내게는 이혼이 흔하거나 평이한 사안이 아니었다. 처음 접한 이혼은 동네서 곧잘 싸우던 소꿉친구의 부모가 타지로 이사간 얼마 후 정식으로 갈라선 일이었다. 그때가 고교시절이었을 것이다. 아짐, 삼춘이라고 불렀던 당사자 부모들 마음까지야 헤아릴 수 없고 다만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 친구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따랐을 거라 막연히 생각을 했었다.

그로부터 이십여년 동안 주변의 숱한 이혼을 접했지만 이혼의 충격이 가장 직접적이었던 때는 최근 언니의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이혼이 흔한 일이 되었다고 하나 내 가족에게 그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고심에 고심을 다한 언니가 힘겹게 얘기를 꺼냈을 때 언니는 이미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언니가 아니었다. 어찌할 수 없이 다져진 억센 기운이라고 해도 낯설고 생경스러움에 틀림없었다. 우리들 사이에 합쳐질 수 없는 유리벽이 생긴 것 같았고 서로 그 벽을 외면하고 태연한 척 하는 모습이 서글펐다. 맞지 않는 상대였을지라도 한 때 사랑하고 가족이었던 이를 쓸모없고 못된 사람이라고 언성을 높일 때는 물론 그간 받은 고통에 비례한 원성이리 짐작하면서도 듣기엔 몹시 고역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얼마나 빨리 언니를 이해하고 옹호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던가. 누가 흠결을 들춰내기라도 할까봐 단단한 방어막을 먼저 마련하였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형부의 단점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적의를 분명히 했고 그보다 까마득히 잊는 것으로 앙갚음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혼이란 단어에는 적응이 쉬 안된다.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이혼은 하면 안되는 것이라고까지 내 자신은 생각할 정도니까.


그래서일까, 이 책 아마추어 메리지를 읽으며 주인공들의 엇갈리는 운명을 대하는 일은 안타깝고 걱정스러웠다. 제목으로만 판단한다면 누구에게나 결혼생활이 프로일 수 없는, 영원한 아마추어리즘이 결혼의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이혼이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삼십년을 함께 산 주인공들 아닌가.

하긴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 황혼 이혼률이 급증하는 것을 보면 서로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한평생을 참아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요 미덕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잘 사는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고 한다. 처음부터 닮은 이들은 물론이고 전혀 어울리지 않다거나 닮지 않았다라는 평을 들었던 이들까지 매일 동거동락 하며 사는 동안 차차 특이한 제스처에서 출발이 되었다가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해지거나 성정이 닮아가고 공감되는 사고를 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를 흔히 보는 것이다. 그런 부부를 가까이서 대하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결혼이 혼자만의 독주가 아닌 둘이서 만들어가는 앙상블임을 다시금 깨닫는 귀한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 아직은 닮기보다 자기의 주장을 더 하는 편이다. 이 책의 주인공 폴린이 생각하는 "두 영혼의 엮어짜기"라는 의미에 미치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고 마이클의 "나란히, 그러나 각자 따로 "라는 존중의 의미에 미치래도 한참 멀었다. 그러나 두 주인공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에 대한 기대를 대화로써 조화롭게 줄여가고 있는 점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방식만을 고수하는 부부간의 문제 말고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큰 딸의 가출과 실종이 그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가족은 실로 오랫만에 의기투합되며 가족의 소중함을 되찾는가 싶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게 마음에 간 금이 점점 벌어지고 아물지 못한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딸의 실종을 앞에 두고 아버지 마이클의 태도를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다. 아내의 탓이라거나 딸 자신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급급했지 자신이 얼마나 가족들에게 권위적이며 애정이 결여되어 있는지는 반성도 고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새로 이사온 이웃에게 자녀관계를 말할 때 실종된 딸은 아예 없는 셈 치고 남은 두 아이만 밝혔던 남편, 아내는 더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실망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실종된 지 8년만에 큰딸의 소재를 연락받고 찾아갔을 때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아내 폴린은 성격이 다혈질적이며 감정적이긴 하지만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정신 이상으로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딸을 찾아갔지만 규정상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아내는 이성을 잃을 만큼 안타까워하고 원망하지만 남편은 그 순간까지도 체면만을 차리며 점잖게 물러난다. 거기다 세들어 사는 집에 혼자 버려지다시피 한 세살짜리 손주 페이건을 대하는 태도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할머니는 한시라도 손주를 데려오고 싶은 맘이나 할아버지는 아직 손주를 맞을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며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 30주년 기념일 사사로운 부부 싸움으로 끝내 부부가 헤어지는 마당에서 둘이 똑같이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면모나 부모의 도리를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어린 손자를 위한 책임감과 사랑과 관심이었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덧없이 돌아가시고 아내의 고교 동창이었던 여인과 재혼(물론 아내가 죽기 전)한 할아버지는 아내의 성격과는 판이한 자립적인 새 아내에게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황혼기를 보낸다. 재혼이라도 어김없이 아마추어 메리지는 적용되었던 것이다.


손자 페이건까지 모두들 결혼하고 자립해서 사는 어느 날 고요한 수면에 파문이 일듯 페이건의 엄마이자 마이클의 큰 딸 린디가 나타난다. 그도 아이가 둘 있는 남자를 만나 새 가정을 이룬 후였다.

남동생 조지의 연락처를 겨우 알아 내고 그 주변을 이틀에 걸쳐 배회하던 누나 린디와 동생 조지가 만날 때 나도 목이 메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이 29년만에 모두 모인 자리. 얼마 전까지의 상실감과 자책과 배신감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모두 웃고 떠들고 반갑게 악수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 후 동생 조지는 혼자 되내었다.



<누나, 왜 그랬던 거야? 그럴 가치가 있었어? 그게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알아? 뭐가 그리 중요해서 그렇게 우리 세계를 갈가리 찢어놓은 거야? 죄책감은 들어?.............누나가 잘못했다고, 이기적이었다고, 잔인했다고, 아니...사악했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 내가 누나를 잡아두기엔 부족했어? 내가 그렇게 쉽게 잊혀졌어? 누나,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었어?>



그것은 나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다만 젊어서는 한없이 안정된 삶 마저도 그토록 위험한 늪일 수 있다는 것,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 보이지만 누군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가족과 혈연의 끈으로도 어찌 붙들 수 없는 절박한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것. 삶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아마추어라는 것. 나 자신 아직도 아마추어이기에 치명적인 실수의 여지가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재차 확인하고 가족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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