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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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나 용역이나 다를 바 없어요.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니까요.” 

-존슨 너새니얼 포르투, 박광헌 역, <대한민국 무력정치사>, 135쪽, 현실문화, 2016, 용산 참사 피해자의 말 


1. 국민의 죽음 


2015년 11월 14일에 있던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농민 백남기는 물대포를 맞아 쓰러진다. 백농민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농민들은 지금은 직권이 정지된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쌀값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 시위에 나왔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국가의 폭력이었다. 차벽 앞으로 다가가던 백농민이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진 후에도 경찰은 15초 이상 물대포를 멈추지 않았고, 백농민은 곧장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외상성 뇌출혈을 진단받은 후 지난 해 9월 25일 사망했다. 백남기씨가 쓰러진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경찰은 단 한 차례의 공식적 사과도 않은 채 사망 이후엔 부검을 강요하며 망자와 유가족의 존엄성을 훼손하려 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의 공약 미이행에 대해 항의한 국민이 시위에 나갔고,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했다. 요약하자면 국가의 공권력 행사로 국민이 죽은 것이다. 헌법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장하지만 백농민에게 물대포를 쏜 국가는 국민의 권력으로 돌아가는 공동체라기보다 공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의 이름으로 실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국가 행위자’의 의지로 작동되는 장치이며 이 국가 앞에서 국민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다. 더 이상한 것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개인의 죽음 앞에 시민사회가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일까? 


인사동의 노점상 강제 철거에 관한 묘사로 시작하는 존슨 너새니얼 포르투의 책 <대한민국 무력정치사>는 이와 유사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용역들이 대낮에 민간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어째서 민주화와 자본주의화를, 달리 말해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고도의 능력을 갖춘 한국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가? 왜 시민들은 백일하의 폭력 앞에서도 무감하고 국가는 공적 사안에 경찰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2. 중산층의 성장과 민영화되는 공권력: 용역은 어떻게 국가를 비가시화 하는가 


“국가 형성은 정치 엘리트가 정당한 폭력(국가가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폭력)과 부당한 폭력의 경계를 되도록 분명히 규정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과정”(책 24쪽)이고, 이상적 정의에 의하면 국가란 경찰과 군대 등을 통해 폭력을 독점하는 조직으로서 한 국가 내에서 ‘합법적’인 폭력은 국가가 소유하고 행사하는 폭력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를 완벽히 실현하는 국가는 없다. 해방 후 권력이 공동(空洞) 상태였을 때 “국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이”인 국가 행위자와 “국가를 세우려는 이, 또는 국가 행위자가 되려고 힘쓰는 이”인 국가 추구자는 중첩되었고 국가 행위자가 되려던 국가 추구자는 ‘불법적’인 무장 세력과 종종 동맹을 맺었다. ‘정치 깡패’의 탄생이다. 서북청년단 같은 비국가집단이 경찰과 민간인의 충돌로 시작된 제주 4.3 사건에 깊이 개입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포르투에 의하면 국가의 능력이 낮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로, 국민을 통제할 능력을 합법적으로 갖추지 못한 국가(행위자/추구자)는 이렇게 비국가적 집단과 협력한다.


‘범죄자’의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벌을 내리는 것이 국가라는 것을 상기하면 이는 아이러니하지만 비국가적 폭력 집단과 국가는 계약 집행, 분쟁 해결, 재산권 보호 등을 행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둘의 협력은 불법과 합법의 차이를 제하자면 비슷한 일을 하는 두 집단 사이의 상부상조로 볼 수도 있다. 그럼 다시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국가의 능력이 낮았던 해방공간과 같은 혼란한 시기가 아닌,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춘 국가와 범죄 집단의 협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승만 이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이승만의 잔여 세력들을 경계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해야 했고, 71년 이후 박정희는 비국가적 세력보다는 국가적 기구의 이용을 명백히 더 선호한다. 한 경찰의 말대로 그 때는 “경찰이 깡패”(책 161쪽)였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유신헌법 등의 장치로 사실 상의 1인 통치를 정비해 놨으니 굳이 국가 외부에 손을 뻗을 동기가 없었다. 


변화는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 동안에 찾아온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강압적 체제를 유지하던 전두환은 포르투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을 “오해”하고 권위주의적 조치를 조금씩 해제한다. 이와 더불어 경제성장과 도시화로 인한 교육받은 중산층이 증가하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이 국내에서 개최되며 한국의 국가 행위자들은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 내외부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던 도시 중산층은 국가에 압력을 행사할만한 권력으로 국가 행위자의 국민에 대한 자율성(국가가 사회 세력에 대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저하시켰고, 국제 행사의 개최는 외부의 시선을 집중시킴으로써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일종의 감시로 작용한 것이다. 권위주의 철폐라는 목표를 공유한 노동계급, 학생, 중산층의 연대로 전두환은 결국 몰락하고 지금까지도 한국 민주주의의 정수로 상상되는 대통령 직선제 역시 이 시기의 개헌을 통해 정착한다.  


그러나 전두환 이후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됐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이 되어 ‘보통 사람’의 시대를 연 것은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닌 군부 출신의 노태우였다. 또한 87년 6.29선언 이후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은 이전의 연대가 무색하게도 중산층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노동자에겐 과격, 폭력과 같은 오명이 씌워진다. 이는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 안정과 이익에 노동자의 권익 상승이 위협적일 수 있음을 깨달으며 학생-중산층-노동자간의 연대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을 촉진한 요소에는 노동계급의 이해에 반하지만 중산층과 국가행위자의 이익에는 부합하는 도시미화와 재개발 사업이 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행위자와 비국가적 폭력 집단의 협력은 정착, 강화된다. ‘반민주적’인 지난 정권을 환기하는 국가적 폭력 수단의 활용이 어려워지자 국가는 공권력을 ‘민영화’한 것이다. ‘공권력 외주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민영화는 직접적으로 국가의 개입을 환기하지 않으면서도 중산층과 국가행위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실천할 수 있게 하며 언론을 비롯한 외부의 관심을 차단한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입을 비가시화 한다. 2009년 일어난 용산 참사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정당한 보상 없이 쫓겨나야 했던 세입자들의 투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언론과 시민의 관심은 경찰이 투입된 단 하루에 집중되었다.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상대적 관심 수준은 그것의 정치화 수준과 상관관계가 있”(책 143쪽)는 포르투의 주장을 적용하자면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경찰이 개입한 그 날 전까지의 투쟁을 ‘국가적’ 혹은 ‘정치적’이지 않은 일로 여긴 것이다.


3. 중산층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잠깐 용역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한국인에게 이제 용역은 ‘용역 깡패’로 불리기도 하며 강제 철거를 전문으로 하는, 경찰과 비슷한 차림이지만 경찰은 아니며 불법적 폭력을 휘두르고도 크게 벌 받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용역은 “물질적 재화의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일”을 의미하고, 같은 한자를 쓰는 용역경비업은 “국가 중요 시설이나 산업 시설, 공공시절, 주택, 창고, 주차장 따위를 경비하거나, 운반 중에 있는 현금, 유가 증권, 귀금속, 상품 따위의 도난과 화재를 방지하는 일을 대행하여 맡는 영업”이다. 아마 용역의 한 종류인 경비업이 변형된 것이 지금의 용역(깡패)일 것이다. 단어는 언중의 쓰임에 따라 생성, 변화, 소멸을 겪기 마련이니 사람들이 “강제 철거 전문 회사”(책 122쪽)를 용역이라고 계속 부른다면 언젠가는 국어사전에도 그렇게 등재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 용역이라는 말의 쓰임은 이들이 누구에 의해 고용되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법적인 서비스 제공에도 처벌받지 않는 초법성을 가린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백남기 농민은 국가 폭력의 피해자다. 포르투가 책에서 중점적으로 분석한 국가와 비국가적 집단의 협력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의 정수인 경찰에 의한 폭력이 원인이었다. 국가자율성의 감소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민간의 무력 집단과 협력해야 했지만 전두환이 내려간 지 28년 후인 2015년, 국가는 건물주도, 재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지자체도 아닌 중앙 정부, 다시 말해 국가행위자 자체를 겨냥하는 시위에 나온 시민에게 사망에 이르는 폭력을 가했다. 포르투의 분석을 따르자면 박근혜 정권의 권력은 시민의 ‘정치화된’ 죽음 이후에도 최순실과 관련한 일들이 밝혀지기 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국가가 가장 피하려는 중산층과 그 외의 집단의 연대, 즉 “국가가 범죄적 무력 시장에서 민간 행위자와 협력하게 압박하는 바로 그 기제”라는 “중산층 동원의 잠재성”(책 169쪽)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까지 이르러야 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되자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승리, 시민의 승리라며 기뻐했다. 기뻐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에겐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은 사안이 누군가에겐 생과 사를 가를 만한 일이었다. 중산층은 언제 동원되는가? 이에 대해선 포르투가 <대한민국 무력정치사>를 통해 답했다. 사안이 충분히 정치적일 때, 경찰과 같은 ‘국가’의 권력이 개입되고 갈등이 극에 이를 때. 그렇다면 중산층이 움직일 정도로 ‘중대하지 않은’ 사안에서 죽어가는, 죽고도 잊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중산층의 이익에 부합하지만 자기의 이익에는 반하는 일에 항의하는 하층계급의 저항권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이들이 용역 사용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사안을 중산층 동원 없이 정치화 할수 있을까? 포르투의 분석이 멈춘 지점에서 발생하는 의문이다.






현실문화에서 서포터즈 잉문예술덕후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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