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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패밀리
애슐리 박 지음 / 두란노 / 2013년 2월
평점 :
이 책은 오직 자신의 길을 위해 매진하던 한 여성이 뜻밖에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고 자신의 계획과 전혀 다른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수한 학업성적을 거두며 미국 유학까지 간 저자는 가정주부만 빼면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실수하셨던 것일까? 결혼 후 남편과의 갈등 끝에 공학박사과정을 포기하고 본의 아니게 전업주부로 살게 된다. 영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이 어색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같은 신앙 안에서 주님의 뜻으로 결혼하였다 생각했던 남편과 1994년 11월 결혼하여 실로 자기 자신과 서로를 향해 수많은 갈등과 주님의 뜻을 찾아 노력하였지만 방향을 전환할 결정적 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갈등이 깊어지자 저자는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남편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선교단체에서 일하는 디렉터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결혼 생활은 한 마디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없이 갈라설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아내를 대하는 남편 또한 괴로웠었는지 의사면허를 1년 늦게 획득하고도 직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이런 남편의 태도에 저자는 절망한다. 가정의 불화는 삶의 부조화로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저자는 박사학위 공부를 포기했고, 남편은 의사로서의 직장을 포기한다. 악몽 같은 현실이 모두 남편 탓만 같았다. 가슴은 남편에 대한 분노로 타들어 갔다.
‘저 남자 때문에....’
만약, 2008년 결혼 14~15년차에도 주님의 결정적 간섭하심이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아마도 여전히 갈등과 고민의 해석 사이에서 반복되는 줄다리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자의 남편은 식구들을 남겨두고 2008년 겨울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와 둘이서 4개월 코스 세계일주 기도여행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즈음 남편이 미국의 집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어느 날 새벽에 한국에서 친정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저자의 엄마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으로 남편과 자식들 위해 사느라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분이셨다. 뿐만 아니라 딸만 여섯 둔 죄인 아닌 죄인으로 평생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주죽 들어 사신 분이다.
저자에게 있어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대상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데, 왜 그러니?”
이런 대답을 하는 엄마를 보며 절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래서 저자는 어릴 적부터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 앞에서 수도 없이 부르짖었던 이 외침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발인하는 날, 불행해 보였던 엄마의 인생을 그려보며 예배당 맨 뒤 구석에서 엄마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하나님께 여쭤본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주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딸아, 너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면 잘 산 인생이라고 생각하느냐?
온전히 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인생을 나는 잘 살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인생을 살다가 온 네 엄마의 삶을 나는 기쁘게 받노라.”
저자는 이때 관점의 대전환을 얻는다.
자신이 그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세상적 가치 속에 살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불쌍히 보았던 엄마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다시 보게 된다.
그것은 남편과 결혼 후 수많은 다툼과 갈등 속에서도 얻지 못하였던 하나의 해답이었다.
어쩌면 수없이 많이 보내셨을 주님의 신호를 저자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야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게 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열매를 맺었던 주인공은 저자가 아니라 찌질하게 산 것 같았던 엄마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엄마가 남기고간 상급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되자 주님은 이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네가 나를 왕과 신랑으로 고백함을 기쁘게 받는다. 그리고 이 고백을 네 남편에게도 해다오. 네 남편을 왕처럼, 예수님처럼 섬기지 않으련?”
어렵사리 순종하고 결단한 순간, 남편이 변한 것도 아닌데 남편이 얼마나 존귀하고 멋진 사람인지 새삼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자신 또한 훌륭한 남편의 아내라는 느낌을 얻게 되었다.
엄마의 죽음이 가져다준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즈음 남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아내를 얻기 위해 기도하던 열정으로 아내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한다. 아내를 변화시키는 대신 아내를 더욱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자신이 사랑할 능력조차 없음을 깨달은 남편은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남편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어느 간증집회에서 참석하게 되었고 거기서 ‘회개’라는 키워드를 붙잡는다. 저자는 곧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를 구하고, 자신이 그동안 두 번째 자리만 주님께 내어드렸음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것이 엄마의 죽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시기와 동시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은 저자를 남편을 첫째 자리에, 왕처럼 신랑 되신 예수님 섬기듯 섬기는 쪽으로 몰아가시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많은 갈등은 있었지만, 남편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돈 없이 하는 세계여행은 가족과 함께 하면서 점점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이 굳어져갔다. 그리고 저자의 남편을 향한 태도의 변화 이후 남편의 세계를 향한 선교적 사역은 수많은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고, 저자의 가족을 킹덤패밀리, 하나님나라왕족의 모범을 보이며 많은 사람을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하였다.
나는 이 책이 어떻게 아버지치유의 관점으로 읽힐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 아내로서 여성이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고 높일 때 일어나는 정체성의 변화이다.
선악과사건 이후 여자의 후손은 사탄의 원수가 되어 이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영원히 멸망 받게 된다는 창세기 3:15절을 재해석함으로 권위에 순종하는 불편한 마음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사탄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하는 일과, 사람이 다시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사용하신 하나님의 파트너는 다름 아닌 아담의 아내였다는데 착안한다.
남편이 전에는 아내의 말을 듣고 범죄 하였으나 이제 아내는 남편의 잃어버린 권세를 회복하게 하는데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바뀐 것이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를 향한 말일 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관계 아래 있는 사람 즉, 아버지와 자녀와의 문제도 동일하다.
두 번째, 틀어진 관계를 돌이키지 않는 것은 받은 상처 때문이기만, 그 상처는 서로가 만들어냈다는 점과 그냥 놔두기만 했다는 부작위적 범죄라는 점을 깨달았다.
말라기 4:6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교수님 수업시간에 상처는 놔두면 죄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저자 또한 남편과의 관계에서 돌이키지 않는 관계의 죄악 때문에 두려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세 번째는, 저자는 남자가 왕으로서 그리고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굳게 서서 믿음의 본을 보일 때 가정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세워짐을 깨닫는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야 할 놀라운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세대인 자녀의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미래가 있다는 깨달음이다.
남편은 기적적으로 베네수엘라에서 풋볼 경기 스타디움을 사용해 예배집회를 열 감격으로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무슨 이유인지 전화로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기도응답으로 집회를 열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들의 부탁을 먼저 들어주라는 것이다. 감격의 집회를 준비한 당사자인 남편은 아들을 보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막상 아빠를 보는 순간 허무하게도 별다른 반응 없이 놀이에만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아이의 아빠로서 줄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는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아버지, 아비를 잃은 고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대에게 자신의 믿음의 삶을 보여줄 아버지가 되었던 것에 남편은 만족하게 된다.
이것이 순종하는 아내를 통해 획득하게 되는 남편의 진정한 정체성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