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그의 가면무도회
허먼 멜빌 지음, 이용학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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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00주년인데 현지에서도 굉장히 조용한 분위기라 놀랐습니다. 그만큼 대중적인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고요, 모비딕밖에 조명받지 못하는 분위기 또한 너무 안타깝네요. 19세기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고, 지금 사회의 여러 화두에 누구보다도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작가인데 말입니다.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이번 사기꾼 출간은 개인적으로 너무 기쁩니다. 많은 분들이 멜빌의 매력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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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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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의 산은 시간과 공간, 생과 사, 육체와 정신, 의식과 무의식 등의 거대한 주제와 더불어 유럽의 역사와 학문 사상을 망라한 교양소설, 사회소설, 성장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사실은 토마스 만이 동성애자였으며 사후 내밀한 일기가 공개된 이후 그의 문학세계 해석에 대한 대변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철학적인 사유를 표면적인 주제로 내세운 게이 서브텍스트로 기능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동성간의 사랑은 물론이고 동성애자로서 겪는 성정체성 고뇌 및 세상과 운명을 향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체념이 흐르고 있다. 국내에도 2000년에 출간된 장성현의「고통과 영광 사이에서」라는 토마스 만 연구서가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동성애 모티프를 조망하고 있다.

 

 

  토마스 만이 동성애를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병', '불구', '죽음', '예술성' 등이다. 데뷔작인「키 작은 프리데만 씨」에서부터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동성애를 열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방책으로 그러한 상징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해 대표작인「토니오 크뢰거」와「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이르면 자신의 내밀한 주제인 동성애를 완전히 서브텍스트화하는 세련된 기법을 확립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대부분 병에 걸렸거나 죽음에 이르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는 그들의 성 정체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

 

 

  역시 제일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동성애 소설은「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호텔에서 본 치명적인 미소년에 빠져 전염병이 창궐한 베니스를 떠나지 않는 한 작가를 그리고 있는 그 소설은 역시 동성애자 감독인 루키노 비스콘티에 의해 탐미적인 영화사의 걸작으로 재탄생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쌍둥이 작품으로 기획된「마의 산」역시 동성애가 그 핵심 주제임을 염두하고 보면 작품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마의 산」또한 병과 죽음이 키워드가 아닌가? 그는 베니스 휴양중 폴란드 소년 Wladyslaw Moes 를 보고「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영감을 받았듯이 폐병걸린 부인을 따라 체류하게 된 다보스 요양원에서 환자들의 수상쩍은 연애 행각을 지켜보며 일종의 동성애 희극작품으로「마의 산」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집필과정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12년으로 길어지게 되고 방대한 양의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사상소설로 변화해갔다. 하지만 그 핵심은 역시 동성애이며 이 소설이 개인교양소설-사회소설, 빌둥스로만-반(反)빌둥스로만 등의 논의를 떠나 본질은 단순히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장편 연애소설이라고 보는 시각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토마스 만은 이 동성애 정체성을 핵심으로 한 이른바 연애소설에서「토니오 크뢰거」와「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죽음, 병, 불모성=동성애' 도식을 넘어서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관계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생산적인 접근법을 탐색한다. 하지만 작가 본인이 작품속에서 내린「마의 산」에 대한 결론은 '동성애는 (적어도 사회가 용인하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일종의 자학적인 '동성애 = 병, 죽음, 타락, 퇴폐' 도식은 어린 소년을 쫓아다니는 작가(영화에서는 작곡가로 변형)가 주인공인 베니스의 죽음에서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왜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관계가 중요한 것일까?「마의 산」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한스와 쇼샤 부인의 사랑이지만, 쇼샤 부인과의 사랑이 토마스 만 김나지움 재학시절 하숙집 아들이었던 빌리 팀페 즉 프리비슬라프 히페로 변주한 동성애라는 사실만이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쇼샤 부인 안에 히페가 은폐되어 있듯, 전체 소설 속에는 한스와 요아힘,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동성애적 관계가 작가의 솜씨로 아주 교묘하게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세템브리니(Settembrini)라는 말은 ‘베니스’ 방언의 은어로 9월(Settembre)에 성수기가 지난 베니스에 와서 헐값으로 소년들을 사는 동성애자를 뜻한다. 그리고 세템브리니 이름의 실존 모델 이탈리아 문필가 루이지 세템브리니(Luigi Settembrini) 역시 동성애자였으며 그 외에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키워드들이 한 가지 과녁 즉 동성애를 겨냥하고 있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논쟁 도중 언급되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라든가 한스가 세템브리니를 생각할 때 등장하는 '브루네토 라티니' 등 범람하는 각종 상징들과 은폐 및 수상쩍은 서술 기법은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데,「마의 산」은 토마스 만이 본인의 일기에서 직접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소설이라고 칭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관능과 에로틱의 대상은 쇼샤 부인뿐만 아니라 요아힘과 세템브리니이다.

루이지 세템브리니(1813~1877)

 

 

  특히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친구이자 연인으로 이 소설의 핵심인 밀봉된 연금술적 고양의 밀착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한스와 요아힘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의 동성 연인(요아힘이 군인이라는 사실과 한스가 죽은 요아힘 대신 전장에 나가는 것, 전쟁 장면에서 두 전우가 뒤엉켜 죽는 것 등에서는 테베 신성대 같은 그리스적 요소가 떠오른다)이라면 고대 그리스를 예찬하는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와 한스는 교육적 관계 즉 유명한 그리스의 연장자와 연소자 간 동성애라 할 수 있다. 토마스 만은 제우스와 가니메데, 아폴론과 히아킨토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루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를 잇는 전통의 고대 그리스적 동성애를 20세기 초반 유럽의 인문주의 교양소설이라는 형태로 변용한 것이다. 이는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작가와 독자의 정신적 합일, 작가와 독자의 연금술적 고양과도 일맥상통하며 소설의 결말부에 드러나듯이 서술자=세템브리니, 독자=한스 / 마의 산=세템브리니, 마의 산의 모험자=한스 라는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탐미적인 에피소드인 심장 엑스레이 촬영과 죽은 요아힘의 영혼을 불러내는 강령술 의식으로 대표되는 두 사촌의 관계만 해도 많은 분량과 암시를 지니고 있지만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관계도 중요하다. 소설을 읽어보면 이 세템브리니라는 인물에 들인 작가의 애정과 관심이 느껴지며 이들의 사랑을 얼마나 신중하고 암시적인 방식으로, 상징적이고 마술적인 관계로 나타내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한스는 베렌스에게 진찰을 받는 요아힘의 벗은 몸을 보며 '벨베데레의 아폴론'의 화신이라 칭송한다. 근대 미술사학을 정립한 중요한 미술사가이자 동성애자인 빙켈만은 현재 바티칸에 소장된 이 조각상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성취라고 평하였다.

 

 

 

 

<상권>


<제1장>


  한스 카스토르프는-이것이 그 젊은이의 이름이다- 칸막이가 된 작은 객실에서 회색 쿠션으로 된 좌석에 체크무늬 담요를 두르고 혼자 앉아 있었다.


▶다보스 요양원으로 떠나는 기차 안에서 한스는, 요아힘과 만나기도 전부터 체크무늬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는데 체크무늬는 소설 내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템브리니의 상징이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의 실제 모델인 샷츠알프(Schatzalp) 호텔, 현재도 숙박 가능하다. 이에 반해 베니스의 죽음의 실제 모델 그랑호텔 데 뱅(Grand Hotel des Bains)이 주거용으로 개조되어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요아힘은 금발이 많은 고향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짙은 갈색 유형의 남자였다. 크고 검은 눈 반듯하고 두꺼운 입술 위에 검은 콧수염이 난 그는 두 귀가 쫑긋 세워져 있지 않았더라면 잘생긴 용모라고 할 수 있었다.


▶한스의 두 애정의 대상 중 요아힘의 ‘검은 콧수염’에 대한 언급. 검은 콧수염 그리고 검은 눈은 또한 세템브리니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소설 중반부에 군인이 되기 위해 하산한 요아힘이 중병에 걸려 꿈을 포기하고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도 한스는 기쁨에 겨워 주체를 못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요아힘의 어머니는 한스의 어머니와 친자매가 아닌 이복 자매로 나타나는데, 한스와 요아힘의 친족적 연계를 희석시켜 동성애적인 뉘앙스를 짙게 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제3장>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리고 어제처럼 격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깊은 데서 터져 나와 온몸을 뒤흔드는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는 웃음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눈을 뜰 수 없었고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쉿!” 요아힘이 갑자기 제지했다. “조용히 해!” 그는 이렇게 속삭이며 하염없이 웃는 사촌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왼쪽 길에서 한 외국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검은 콧수염을 멋지게 말아 올리고 밝은 색깔의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갈색 머리칼의 우아한 신사였다. 그는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오더니 요아힘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의 인사말은 정확하고 발음도 좋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지팡이에 기댄 채 우아한 자세로 요아힘 앞에 멈추어 섰다.


▶재채기 기침과 같은 반사적 작용에 대한 슈퇴어 부인의 외설적인 묘사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한스와 요아힘이 제어가 안되는 웃음을 터트리며 나누는, 죽어가는 환자에 관한 이야기(죽음과 병은 이 소설에서 성애와 관능, 육욕을 상징한다) 도중 세템브리니가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세템브리니의 이름은 앞서 말했듯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을 부르짖던 문필가 루이지 세템브리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세템브리니의 외모는 이태리 작곡가 루제로 레온카발로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연구가들에 따르면 말아올린 검은 콧수염이나 그의 철학(삶에 대한 긍정 및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을 지향)을 보아 니체 또한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한다. 니체 역시 동성애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세템브리니가 한스의 스승인 것처럼, 니체 또한 토마스 만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사상적 스승이다. 그리고 압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저항정신을 뜻하는 체크무늬가 빈의 군주정에 대항하는 세템브리니의 상징인데, 스코틀랜드는 하권에서 세템브리니의 프리메이슨 이야기에 다시 등장한다.

 

루제로 레온카발로(1857~1919)

 

토마스 만은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어릿광대들) 에 영감을 받아 단편소설 어릿광대(Der Bajazzo)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서른과 마흔 사이쯤 될 것 같았다......교양 있는 얼굴 표정, 자유롭고 멋진 태도로 보아 그 외국인이 신사란 점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초라함과 우아함의 이러한 혼합, 거기에다가 검은 눈과 부드럽게 말아 올린 콧수염은, 성탄절 무렵에 고향의 뜰에서 연주를 하고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눈을 치켜뜨고 창밖으로 던져 주는 10페니히 동전을 받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를 내미는 외국의 어떤 유랑 악사를 퍼뜩 생각나게 했다. ‘손풍금장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요아힘이 벤치에서 일어나 쭈뼛쭈뼛하면서 소개한 그의 이름을 듣고서도 한스 카스토르프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촌 카스토르프입니다. 이분은 세템브리니씨야.” 한스 카스토르프는 웃음의 흔적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명랑한 표정으로 인사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탈리아인은 그냥 편히 앉아 있으라고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두 사람을 도로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은 편안한 자세로 이들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서서 사촌들, 특히 한스 카스토르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손풍금'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말인데, 토마스 만이 마의 산에서 숫자 7을 주요 모티프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세템브리니라는 인물을 니체에서 따왔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손풍금 연주자는 독일어로 씌어진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나그네에 수록된 곡이다. 소설 후반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겨울나그네의 대표 노래 보리수는 작품 속 세템브리니를 의미하는 또 하나의 표상이다. 외국의 어떤 유랑 악사는 토마스 만의 또 다른 동성애 소설인 베니스의 죽음에 등장하는 집시 악단을 연상시킨다.


[오오, 그대 광대들이여, 손풍금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그리 잘 아는가! 저 7일 동안에 실현되어야 할 일을, 또한 저 괴물이 나의 목구멍으로 들어가 내 목을 졸랐던 일을! 그러나 나는 그 머리를 물었다가 뱉어 버렸노라. 더욱이 그대들은 이미 이걸 가지고 칠현금에 맞춰 부를 노래를 지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지금 뱀의 머리를 물어뜯고 뱉느라 지쳤노라. 나 자신을 구원하다 병들어 여기 누워 있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환영과 수수께끼]

 

 

 

  “그렇지요, 당신은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품행방정한 사람이니까요.” 세템브리니가 말했다. “그래, 그래, 그래요.(so, so, so)” 그는 다시 한스 카스토르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s)’를 힘주어 세 번이나 같은 말을 했다. 그런 다음 혀를 입천장에 대고는 세 번 나지막하게 “쯧, 쯧,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똑같이 세 번 ‘이(s)’를 힘주어 “이봐, 이봐, 이봐요.(sieh, sieh, sieh)”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멍하게 될 정도로 신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눈에 활기를 띠고는 말을 계속 이어 갔다.


▶한스에게 매혹된 세템브리니는 이후로도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거나 멍하니 쳐다볼 때 “그래, 그래, 그래” 라고 말한다. 이 '세 번'의 아이디어는 가곡 보리수에도 등장한다.

 

 

 

   “농담이 심하다고요? 독설이 심하다는 말인 모양이군요. 네. 나는 독설이 좀 있는 편입니다.” 세템브리니가 말했다. “내가 이런 가련한 대상에 내 독설을 허비해야 하는 운명인가 해서 걱정이군요. 엔지니어 양반, 당신은 독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볼 때 독설이야말로 암흑과 추악함의 힘에 대항하는 이성의 가장 찬란한 무기거든요. 이보세요, 독설은 비판 정신이며 비판은 진보와 계몽의 원천입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페트라르카 이야기를 꺼내더니, 그를 ‘근대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었다.


▶페트라르카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베르길리우스였으며 죽을 때 베르길리우스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죽었다.

17~18세기 그랜드투어 시대에 나폴리의 베르길리우스 무덤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감상하는 것과 더불어 동성애자들의 소위 이탈리아 성지순례 코스였다.

 

 

 

  “우리 소위가 근무를 독촉하는군요. 그럼 이제 갑시다. 우리는 가는 길이 같습니다. ‘오른쪽으로, 권세가 막강한 저승의 왕의 성채로 나아가는 길’ 말입니다. 아,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 여러분, 그는 탁월무비합니다. 나는 진보를 믿습니다. 확실히 말입니다. 그는 어떤 근대인도 쓰지 못하는 형용사를 구사합니다.”


▶이 소설에서 한스는 단테에, 세템브리니는 마의 산이라는 지옥에서 그를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로 비유되는데, 세템브리니가 숭배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신곡에서 남색자들을 지옥에 떨어진 범죄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베르길리우스는 동성애자였다고 하며 그의 목가집에는 목동들의 동성애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고백한 책 '코리동'을 베르길리우스 목가집의 목동 이름에서 따왔으며,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또한 동성애자 남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의 제목을 베르길리우스의 목동 이름 '알렉시' 로 지었다.

 

▶토마스 만은 그의 작품 속에 실제 역사속의 동성애자 인물들을 언급하거나 서술함으로써 그의 소설의 동성애적 성격을 암시하는데 사전 정보가 없으면 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베니스의 죽음 아셴바흐의 걸작 프리드리히 대왕, 파우스트 박사에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에 대한 토론, 아드리안이 엘그레코와 닮았다는 묘사 등이 대표적이다.)

 

앙드레 지드가 동성애 성향을 낱낱이 드러내어 파문을 일으킨 코리동.

 

 

 

  여러분, 인문주의와 교육학의 역사적인 관계에는 양자 간에 심리학적인 관계가 있음을 입증해 줍니다. 인문주의자한테서 교육자의 직분을 앗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서 그걸 빼앗을 수도 없고요.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은 그에게만 전승되기 때문이지요. 한때 혼탁하고 인간에 적대적인 시기에는 주제넘게도 사제가 청년을 지도하는 일을 맡은 적도 있습니다. 그 후로는, 여러분, 새로운 교육자 유형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내 말을 이해해 주세요. 나는 인문주의 교육의 신봉자입니다.”


▶인문주의의 싹인 고대 그리스. 그 고대 그리스의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의 교육적인 동성애 관계.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남 간 동성애를 아름답다 찬양했으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성장과 배움이 가능하다 보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묘사되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교육적 동성애 관계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요아힘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그는 4층의 뒤쪽 한 작은 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아마 돈이 없는 모양이지?” 요아힘의 방도 자기 방과 아주 똑같아 보였다.


  “그래, 아마 돈이 없을 거야. 아니면 있다 해도 여기서 머물기에 빠듯한 정도겠지. 그의 아버지도 문필가였고, 그의 할아버지도 그랬던 모양이야.” 요아힘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그렇구나. 그럼 병은 심각한 편이야?” 한스 카스토르프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리 위험하지는 않지만 고질병이라 자꾸 재발하는 모양이야.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 되는 모양인데, 그동안 한번 퇴원했다가 곧 다시 돌아와야 했다고 그래.”


▶토마스 만의 대표작 토니오 크뢰거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병=동성애와 예술성 / 건강=이성애와 시민성 도식. 그는 마의 산에서도 히페를 닮은 쇼샤 부인을 병든 여자, 벌레먹은 여자라고 하며 병과 불모, 비생식을 동성애와 연결짓는다. 이 외에도 부덴브로크 가의 하노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예술적이고 병약한 소년으로 그려지는데, 결국 하노 또한 친구 카이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나이에 티푸스에 걸려 죽어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1959) 에 묘사된 하노와 카이의 사랑

 

 

 

  그의 맞은편, 노부인의 반대쪽에는 또 다른 아가씨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얼굴색이 환히 피어 있고 가슴이 불룩한 그녀는 예쁜 얼굴이었다. 밤색 머리칼은 보기 좋게 물결치고 있었고, 둥근 갈색의 눈은 앳되어 보였으며, 아름다운 손에는 조그만 루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어로 말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웃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잘 들어 보니 러시아어로만 말하는 그녀의 이름은 마루샤였다. 더군다나 그녀가 웃고 말할 때마다 요아힘이 엄숙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까는 것을 한스 카스토르프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이때 세템브리니가 측면 입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더니 콧수염을 휘날리며 식탁 끝에 위치한 자기 좌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한스 카스토르프의 자리 앞에서 비스듬한 방향에 있었다.


▶요아힘이 짝사랑하는 마루샤에 대한 서술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한스가 보이는 자기 좌석으로 걸어가는 세템브리니.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서른 살가량의 키다리 사나이가 갈색의 소형 피아노 앞에서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세 번 연달아 연주했다. 몇몇 여자들이 독촉을 해 대자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선율이 아름다운 그 곡을 네번째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건강상태는 어떤지요, 엔지니어 양반?”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손님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세템브리니가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여전히 그는 성긴 나사로 만든 회색 상의에다 체크무늬의 밝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미소 지으면서 말을 걸었으나, 한스 카스토르프는 치켜올라간 검은 콧수염을 기르고 우아하게 조롱하듯 입술을 비죽거리는 그를 다시 보자 그만 흥이 깨지고 말았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입을 헤 벌리고 충혈된 눈으로 그 이탈리아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그가 말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분이시군요. 저 위의 벤치에서... 개울가에서...”


▶저녁식사 후의 살롱 사교모임에서 ’결혼행진곡’이 연주될 때 세템브리니는 ‘건강 상태를 물어보며’ 한스에게 접근하고, 여기서도 '세 번' 이라는 어구가 묘하게 반복된다. 세템브리니와 한스의 결혼의 모티프는 이후에도 여러번 등장한다.

 

▶여기서 결혼행진곡을 연주한 남자는 아직까진 무명이지만 이후 베잘로 밝혀지는데, 꽃마차 행렬에서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세템브리니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다시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초점을 잃고 멍하게 바뀌었다. 오늘 아침처럼 그는 세 번 “그래, 그래, 그래요.”와 “이봐, 이봐, 이봐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롱하는 듯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첫 글자를 강하게 발음했다.


  “스물네 살이라고 했지요?” 좀 있다가 그가 물었다.


  “아닙니다, 스물여덟입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스물여덟 가지 생선 요리입니다! 일반적인 소스가 아니라 특수한 생선 소스 말입니다.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지요.”


  “엔지니어 양반.” 세템브리니는 성이 나서 면박을 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그만두십시오! 나는 그런 건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스물네 살이라고 그랬지요? 음… 그럼 또 한 가지 질문을 하거나, 원한다면 온당한 제안을 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이곳에 머무는 것이 당신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이곳이 당신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더 늙어 버리고 싶지 않다면 오늘 밤에라도 당장 짐을 꾸려, 내일 정기 급행 열차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어떨까요?”


▶슈퇴어 부인이 말하는 스물여덟 가지 생선 소스는 무엇을 의미할까? 요아힘이 임종을 맞는 방이 28호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28가지 생선 요리를 허튼소리로 치부하는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죽음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스에 대한 세템브리니의 관심과 애정. 세템브리니의 죽음에 대한 경고는 작품 후반부 보리수에 대한 경고에도 잘 드러나 있다.

 

 

 

  얼마쯤 마음의 안정을 찾자마자 그는 다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꿈이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앞에 서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세템브리니를 어깨로 떠밀려고 애를 썼다. 무성한 검은 콧수염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간 그는 우아하나 무정하고도 조롱하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를 무엇보다 언짢게 한 것은 바로 그 미소였다. “방해하지 마세요!” 그는 자신이 이 말을 하는 것을 꿈결에도 분명히 들었다. “저리 가세요! 당신은 손풍금장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해가 되니 이곳에서 가 주세요!” 하지만 세템브리니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선 채로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때 전혀 예기치 않게도 시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탁월한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시간이란 다름 아닌 무한정 체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를 속이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눈금이라고는 전혀 없는 수은주인 것이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러한 깨달음을 내일 사촌 요아힘에게 알려 줘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의사를 속이기 위해 오틸리에가 사용한 눈금이 없는 체온계는 소설 속 일반적인 성적 상징으로 사용된 체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란 다름아닌 무한정 체온계’라는 말에서는 마의 산의 주제의식까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세템브리니는 왜 체온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스에게 했으며 한스가 세템브리니의 꿈을 꾸며 이 무한정 체온계를 떠올린 까닭은? 그리고 이 꿈을 요아힘에게 알려주기로 하는 한스의 모습도 흥미롭다.

 

 

 

<제4장>


  여자들은 벌써 첫 번째 아침 식사 때에 빨기 쉬운 부드러운 블라우스를 입고 나타났고, 몇몇 여자들은 심지어 소매에 구멍이 숭숭 뚫린 레이스를 단 옷을 입고 나오기도 했는데, 이러한 차림이 모두에게 잘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슈퇴어 부인에게는 그러한 복장이 어울리지 않았다. 요양원의 남자들도 그런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게 각자 나름대로 외모에 신경을 썼다. 번쩍거리는 알파카 재킷과 아마포 양복도 등장했다. 그리고 푸른색 상의에 상앗빛 플란넬 바지를 받쳐 입은 요아힘 침센의 모습은 완전히 군인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젠장!” 그는 점심을 먹고 사촌들과 플라츠로 산책을 나가며 말했다. “햇볕이 따갑군요! 좀 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어요.” 말은 이렇게 그럴듯하게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성긴 나사로 만든 깃이 넓고 기다란 상의와 체크무늬 바지를 입고 다녔다. 아마 옷장에 갖고 있는 옷이 그것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서로를 향한 유혹과 관심 속에서 바뀌는 요양원 사람들의 복장과 몸의 드러냄 속에서 요아힘은 군인복장으로 절제와 신중을 표현한다. 그 와중에 세템브리니가 젠장!(Teufel=사전적 의미로 악마를 뜻함)이라며 하필이면 두 사촌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싶다는 발언을 하는 이유는 뭘까.

 

 

 

  “엔지니어 양반, 아니면 소위님. 여러분은 레오파르디를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불행한 시인으로 꼽추인데다 병약했지요. 원래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이지만 비참한 육체 때문에 늘 모욕을 당하고 비열한 아이러니의 대상이 되어 업신여김을 당했습니다. 그 시인의 영혼의 탄식은 사람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버렸습니다.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어서 세템브리니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때때로 눈을 감고는 아름다운 음절을 혀로 녹이듯 하며 이탈리아어로 암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해를 못하고 있군요. 고통스러운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점만은 마음으로 느껴 보십시오. 꼽추 시인 레오파르디는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여성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병약한' 레오파르디의 비참한 시를 ‘두 사촌 앞에서’ 아름다운 음절로 ‘혀로 녹이듯’ 낭송하는 세템브리니. 자코모 레오파르디 또한 동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시인이며, 그의 이름인 ‘자코모’는 하권에서 세템브리니가 요아힘을 부르는 애칭이다. 레오파르디는 피에트로 콜레타(Pietro Colletta)와 메이슨적 우정(masonic brotherhood)을 나누었으며, 절친한 친구 안토니오 라니에리(Antonio Ranieri)는 마스터 메이슨(Master Mason) 이었다고 하는데, 세템브리니가 프리메이슨 단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대목이다.

 

2017년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끈 동성애 소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도 레오파르디가 중요한 사랑의 매개체로 등장한다.

 

이탈리아에 산다면 당연히 단테와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를 읽는다고 믿는 아버지는 이야기 상대가 누구든 단테와 호메로스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고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필수, 레오파르디는 그 다음이다.

...

레오파르디의 시를 읽는데 절대로 번역이 불가능한 몇 구절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즉흥적으로 시작된 대화가 그렇게까지 깊어질 줄 둘 다 알지 못했다.

...

"레오파르디를 좋아해요?"

"응 많이."

"나도 레오파르디를 많이 좋아해요."

내가 좋다고 한 대상이 사실은 레오파르디가 아니었음을 그는 알았을까? 그는 어떨까? 그가 좋다고 한 대상이 정말 레오파르디였을까?

 

 

 

  “사촌이 사용할 담요를 몇 장 샀습니다.” 요아힘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안정 요양을 위해서요. 날씨가 보통 추워야지요. 몇 주 동안은 요양을 해야 하니까요.” 한스 카스토르프는 웃으며 말하고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아, 담요 말이지요. 안정 요양용으로요.” 세템브리니가 말했다. “그래, 그래, 그래요, 그럼, 그럼, 그럼요. 정말 실험 채택이군요!”

 

  “정말 대단하군!” 한스 카스토르프는 요아힘과 함께 승강기를 타고 가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 교육자야. 요전에 이미 자신에게 그런 피가 흐른다고 말했지. 그 사람 앞에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자칫하다간 장황한 설교를 듣게 될 테니 말이야. 하지만 그가 터득한 말하는 법을 들어 볼 만해. 말마다 그의 입에서 둥글둥글하고 아주 맛있게 튀어나오거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늘 갓 구운 빵이 생각난단 말이야…… 그는 타고난 반항아야. 나는 그를 보고 첫눈에 알아차렸지. 그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 딴지를 거는 거야. 그리고 이런 태도에는 늘 무언가 황폐한 면이 있어. 이는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


▶’그런 피’, ‘타고난 반항아’, ‘첫눈에 알아차렸지’, ‘황폐한 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아주 은밀한 세템브리니의 동성애 암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내부가 좀체 막기 어려운 붕괴 과정에 처해 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가벼운 미열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을 조금도 혼란에 빠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 모든 것에 특이성을 고조시키고, 어떤 정신적인 매력까지 부여해 주었다. 빨간머리의 그리스 아가씨는 스케치북에다 라스무센 씨를 그렸지만, 그림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틈새가 벌어진 넓은 치아를 보이고 웃으면서 몸을 이쪽저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게서 스케치북을 빼앗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헤르미네 클레펠트는 눈을 반만 뜨고 계단에 앉아 돌돌 만 신문으로 음악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알빈씨는 들꽃 다발을 그녀의 블라우스에 꽂아 주었다. 입술이 두꺼운 젊은이는 잘로몬 부인의 발치에 앉아 고개를 돌리고 그녀와 잡담을 나누었고, 머리숱이 적은 피아니스트는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의 목덜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의사들도 나와서 요양객들 사이에 끼었다. 베렌스 고문관은 거의 모든 식탁에 붙임성 있게 재치있는 농담을 하여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배 지나간 자국처럼 명랑한 웃음이 터졌다. 의사들이 젊은이들이 있는 돌계단으로 내려가자, 거기 있던 아가씨들이 몸을 비틀고 야릇한 미소를 던지며 크로코프스키 박사 주위로 몰려들었다.


  얼마쯤 있으니 세템브리니도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산보용 지팡이를 짚으며 식당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나사로 만든 상의에다 누르스름한 바지를 입은 그는 우아하고 냉정하며 비판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사촌들의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 브라보!”하고 외치면서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맥주, 담배, 그리고 음악.” 그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네들의 조국을 다 가지고 있군요! 엔지니어 양반, 당신은 민족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모양이군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아 보여 내 마음도 기쁘구려. 당신의 조화로운 마음 상태를 나도 맛 좀 봅시다!”


  그를 보자 한스 카스토르프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 이탈리아인이 눈에 보이는 순간 벌써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요양음악 시간은 요양원 투숙객들의 플러팅 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요양음악 시간에 세템브리니가 phallic symbol인 지팡이를 갖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두 사촌 옆에 앉는 사실이 수상하다.

 

 

 

  세템브리니는 이런 식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스 카스토르프도 그의 말을 경청했지만, 세템브리니의 말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그것은 우선 피곤하기도 하고, 또한 저 아래 돌계단에서 경쾌한 젊은이들이 즐겁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정신 집중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제대로 본 것이었을까, 아니면 대체 어찌된 일일까? 맥 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가 외알 안경을 낀 소년의 운동복 바지 무릎 끈에 단추를 꿰매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녀는 천식 때문에 헐떡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고, 반면에 소년은 기침을 하면서 소금 숟가락 같은 손톱을 입에 갖다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들은 둘다 병에 걸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는 이 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이성 교제를 잘 보여 주었다. 이때 경쾌한 폴카 음악이 연주되었다.


▶젊은이들의 특이한 이성교제에 대한 서술, 그리고 젊은이들이 경쾌하게 떠들어대며 교제하는 그런 시간에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접근하여 정신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한스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녀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던데요.” 그가 말했다. “내가 본 바로는 결혼반지를 끼지 않았어요. 대체 어찌된 일인가요? 그녀가 결혼했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여선생은 궁지에 몰려 무언가 변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당황했다. 그녀는 쇼샤 부인에 관련된 사항에는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그토록 막중한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반지 말인가요? 그래요, 끼고 있지 않아요. 나도 봤는데 안 끼고 있더군요. 어쩌면 반지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고, 반지를 끼면 손이 넓어 보여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또는 결혼반지를 끼는 것을 고루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요. 그런 매끄러운 고리를 말입니다. 아마 그녀가 손을 내미는 신사로 하여금 자신이 혼인 관계에 묶여 있음을 알릴 필요성도 느끼지 않을 거고, 그럴 기분도 들지 않을 거에요.”


  여교사가 이렇게 열을 올리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러시아 여자’ 쇼샤의 결혼 반지에 관한 엥겔하르트 양과 한스의 대화. 이 러시아 여자의 결혼 반지는 소설 결말부에 세템브리니의 결혼 반지로 변주되어 등장한다.

 

 

 

제4장 중- 커져가는 불안, 두분의 할아버지와 해질녘의 뱃놀이에 관하여


▶제2장에서 한스의 조부와 그의 가계에 한 챕터를 할애한 토마스 만은 세템브리니의 가계 서술에 역시 챕터 하나를 할애하는데, ‘이 북국과 남국의 두 분의 정반대의 할아버지들’에게서는 토마스 만 본인의 정체성과(시민적인 아버지와 예술적인 어머니) 토니오 크뢰거의 주제가 변주되어 나타나며, 한스는 본인이 두 할아버지의 사이에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리고 세템브리니의 독일 혈통 할머니를 통해 세템브리니와 한스의 상징적인 혈연의 관계까지 드러난다.

 

 

 

  그리하여 그는 세템브리니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산 절벽의 벤치로 요양 산보를 할 때나, 어쩌다 플라츠로 내려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모든 것을 다행으로 알고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또는 다른 기회에, 이를테면 식사를 마친 후 예의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세템브리니가 가장 먼저 일어나, 입에 이쑤시개를 물고 일곱 개의 식탁이 있는 식당을 통과해 온갖 규정과 관습을 무시한 채 사촌들이 있는 식탁에 가서 뭘 좀 참관해 볼까 하고 어슬렁거리며 걸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발을 꼬고는 품위 있는 자세로 서서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제스처를 써 가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또는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어떤 때는 한스 카스토르프와 여교사 사이의 자리에, 또 다른 대는 한스 카스토르프와 로빈슨 양 사이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은 먹지 않고 내버려두고 온 듯한 후식을 아홉 명의 식탁 동료들이 먹어 치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온갖 규정과 관습을 무시한 채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나쳐 이쑤시개를 물고 한스와 다른 여자 사이에 끼어들어 앉는 세템브리니. 이쑤시개(Zahnstocher)는 노골적인 phallic symbol이다.

 

 

 

  로도비코 세템브리니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산책 도중이나 저녁의 사교 모임 때, 또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당을 떠나, 여종업원이 식당을 치우고 한스 카스토르프가 3주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맛이 다시 나기 시작한 마리아 만치니를 피우는 동안, 세명만 식탁에 남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의 깊게 음미하며 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순순히 감화를 받으려는 자세로 그는 이탈리아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른 요양원 투숙객들과 있을 때는 우스꽝스럽고 실없는 이야기, 특히 다른 사람들의 소문과 추문만 늘어놓는 세템브리니가 두 사촌에게는 진지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스는 성적인 상징 마리아 만치니를 피우면서 묘한 느낌을 받으며 세템브리니의 이야기를 경청.

 

 

 

  로도비코 세템브리니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의 애국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민족의 동포이자 전우이기도 했다. 토리노에서 감행한 습격 시도와 국가 전복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여기에 말과 행동으로 가담한 할아버지는 제후 메테르니히의 추격자를 간신히 따돌릴 수 있었다. 그 뒤 망명 기간을 이용하여 스페인에서는 헌법 제정을 위해,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피를 흘렸다. 바로 이 그리스에서 로도비코의 아버지가 태어났다. 이 때문에 그는 그토록 위대한 인문주의자이자 고전적 고대의 애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독일 혈통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세템브리니와 그리스의 연관성. 이 그리스적 요소는 물병, 독수리, 엘레우시스 비의 등 다른 대목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카르두치가 단테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대도시의 시민인 카르두치는 금욕과 세계 부정에 대항해 혁명적이고 세계 개혁적인 실행력을 옹호했다는 단테를 찬양했다. 시인 단테가 ‘우아하고 경건한 부인’ 이라는 이름으로 경의를 표한 쪽은 병약하고 비교적인 그림자 같은 존재인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오히려 시에서 현세적인 인식과 실천적인 평생 업적의 원칙을 구현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스 카스토르프는 단테에 관해, 그것도 최상의 소식통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중개자가 허풍쟁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지만, 좌우간 단테가 깨인 대도시 시민이었다는 점은 경청할 만 했다. 그리고 그는 세템브리니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도 계속 귀담아 들었다. 그는 로도비코의 손자인 자신이, 말하자면 문사, 즉 자유로운 문필가가 되면서 자신의 직계 조상의 경향들, 즉 할아버지의 국가 시민적인 경향과 아버지의 인문주의적인 경향이 하나로 합일되었다고 설명했다. 문학이란 사실 인문주의와 정치의 결합에 다름 아니며, 그러니까 인문주의가 어느덧 정치가 되고, 정치가 인문주의가 될 때 문학이 한층 더 무리 없이 완성된다. 이 대목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귀를 쫑긋 세우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기서 병약하고 밀교적인 그림자를 가진 베아트리체는 쇼샤를 상징하고 현세적인 인식과 실천적인 평생 업적의 원칙(고통의 백과사전 문학부문 편찬)을 상징하는 ‘우아’하고 경건한 부인은 세템브리니를 상징한다. 자기 자신의 혈연적 내력과 ‘합일’ ‘결합’ 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세템브리니 본인이 한스와 결합하고자 하는 의지를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결혼 모티프)

 

 

 

  한스 카스토르프는 비스듬한 방향으로 옆 식탁의 끝에 앉은 세템브리니의 등 너머로 일류 러시아인 석을 바라볼 때면 매일 그러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그녀가 말하면서 머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새삼스레 둥그스름한 그녀의 목덜미며 축 늘어진 등의 자세를 지켜보았다. 쇼샤 부인쪽에서는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한 번도 식당을 둘러보지 않았다. 하지만 디저트가 끝나고, 이류 러시아인 석이 있는 식당의 오른편 좁은 벽에 걸린 사슬 달린 추시계가 두 시를 치자 불가사의하게도 한스 카스토르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 일어났다. 시계가 한 번, 두 번 울리면서 두 시를 알리자 그 우아한 환자는 서서히 머리와 상체를 약간 돌리고는 어깨 너머로 분명하고도 노골적으로 한스 카스토르프의 식탁 쪽을 바라보았다.


▶소설에서 쇼샤 부인에 대한 서술에는 대부분 세템브리니가 끼어든다. 일요일 우편수령이나 사육제날 밤 등. 여기서도 쇼샤 부인과의 추파 던지기는 세템브리니의 등 너머로 이루어진다.

 

 

 

<제5장>


  한스 카스토르프가 침대에 누워 지낸 지 10일이나 12일쯤 되었을 어느 날 해질녘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묻는 듯한 어조로 들어오라고 하자 로도비코 세템브리니가 문지방에 출현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방 안이 눈부시게 환해졌다. 방문자가 들어오면서 문도 채 닫기 전에 가장 먼저 천장의 등을 켰기 때문이다. 그러자 천장과 가구의 흰색에 반사되어 방 안이 순식간에 어른어른 떨리면서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이 이탈리아인은 요즈음 한스 카스토르프가 요양객들 중에서 명시적으로, 말하자면 요아힘한테 안부를 물어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 세템브리니가 갑자기 환해진 방 안에 서 있었다. 팔꿈치를 괴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한스 카스토르프는 누군가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그인 줄 알아채고 얼굴을 붉혔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템브리니는 접힌 조금 낡은 칼라에 소매를 많이 접은 두꺼운 상의와 체크무늬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식사하고 오는 길이라서 그는 자신의 습관대로 입술 사이에 나무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다. 콧수염이 멋지게 말려 올라간 입가는 익히 잘 아는 우아하고 냉정하며 비판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엔지니어 양반! 이렇게 불쑥 찾아와도 괜찮겠지요? 불빛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내 마음대로 이러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조그만 손을 힘차게 천장의 전등 쪽으로 올렸다.


▶챕터 하나를 통째로 할애하여 서술되는, 세템브리니가 한스의 방에 불을 켜고 들어오는 사건은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상징하는 장면이지만, 심층적인 측면에서 한스와 세템브리니가 방에서 나누는 애정어린 둘만의 대화는 다른 이들과는 나누지 않는 가족관계와 직장문제 등 온갖 사적인 이야기를 포함해 상당히 농밀하게 다뤄지고 있다. (반복되는 이쑤시개 이미지, 석관의 외설적인 상징에 대한 세템브리니의 언급) 요양원에 새로 온 남자에 대한 관심 역시 미묘한 동성애적 기류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이 ‘영원히 계속되는 수프와 갑자기 밝아지는 방’ 이라는 소제목 그리고 ‘정오의 수프’ 는 마의 산과 같은 해인 1924년 출판된 멜빌의 유고작 빌리 버드에서 점심식사 때의 수프가 성적인 메타포로 사용되는 것과 우연의 일치를 이룬다. 역시 동성애적 뉘앙스가 넘쳐나는 빌리버드는 토마스 만이 가장 좋아한 소설이었다.

세템브리니의 한스 방 기습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변곡점으로 볼 수 있다.

 

 

 

  세템브리니에 관해 말하면, 그러니까 한스 카스토르프는 직접 그에 대해 요아힘에게 물어 보았으며, 그가 ‘이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뭐에 대해? “내가 이렇게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야.” 사실 세템브리니는 아주 간결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날 바로 요아힘에게 다가와 그 손님의 소재에 대해 물었다.


▶한스는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실에 대해 세템브리니의 생각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한스가 사라지자마자 그의 소재에 관심을 보이는 세템브리니이다.

 

 

 

  “규칙적으로 체온은 재나요?”


  “네, 하루에 여섯 번 재지요. 이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하, 용서하세요. 당신이 우리의 식당을 레펙토리움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웃지 않을 수 없군요. 수도원에서 그런 표현을 쓰지 않나요? 여기도 정말 그런 점이 있군요. 나는 아직 수도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여기와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규칙도 벌써 달달 외우면서 아주 엄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수도사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수련 기간은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서원도 마친 셈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또한 당신은 벌써 ‘우리의 식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남성으로서의 당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신은 수도사보다는 오히려 젊은 수녀가 생각나게 합니다. 머리를 막 잘라버린, 순교자의 커다란 눈망울을 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 말입니다. 나는 전에 가끔 그런 어린 양을 볼 때마다, 그때마다 어떤 감상적인 기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그래, 그래요, 당신의 사촌이 죄다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러니까 떠나기 직전에 진찰을 받았다고요.”


▶소설 속 성적 욕망을 상징하는 체온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세템브리니에게 감상적인 기분을 느끼게 하는 젊은 수녀, ‘순결한 신부(Braeutchen)’로 나타나는 한스의 모습과 결혼의 모티프.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그렇게 잘하십니까, 세템브리니 씨.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조형적일 수 없습니다. 무한정 체온계를 받았고, 호수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는 그 아가씨 이야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종종 몰래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군요. 확실히 배움에는 끝이 없나 봅니다. 여하튼 나 자신의 경우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한스는 세템브리니를 통해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탈과 방종, 성적인 세계에 대해 깨닫게 된다.

 

 

 

  “제대로 된 진단은 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뢴트겐 투시와 사진 촬영을 한 후에야 비로소 확실해질 겁니다. 그때 가면 정확한 결과를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기에 어떤 젊은 화폐 연구가가 있었는데, 열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에게 열이 있었기 때문에 사진 감광판에 또렷이 폐 공동이 보였습니다. 심지어 거기에서 소리까지 들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폐결핵 치료를 받았는데, 그 일로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몸을 해부해 본 결과 폐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무슨 구균인가 하는 것 때문에 사망했답니다.”


  “잠깐, 들어보세요, 세템브리니 씨. 벌써부터 해부 이야기를 하다니요! 아직 나의 진도가 그 정도까지는 나간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엔지니어 양반, 당신은 악동 끼가 있군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아프기는 한가요?”


  “그래요, 유감스럽게도 상당히 아픕니다.” 세템브리니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머리를 수그렸다.


▶해부와 뢴트겐 투시는 요아힘의 엑스레이 촬영이나 쇼샤 부인의 폐 사진에서 보듯 소설 속 성적인 은유를 나타내는데, 세템브리니와 한스 사이에서 미묘한 성적 긴장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유감스럽게도 상당히 반해있다.’

 

 

 

  “여기서는 날이면 날마다 보거든요. 이곳에 올라오는 젊은 사람은(그리고 이곳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거의 젊은이들뿐입니다) 늦어도 반년만 지나면 시시덕거리는 것과 체온 말고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늦어도 일년만 지나면 다른 생각은 전혀 품을 수 없게 되고, 다른 생각은 죄다 ‘잔혹하다’고,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됐으며 무지한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당신은 이야기를 좋아하니 내가 해 줄 수 있습니다. 이곳에 11개월 있었던 아들이자 남편 이야기인데, 나도 그를 알고 있었지요. 그는 당신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좀 더 많았을지도 모르지요. 의사는 그가 많이 호전된 것으로 생각하고 시험 삼아 퇴원시키고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려보냈어요. 그의 경우는 삼촌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내였지요. 그는 하루 종일 체온계를 입에 물고 누워 지냈을 뿐 다른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그걸 몰라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알려면 저 위에서 살아 보아야 해요. 이 아래에는 기본 개념이 결여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이렇게 결정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다시 올라가도록 하렴. 우리는 너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구나.’ 그래서 그는 다시 이곳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기에 한번 살아 본 사람이면 이곳을 ‘고향’이라 부른답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기본 개념’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녀는 남편이 고향에서 뜻이 맞는 ‘기본 개념’을 가진 동지를 만나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시시덕거리는 것과 ‘체온’에 빠진 한 남자가 요양원을 잊지 못해 온종일 ‘체온계(phallic symbol)’을 입에 물고 여성인 어머니와 아내에게 ‘당신들은 그걸 몰라요’라고 말하고는 요양원으로 돌아와버린다. 그 젊은 아내에게 결여된 ‘기본 개념’이란 무엇이며 요양원에서 뜻이 맞는 ‘기본 개념을 가진 동지’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게다가 나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천애고아였지요.”


  세템브리니는 머리, 어깨 그리고 두 손을 똑같이 움직이며, 쾌활하고 우아하게 ‘자, 그래서? 그다음은?’하고 묻는 듯한 동작을 해 보였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당신은 문필가시고 문학가요. 당신은 이런 점을 잘 이해하고 통찰하실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토록 둔감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잔혹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요. 돌아다니고, 웃으며, 돈을 벌어 배부르게 먹는 보통 사람들의 잔혹성 말입니다. 내가 올바로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템브리니는 허리를 구부렸다. “당신이 하고싶은 말은 일찍부터 죽음을 여러번 대면한 사람은 분별없는 세상 사람들의 냉혹함과 거친 행동에 대해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냉소적 태도에 화가 나고 예민해진다, 이거지요.” 그가 상세하게 설명했다.


  “바로 그겁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진심으로 감격하며 외쳤다. “조금도 흠결이 없이 완전무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죽음과의 대면!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문학가니까...”


  세템브리니는 그를 향해 손을 내뻗으며, 머리를 옆으로 갸우뚱하고 두 눈을 감았다. 이는 자신의 말을 잠자코 들어 달라며 제지하고 부탁하는 매우 멋지고도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벌써 진작부터 말을 멈추고, 다소 당황하여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는 이런 자세로 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검은 눈을-손풍금장이의 눈을-다시 활짝 뜨고 말을 계속했다.


  “들어 보십시오, 내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엔지니어 양반, 아무쪼록 마음에 새겨 두기 바랍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유일하게 건강하고 고귀한 방식은- 분명히 덧붙여 말하겠습니다. 게다가 유일하게 종교적인 방식은, 말하자면 그것을 삶의 일부분이자 부속물, 성스러운 조건으로 파악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고귀하고, 합리적이고, 종교적인 것과는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삶과 떼어 놓고 대립시키며, 심지어 역겹게도 삶에 맞서 죽음을 드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요양원=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한스는 본인이 천애고아라는 얘기를 한다. 이와 동시에 한스를 문병온 세템브리니의 부드럽고 온정적인 태도를 볼 때 세템브리니가 요양원이라는 고향의 한스의 상징적 아버지임이 드러난다.(한스가 요아힘과 함께 요양원 환자들의 방에 문병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세템브리니가 한스의 방에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동성애=죽음, 예술’ 이라는 토마스 만의 기호 체계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의 고뇌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토록 둔감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잔혹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요. 돌아다니고, 웃으며, 돈을 벌어 배부르게 먹는 보통 사람들의 잔혹성,’


‘일찍부터 죽음을 여러번 대면한 사람은 분별없는 세상 사람들의 냉혹함과 거친 행동에 대해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냉소적 태도에 화가 나고 예민해진다,’

 

동성애자의 고통스런 성장 체험을 그린 토마스 만의 대표작 토니오 크뢰거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모든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일까? 저 선량한 학생들과 건전한 평범성을 갖춘 학생들을 좀 봐라!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 정상적이라고 느낄 것이고 세상 사람들과 진정으로 일체감을 느낄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된 것이지? 이 모든게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그 외에도 부덴브로크 가의 소년커플 하노와 카이를 보면 하노는 음악에, 카이는 문학에 재능이 있는 예술적인 소년들로 그려지는데 이들 또한 동급생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학급 내의 아웃사이더로서 생활한다. 결국 하노는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죽는다.

 

'이리저리 거니는 카이와 하노 주위에서 시끄럽게 날뛰는 친구들은 씩씩하고 다소 버릇없는 아이들이었다. ... 하노와 카이가 나누는 대화는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가득 채우는 시끌벅적한 소리 가운데 낯설고 특이한 것이었다. 둘의 우정은 오래전부터 전교에 좍 퍼져 있었다. 선생들은 거기서 불순하고 반항적인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못마땅해하면서도 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본질을 간파할 능력이 없었던 동료들은 당황해하며 일종의 반감을 품고 그들을 인정하는 데 익숙해졌다. 또 이 두 동료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들을 무법자나 이상야릇한 괴짜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졌다. ... 카이가 교장에게 부여한 이름은 그 자신과 하노만 사용했다. 그들은 동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늘 그렇듯이 냉랭한 시선으로 멍하니 쳐다볼까 봐 남들 앞에서는 그 호칭을 삼갔다. 아니, 그들 둘이 동료들과 통하는 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

 

한스는 문필가(예술가=동성애자)인 세템브리니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줄 거라 여기고 세템브리니의 조언을 구한다. 물론 세템브리니도 동성애자로서의 슬픔을 잘 알고 있지만, 동성애=죽음(사회적 매장) 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삶의 일부분이자 부속물, 성스러운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새롭고 건강하며 교육적인 동성애 관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주의적 인간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흔히 알려진 '시민성과 예술성 두 세계 사이의 방황' 라는 주제 이전에 이성애라는 현실과 동성애라는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이의 고뇌를 그린 소설이다.

 

 

 

  세템브리니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굽히고는, 두 발을 바닥에 가지런히 대고, 양손은 무릎 사이에 포갠 채, 머리도 마찬가지로 약간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었다. “앞으로도 내가 당신이 연습과 실험을 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 위험한 견해에 고정되어 버릴 염려가 있으면 내가 당신을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해도 될까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물론이지요, 세템브리니 씨.”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황해서 반쯤 반항적인 태도를 거두어들이고, 이불을 두드리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갑자기 친절한 표정으로 손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렸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요.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말하자면 나에게 그럴 만한...”


  “완전 무료입니다.” 세템브리니는 일어나면서 베렌스의 말을 인용했다. “어떻게 인색하게 굴 수 있겠어요.” 이들은 웃었다. 이때 바깥의 이중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다음 순간 안쪽 문도 삐그덕 하고 열렸다. 저녁 모임에서 돌아온 요아힘이었다. 이탈리아인이 있는 것을 보자 한스 카스토르프가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커멓게 탄 그의 얼굴이 한층 더 검붉어졌다.


▶한스의 방에서 벌어지는 한스 요아힘 그리고 세템브리니 간의 묘하고 에로틱한 삼각관계는, 요양원을 떠났지만 ‘아테네’ 남자를 잊지 못해 돌아와 그의 방에 몰래 잠입한 아미 뇔팅과 그녀를 미행한 그녀의 여자친구 그리고 아테네 남자의 기이한 삼각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세템브리니씨는 나의 시간을 의미심장하게 채워 주었어. 행실이 바른 사람이라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겠지. 이제 너도 이곳에 와서 가짜 브리지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세템브리니 씨의 말에 더 자주 귀를 기울이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도움을 얻기 위해, 좀 더 오랫동안 열이 내려가지 않아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야. 결국 나도 무한정 체온계를 사용하여 속임수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거듭 말하지만 당신은 악동이군요, 엔지니어 양반.” 이탈리아인이 말했다.


▶세템브리니와 같이 있기 위해 성적인 상징 체온계를 사용하여 요양원에 계속 있겠다는 한스의 발언.

 

 

 

  사실 이러한 변화된 삶의 국면에 아주 특별하고도 의도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요아힘은 침대에서 일어난 사촌의 자리에 몇 송이의 꽃으로 장식하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 동료들의 인사는 그리 떠들썩하지 않았고, 3주일 만에 얼굴을 맞댄 지금이나 예전에 세 시간 전에 헤어지고 다시 만났을 때나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었다. 하물며 그의 식탁 동료들조차 그의 칩거 생활이 끝난 것에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으니 다른 식탁 사람들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리 있겠는가? 다른 곳에서는 문자 그대로 아무도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템브리니만은 예외로 그는 식사가 끝나자 다가와서 익살스럽고도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물론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외에도 또 다른 예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그 생각이 맞았는지 판단하지 않고 유보하기로 하자. 그는 클라브디아 쇼샤가 자신이 다시 나타난 것을 눈치 챘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녀가 늘 그렇듯이 뒤늦게 나타나서는 유리문을 쾅 닫은 뒤에 가느다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아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주 전에 그가 진찰을 받으러 가기 전에 그랬듯이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또 한 번 어깨 너머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돌아보는 동작이 숨김이 없고 노골적이었다.


▶한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인물들: ‘침대를 꽃으로 장식하는’ 요아힘, 노골적인 시선을 교환하는 쇼샤, 그리고 다정한 세템브리니.

 

 

 

  여기서 한스 카스토르프의 일류 러시아인 석에 앉은 여자 환자와의 내적 관계, 중키이고 나긋나긋하게 걸어가는 키르키스인의 눈을 한 여인에 대한 그의 관능과 그의 겸허한 정신의 관심, 다시 말해서 그의 연정은 그가 칩거 생활을 하는 동안 더욱 깊어만 갔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하겠다. 그가 이른 아침에 눈을 뜨고 서서히 밝아 오는 방을 바라보고 있을 때나, 또는 저녁에 짙어가는 황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세템브리니가 느닷없이 그의 방에 들어와 불을 켰을 때도 그 모습이 눈앞에 또렷이 아른거렸기 때문에 그 인문주의자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혔던 것이다).


▶쇼샤 부인과 세템브리니의 오버랩.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그럼 이제 가서 눕도록 합시다, 엔지니어 양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지요.”


  이들은 34호실 앞에서 헤어졌다.


  “이제 옥상으로 올라가세요, 세템브리니 씨. 혼자 누워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같이 누워 있는게 더 즐겁겠지요. 서로 환담을 나눕니까? 같이 안정 요양을 하는 사람들은 재미있는 사람들인가요?”


  “아, 다들 파르티아인과 스키타이인뿐입니다!”


  “러시아인들인가요?”


  “그렇습니다, 러시아 여자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세템브리니의 입 언저리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자, 그럼 안녕히 가세요, 엔지니어 양반!”


  그것은 분명 저의가 있는 말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템브리니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현재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일까? 분명 그는 교육자답게 탐색해서 한스 카스토르프의 시선 방향을 추적한 모양이었다.


▶세템브리니가 갖는 쇼샤부인에 대한 질투심과 적개심.

 

 

 

  “당신도 공문서를 기다리는 모양이지요, 엔지니어 양반?”


  이렇게 말을 걸어 오는 자는 한 명의 방해자밖에는 없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세템브리니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것은 우아한 인문주의적인 미소였다. 옛날 개울가 벤치 옆에서 신참과 처음 대면할 때도 그는 그런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자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시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혔다. 꿈속에서는 ‘그 손풍금장이’를 여기 계시면 방해가 됩니다’라고 하면서 번번이 밀어 내려고 했지만, 깨어 있을 때는 그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이런 미소를 보고 그는 수치스럽고 흥이 깨어지는 기분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마침 잘 왔다는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요일 우편물 수령시간- 처음 만났을 때의 미소를 보이며 접근하여 한스와 쇼샤의 만남 방해.

 

 

 

  “당신의 슬라이드 필름은 받았나요?”


  “받았지요!” 한스 카스토르프는 중요한 일인 듯이 확인했다. “벌써 얼마 전에요.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지갑에 넣어 다니는군요. 말하자면 여권이나 회원증 같은 신분증으로 말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어디, 좀 보여주세요.” 그러고서 그는 검은 종이테이프로 테두리를 두른 조그만 유리판을 왼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고서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이는 이 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동작이었다. 그는 시커먼 사진을 검토하면서 까만 눈의 갸름한 얼굴을 약간 찌푸렸는데, 이것이 단지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인지 또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래, 그래요.” 그런 다음 그가 말했다. “자, 당신의 신분 증명서를 받으십시오. 잘 보았습니다.”


▶우편물 수령시간에 세템브리니가 한스에게 접근한 이유가 단지 쇼샤와의 만남을 방해하고 백과사전 편찬작업에 대해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님이 여기서 드러난다. 한스는 쇼샤부인의 엑스레이 사진을 그녀를 상기시키는 사랑의 매개체로 생각하며, 그녀가 떠난 후 그는 이 소설에서 섹슈얼한 의미를 가지는 엑스레이 사진을 정표로 간직한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인 한참 전에 여기서 이미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그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예의 ‘그래, 그래요.’라는 말을 한다.

 

독자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쇼샤 부인을 연상시키는 소설 속 장치로 여기지만, 진실은 이 단락을 위한 속임수로 세템브리니와 한스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토마스 만의 트릭이다.

 

 

 

  세템브리니는 말을 끝맺기 위해 마지막 말을 한스 카스토르프의 바로 코앞에서 목소리를 거의 죽여 급히 말해 버렸다.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요아힘이 두 장의 엽서를 들고 독서실로 들어왔다. 문필가가 기민하게 사교적으로 경쾌한 표정을 짓자 그의 제자가 그런 기민한 인상을 놓칠 리 없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를 제자로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요아힘이 들어오자 태도가 돌변하는 세템브리니.

 

 

 

  그날은 야간 음악 행사가 있어서 보통 날과는 달랐다. 베르크호프 당국이 이 위의 사람들을 위해 제공한, 의자가 줄지어 놓이고 인쇄된 프로그램이 준비된 본격적인 연주회였다. 이 위에 살면서 개인 교습을 하는 전문 성악가가 개최하는 가곡의 밤이었다. 가슴이 파인 야회복 차림에 옆으로 두 개의 메달을 단 그녀는 팔이 장대처럼 길었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 위에 살게 된 슬픈 사연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노래 불렀다.


  내 사랑은 한시도


  나에게서 떠나지 않네.


  반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역시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쇼샤부인은 맨 앞줄에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나가 버리는 바람에, 한스 카스토르프는 그때부터 노래 부르는 동안 프로그램에 인쇄된 가사를 살펴보기도 하면서 차분히 음악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세템브리니는 잠시 그의 옆에 앉아 있다가 이곳 가수의 분명치 않은 미성에 대해 몇 마디 조형적인 촌평을 하고, 오늘 밤에도 사람들이 이토록 충실하고 마음이 편하다고 야유조의 만족감을 표시하고는 역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면 한스 카스토르프는 눈이 가느다란 부인과 교육자가 사라지자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마음 편히 노래에 주목할 수 있었다.


▶’이 위에 살게된 슬픈 사연’을 말해주는 가수의 ‘내 사랑은 한시도 나에게서 떠나지 않네’라는 노래가 불려지는 연주회. 쇼샤는 쉬는 시간에 나가버리고 세템브리니는 다른 누구의 옆도 아닌 그의 옆에 머무른다. 그리고 서술자는 다시금 눈이 가느다란 부인과 교육자를 언급하며 쇼샤와 세템브리니를 병치시킨다.

 

 

 

  그렇지만 워터보크 출신의 아인후프 변호사 이야기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턱수염을 뾰족하게 기르고 손에 검은 털이 난 40대의 남자였다. 그는 얼마 전부터 완쾌한 스웨덴인 대신에 세템브리니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술에 취해 요양원에 돌아올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아예 돌아오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풀밭에서 자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위험한 난봉꾼으로 인식되었는데, 슈퇴어 부인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 털외투에다 그 밑에 개량팬티만을 달랑 걸치고 아인후프의 방에서 나오다 들켰다고 하는, 평지에서 약혼까지 한 어떤 젊은 여자를 손으로 가리킬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 낯뜨거운 이야기였다.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한스 카스토르프가 개인적으로 들인 정신적인 노력에 비추어 보더라도 낯 뜨겁고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였다.


▶엑스트라 인물에 불과한 아인후프 변호사의 색정적인 측면이 왜 서술되는 것일까? 요양원의 성적으로 고양된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인후프라는 엑스트라 인물이 그가 ‘검은 콧수염’을 기른 세템브리니와 흡사한 ‘검은 털’ 그리고 ‘턱수염’을 가졌으며 ‘세템브리니의 식탁’에 앉는다는 사실이 주목할만하다. 세템브리니의 손가락에 검은 털이 났다는 묘사는 이후 나프타 방에서의 다과 시간에 등장한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고문관과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요양원의 중환자들과 계속 관계를 맺었는데, 요아힘도 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아힘은 아직 살아 있는 '둘 다'의 둘째아들 방에도 동행해야 했다. 바로 옆에 있던 장남의 방은 벌써 진작 대청소가 끝나고 H2CO로 소독이 된 뒤였다. 그는 얼마 전까지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라 불리는 교육 기관에 있다가 병세가 심해져서 이 위에 오게 된 테디 소년의 방에도 동행했다. 또 그는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보험 회사 직원이자 선량한 인내자인 안톤 카를로비치 페르게의 방에도 동행했다. 또한 그는 불운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교태를 부리는 폰 말린크로트 부인의 방에도 함께 갔다. 이 부인도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꽃을 받았는데, 한스 카스토르프는 요아힘의 면전에서 그녀에게 여러 번 죽을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마침내 사촌들은 사마리아인이자 자비의 수도회 수사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하루는 세템브리니도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이런 의미의 말을 건넸다.


  “아니, 엔지니어 양반, 요새 당신 행동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나돌더군요. 자선 행위에 투신하셨다면서요? 선한 행실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겁니까?”


  “그렇게 말할 가치는 없습니다, 세템브리니 씨. 결코 떠들고 다닐 만한 일이 못 됩니다. 사촌과 내가…”


  “당신 사촌을 그 일에 끌어들이지는 마십시오! 두 사람 일이 화제에 오를 때 당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소위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단순하고 정신적으로 위험이 없는 인물이라서 교육자를 별로 불안하게 하지 않거든요. 그 사람이 직접 솔선해서 그런 일을 한다고 말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겁니다. 더 중요하고, 더 위험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당신은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입니다. 당신에게는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당신은 내가 돌보아 주는 것을 허락한 적이 있습니다.


▶요양원의 중환자들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는’ 이 대목은 당연히, 완전히 자비롭고 경건한 의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에서 온 소년(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성애자였으며 소설 내 동성애 시그널로 빈번히 등장한다), ‘러시아인’ 페르게, ‘교태를 부리는’ 부인, ‘요아힘의 면전’에서 ‘죽을 떠먹여 주기’ 등 굉장히 교묘한 서술. 그리고 세템브리니는 이를 질투하듯 다급한 목소리로 한스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다. 그리고 소설 속 둘만의 암호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의 등장.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들의 동성애 성향을 못마땅해한 나머지 아들의 부관이자 연인이었던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 를 참수했다. 잔인한 성향을 지녔던 아버지는 그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강제로 지켜보게 했는데, 프리드리히는 프랑스어로 날 용서해줘! 라고 외쳤고, 카테는 '당신을 용서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이후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성애 비극의 아이콘이 되었다. 연인인 쇼사를 향한 한스의 프랑스어 사용, 요아힘의 유령에게 용서해줘! 라는 말 등은 여기서 따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토마스 만 자신이 동성애자들의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전기소설 집필을 기획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죽음 아셴바흐의 대표작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이들이 본 것은 동양의 어떤 전제군주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무성 드라마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랑과 살인의 이야기였다. 이것은 호화로움과 나체, 지배욕과 광신적인 굴종, 잔인함, 육욕 및 치명적인 색정으로 가득 찬 작품이었는데, 망나니의 억센 팔 근육을 보여 줄 때는 잠시 사실적인 장면이 지속되었다. 요컨대 세계각지의 문명국에서 모인 관객의 은밀한 소망을 잘 알고 이에 부응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비평가인 세템브리니 같으면 아마 인문주의에 반하는 이러한 작품의 상영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이토록 인간 경멸적인 생각을 부추기는 데 기술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고도 고전적인 아이러니를 사용해 엄하게 질타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의견을 요아힘의 귀에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슈퇴어 부인은 교양 없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일그러진 것으로 보아 영화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랑의 이야기, 나체, 육욕, 색정, 억센 팔 근육에 관한 ‘은밀한 소망에 부응토록 만들어진’ 영상을 보면서 한스가 떠올리는 사람은 세템브리니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요아힘의 ‘귀에 속삭여 준다’

 

 

 

  때는 사육제 기간이었다. 사육제가 목전에 다가오자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육제를 어떻게 보내는지 이곳에 온 지 만 일년 되는 사촌에게 물어 보았다.


  “굉장하지요!” 아침 산책을 하면서 또 한 번 사촌과 맞닥뜨린 세템브리니가 대신 대답했다. “장관입니다! 빈의 프라터 유원지에서처럼 아주 재미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엔지니어 양반. 우리도 곧 윤무를 추는 멋진 난봉꾼이 될 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다음, 팔과 머리와 어깨를 효과적으로 움직이면서 독설을 내뿜으며 잔뜩 부어터진 입으로 계속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쇼샤부인과의 욕정의 에피소드 '발푸르기스의 밤' 즉 사육제에 대해 한스는 제일 먼저 요아힘에게 물어보지만, 세템브리니가 '온몸을 움직이며' 대신 대답한다. '두고 보십시오, 엔지니어 양반. 우리도 곧 윤무를 추는 멋진 난봉꾼이 될겁니다.' 그리고 ‘빈의 프라터 유원지’는 빈의 유서깊은 게이 크루징 장소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여기서 자주 파트너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천장의 불이 꺼지고 초롱만이 알록달록한 희미한 빛으로 식당을 이탈리아의 밤처럼 비추자,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한스 카스토르프의 식탁에는 세템브리니가 종이쪽지를 건네주어 (그는 그 종이쪽지를 바로 옆에 앉은, 녹색의 비단 종이로 장식한 기수 모자를 쓴 마루샤를 통해 전해 주었다)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쪽지에는 연필로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무쪼록 잊지 마십시오! 오늘 산 속은 마법으로 제정신이 아닙니다. 도깨비불이 당신을 현혹시키더라도, 그대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물론 극히 보잘것없는 것이 되겠지만, 장난삼아 종이쪽지에 답례시구를 써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연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요아힘과 여선생한테서도 빌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임시변통으로 동쪽으로, 식당의 왼쪽 뒤편으로 돌렸다.


▶식당이 '이탈리아의 밤’처럼 비춰지고 축제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을때' '이탈리아인' 세템브리니가 한스에게 '연필' 로 쓴 메모를 전해준다. 한스가 쇼샤에게 히페에게 그랬듯 연필을 빌려달라고 구애를 하듯이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상징적인 차원에서 구애를 하는 것이다. 굉장히 은밀하고 상징적인 토마스 만의 수법.

 

 

 

  사람들은 흩어지면서 서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찾아다니며 식탁을 바꾸기도 했다. 손님들 중의 일부는 이미 휴게실로 몰려갔고, 다른 일부는 계속 식당에 남아 포도주를 섞은 샴페인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템브리니는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직접 이곳으로 건너와서, 한스 카스토르프와 여교사 사이 구석 자리에 청강생의 입장으로 끼여 앉았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쑤시개 이미지와 한스와 여자 사이에 끼어들기. 커피는 사소한 것이지만 눈의 장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진심이야, 그래, 정말이야. 우리가 이 위에서 같이 지낸 지 벌써 오래되었지. 너도 계산해 보면 알겠지만 일곱 달이나 되었어. 이 위의 우리의 시간 관념으로는 아직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저 아래 평지의 개념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당한 기간이라 할 수 있어. 이제, 우리는 인생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된 거야. 그리고 거의 날이면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재미있는 대화들을 나누지. 부분적으로는, 저 아래에 있었더라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대상에 대해서 말이지. 하지만 여기서는 술술 이해가 돼. 여기서는 그것들이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토론할 때면 언제나 아주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거야. 아니 토론을 했다기보다는, 인문주의자인 네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지. 너를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어. 나는 너를 그냥 너라고 부르고, 달리 어떻게 부르지 못하겠어. 용서해 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네가 여기에 앉아 있고, 나는 그냥 너라고 불러. 그것으로 충분해. 너는 어떤 이름을 가진 일개인이 아니라, 대표자야. 세템브리니 씨. 내 편을 드는 이곳의 대표자야. 너는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해. 너는 이 일곱 달 동안 나에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신입생을 위해, 완전히 공짜로, 어떤 때는 실제 이야기로, 어떤 때는 추상적인 형식으로, 연습과 실험을 하도록 하면서 나의 잘못을 고쳐 주려고 애썼어. 이에 대해,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고, 내가 나쁜 제자이며, 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이라면 사죄의 말을 할 순간이 왔다고 뚜렷이 느끼고 있어. 네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 그리고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새삼스레 가슴이 뛰곤 하지. 걱정거리 자식. 네가 볼 때, 너의 교육자적 기질로 볼 때 나는 걱정거리 자식이었을 거야. 내가 이곳에 처음 오던 날 너는 너의 교육자적 기질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물론 인문주의와 교육의 관계도 네가 나에게 가르친 관계들 중의 하나야.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면 이 밖에도 몇 가지가 떠오를 거야. 그러니까 나를 용서해 주고, 나를 나쁘게만 생각지 말아 줘! 행복을 빌어. 세템브리니 씨, 건강을 빌어! 인류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너의 문학적인 노력을 기리기 위해 잔을 비우겠어!"


▶요아힘의 심장 촬영과 함께 상권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 쇼샤와 페퍼코른과 마찬가지로 소설에서 말을 놓는다는 것(duzen)은 큰 의미를 차지한다. 한스가 요양원에 와서 최초로 말을 놓는 사람은 세템브리니이며, 소설은 세템브리니가 한스에게 말을 놓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인문주의와 교육의 관계 외에 떠오르는 '몇가지 다른 관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이 마적인 탄호이저 비너스의 산의 대표자로 쇼샤가 아닌 세템브리니를 지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때 그의 뒤에서 듣기 좋은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엔지니어 양반! 참으시오! 어째 그런 짓을, 엔지니어 양반! 좀 더 이성을 차리시오! 정신이 나갔구먼, 저 청년!” 하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목소리를 자신이 외치는 소리로 압도해 버렸다. 그러자 세템브리니는 팔을 들고 손을 머리 위로 던지는 시늉을 하며- 이탈리아에서 흔히 하는 이러한 몸짓은,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아니!” 하는 장탄식과 함께 하는 동작이었다- 사육제 모임에서 자리를 떠 버렸다.


▶한스가 쇼샤에게 평상시 쓰는 독일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역시 평상시 그가 사용하는 독일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소리친다. 또한 소설의 결말에서 그는 한스를 이탈리아 이름 조반니로 지칭한다.

 

 

 

 

<하권>


<제6장>


  말하기와 쓰기는 사실 극히 인문주의적이고 공화제적인 사항으로, 미덕과 악덕에 관한 책을 쓰고, 피렌체 사람들에게 세련된 예의범절과 화술을 가르치며, 피렌체 공화국을 정치의 원칙에 따라 통치하는 기술을 가르친 브루네토 라티니 씨의 관심사항일 뿐이다.


  그리하여 한스 카스토르프의 생각은 자연히 로도비코 세템브리니에게 미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언젠가 그 문필가가 뜻밖에 자신의 병실에 들어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사육제날 모임에서 세템브리니가 흥분하여 피아노실에서 나가 버린 후로 한스 카스토르프와 이탈리아인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그럼에도 앞서 말했듯이 몇 주 후에 처음으로, 비록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적인 교양이 필요한 신화적인 암시의 형식이긴 했지만, 문사가 스쳐 지나치면서 그에게 다시 말을 걸어 온 순간 그의 이러한 완강한 태도는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점심 식사 후에 이들은 더 이상 쾅 하고 닫히지 않는 유리문에서 마주쳤다. 세템브리니는 청년을 앞질러 가면서 애당초부터 그에게서 금방 떨어지려는 생각으로 말했다.


  "어이, 엔지니어 양반, 석류의 맛은 어땠나요?"


  한스 카스토르프는 기쁘기도 하고 당황도 하면서 미소 지었다. 그 이탈리아인은 벌써 옆을 지나가면서 머리를 뒤로 돌리며 말 하나하나에 힘주어 말했다. "신들과 인간들은 가끔 저승을 찾아갔다가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승 사람들은, 저승의 과일을 맛본 자는 다시는 저승을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밝은 체크무늬 바지만 입는 그는 이런 말을 불쑥 던지고는 한스 카스토르프를 앞질러 휑하니 가 버렸다.


  그는 세템브리니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 온 데 대해 무척 감격해했다. 그는 예의 전리품, 쇼샤 부인에게서 정표로 받은 으스스한 선물을 안쪽 호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템브리니에게 애착을 품고 있었고, 그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버림받는다는 생각은 알빈 씨의 경우처럼 학교에서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불명예의 특전을 마음껏 누리는 소년의 기분보다 더욱 괴롭고 끔찍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감히 자기가 먼저 사부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몇 주를 그냥 흘려 보내고 나서야 사부가 골칫거리 제자에게 다시 한 번 접근하게 되었다.


▶세템브리니는 한스와 쇼샤의 하룻밤 이후 질투의 화신이 된다. 브루네토 라티니는 단테의 신곡에서 불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형벌을 받은 남색자들의 대표로 표현되었다. (실제 역사 속의 브루네토 라티니가 남색자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네, 저는 나폴리의 화산흙에서, 혹은 동양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태어난 남자들처럼 몸속에 뜨거운 피가 흐릅니다. 어쨌든 저는, 자신은 스스로가 맥없는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천국이라고 불리는 재미없는 장소로 가고, 다른 남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보낸 단테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남자들을 사랑한 남자, 브루네토 라티니 같이 되고 싶습니다. (오스카 와일드-텔레니)

 

브루네토 라티니는 신곡에서 '소돔의 죄'를 저지른 남색꾼들의 대표자격으로 묘사된 이후로 동성애자의 아이콘이 되었다.

 

 

 

  두번째의 접근은 영원히 단조로운 리듬 속에서 몰려오는 시간의 물결을 타고 부활절 무렵에 일어났다.


  “당신은 선박 여행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소위님, 아니면 엔지니어 당신은요?” 세템브리니가 식사를 마치고 입에 이쑤시개를 문 채 사촌들의 식탁으로 다가오면서 물었다. “육지에서는 오늘 왕의 부활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축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간들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촌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말을 걸어 준 데 감격하고, 양심의 가책에 자극받아 그의 표현이 재기발랄하고 탁월하며 문필가답다고 생각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그의 말을 칭찬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세템브리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부활절에 일어난 한스와 세템브리니 연인 관계의 부활. 또다시 이쑤시개 이미지.

 

 

 

  그가 농담을 시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이들은 즐거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세템브리니는 덧붙여 말했다.


  “사육제 날 밤에 포도주를 마실 때 일어난 일이 기억나지요, 엔지니어 양반. 당신은 나에게 작별을 고하듯이 말했지요. 어쨌든, 뭐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지요. 그런데 이제, 오늘은 내가 작별을 고할 차례입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보시듯이,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할 참입니다. 나는 이 요양원을 떠납니다.”


  두 사촌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럴리가요! 그냥 농담이겠지요!” 한스 카스토르프가 소리쳤다. 그는 다른 때, 즉 쇼샤 부인이 떠난다고 할 때도 이렇게 소리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거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몹시 놀랐다.


▶쇼샤와 세템브리니의 동질성. 세템브리니가 쇼사 부인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한스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

 

 

 

  "물론이지, 황도 12궁이야. 이집트의 어느 사원의 천장에 이것이 그려진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봐. 테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프로디테를 모신 사원에서 말이야. 칼데아인들도 그런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고 그래. 태고적의 불가사의한 민족으로 점성술과 예언에 조예가 깊었던 아라비아계와 셈계의 칼데아인 말이야. 이들도 벌써 행성이 그 속에서 돌아가는 황도를 연구하여 12궁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도데카테모리아야. 실로 웅대하지, 이게 인류라는 거야! 정말 대단한 일이야. 내가 이렇게 누워 칼데아인들도 이미 알고 있던 행성을 바라보노라면 그들이 자꾸 생각나면서 공감하게 돼. 이들이 총명한 민족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성을 다 알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나도 볼 수 없어. 천왕성은 얼마 전에, 120년 전에야 비로소 망원경으로 발견되었지."


  "그게 얼마 전이라고?"


  "그래, 괜찮다면 '얼마 전'이라고 부르겠어. 그것이 발견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린 것에 비하면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접이식 침대에 누워 행성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3천년 전의 일도 최근 일처럼 생각되는 거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행성을 바라보면서 그런 것을 알아낸 칼데아인이 무척 친밀하게 생각돼. 이게 인류라는 거야."


  "그래, 좋아, 너는 머릿속에서 웅대한 구상을 하고 있군 그래."

 

  “너는 웅대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친밀’하다고 부르겠어. 이제 어느쪽으로 불러도 매한가지겠지만 말이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원과 함께 등장하는 천왕성 이야기. 점성학적으로 독특하고 기이한 것을 의미하는 천왕성은 19세기 중후반 동성애자들의 상징이었다. 독일의 동성애 운동가 칼 하인리히 울릭스(Karl Heinrich Ulrichs)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자를 제3의 성이자 남성의 몸에 여성의 영혼이 깃든 ‘천왕성인(Uranian)’ 으로 지칭하였다. 또한 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187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의 일련의 동성애 시들을 Uranian poetry라고 한다. 한스는 자신의 동성애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역사상 어디에나 존재했던 소수자들을 친밀하게 여긴다.

천왕성=빅토리아 시대 유럽 동성애자들의 상징 (에드워드 카펜터 등)

 

 

 

  이들 네 사람 중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은 한스 카스토르프와 세템브리니 둘뿐이었다. 요아힘은 군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나프타는 지팡이가 없는지 소개가 끝나자 곧장 뒷짐을 지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phallic symbol 지팡이. 둘의 연인관계.

 

 

 

  세템브리니가 설명하기를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의 상급반을 맡고 있는 고대어 교수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인답게 자신이 소개하는 사람의 신분을 되도록 화려하고 돋보이게 하려고 했다. 그의 운명은 세템브리니 자신의 운명과 유사하다고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는 상권에도 등장한 동성애 식별 표시. 나프타 또한 세템브리니와 같이 동성애자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둘 다 독신이며 이후 한스를 두고 결투를 벌이게 된다. 나프타는 종교 우위의 파괴적인 신정 프롤레타리아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광신자인데, 나프타가 소설 속에서 말하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모든 발언들은 또한 토마스 만이 동성애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또다른 견해를 의미하는 이중적인 기호 체계로 기능한다. 나프타는 동성애자들이 일반 이성애 사회로 편입되거나 건강하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혐오하며, 이는 이성애 우위의 기존 부르주아적 통치체계가 만들어낸 환상이자 동성애자 길들이기라고 여긴다. 이를테면 그는 세템브리니의 ‘이성의 도덕 나부랭이’ 로는 '처참한 정신 병동' 즉 동성애자들의 불행한 운명이라는 지옥을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름대로 인문주의자는 이러한 들뜬 기분을 이용하여, 환각증 환자와 무릇 정신병 환자는 일고의 존경할 가치도 없다고 설명하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나프타도 정신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어, 그러한 '특별 병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그때 본 장면과 광경은, 오 맙소사, 세템브리니의 이성적인 눈초리와 준엄한 태도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이는 단테의 신곡에 묘사되어 있는 장면과 같은,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미친 자들이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 한없이 웅크리고 앉아 불안과 공포에 싸인 온갖 포즈를 취하면서, 어떤 자는 큰소리로 애처롭게 울부짖고, 또 다른 자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크게 벌린 채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지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요컨대 세템브리니 씨의 가차없는 교육학도 특별 병동의 처절한 광경 앞에서는 완전히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외경심을 품고 전율하는 것이 좀 더 인간적인 반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찬란하기 그지없는 태양의 기사이자 솔로몬의 대리자가 광기에 대항하여 내놓기 좋아하는 예의 오만한 이성의 도덕 나부랭이보다도 말입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현재 진행되는 대화에 온통 주의를 기울였다. 원칙적으로 건강에 모든 명예를 부여하고, 될 수 있는 한 병을 천시하며 무가치하게 보는 인문주의자의 일반적인 경향을 나프타가 날카롭게 공박했기 때문이다. 나프타는 세템브리니 씨도 병자임을 감안하면 그의 태도에는 물론 특기할 만하고 자못 칭찬할 만한 자포자기적인 태도가 엿보인다고 말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완전에 이르는 어떤 단계적인 발전을 가르쳤는데, 이는 로도비코 씨가 꿈꾼 것과는 다른 종류의 발전 단계였습니다. 그게 뭔지 알고 싶으세요? 그가 말하는 가장 낮은 단계는 ‘제분소’이고 두번째 단계는 ‘밭’이며, 칭찬할 만한 마지막 단계는-세템브리니 씨는 듣지 마십시오- ‘침대 위’입니다. 여기서 제분소는 세속생활의 상징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비유입니다. 그 다음 밭은 세속적인 인간의 영혼을 의미하는데, 목사와 종교적 스승이 그 밭을 갈아야 합니다. 이 단계는 좀더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침대 위는......”


  “됐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템브리니가 소리쳤다. “여러분, 이제 저 사람은 당신들에게 방탕한 침대의 목적과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할 겁니다.


  “로도비코 씨, 나는 당신이 그렇게 점잔뺄 줄은 몰랐습니다. 아가씨들만 보면 추파를 던지면서 말입니다. 이교도다운 공평무사한 정신은 어디다 두었습니까? 그러니까 침대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침하는 잠자리이며, 인간이 신과 동침하기 위해 세계와 피조물로부터 명상적으로 은둔하는 상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만, 그만두시요!” 이탈리아인이 거의 울상이 되어 그의 말을 가로막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예수를 동성애적 열망으로 찬양하는 시를 썼으며 아일랜드 대주교 아르마흐의 말라키와 동성연인이었다. 말라키는 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고 베르나르의 옷을 입은 채로 묻혔다. 베르나르는 말라키의 옷을 입은 채로 말라키의 장례식을 집전했으며 5년뒤 그 자신 또한 죽자 말라키 옆에 말라키 옷을 입은 채로 묻혔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와 말라키(Malachy of Armagh) 의 우정은 중세시대부터 유명했다.

 

 

 

  “진정한 교육적 단체들은 죄다 자고 이래로 교육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중요한 문제는 절대 명령, 철저한 구속, 규율, 희생, 자아의 부정 및 인격의 억압이었습니다. 더구나 청년들이 자유를 갈망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청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은 바로 복종입니다.”


  이 말을 듣자 요아힘은 앉은 자세를 가다듬었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얼굴을 붉혔다. 세템브리니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멋진 콧수염을 손으로 배배 꼬았다.


▶청년이 복종을 갈망한다는 나프타의 말에 왜 한스는 얼굴을 붉히고 세템브리니는 흥분하는 것일까.

 

 

 

  다 올라가 자세히 보니 다락층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그냥 다락방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화제를 부르짖는 자본주의자는 방이 두개인 이 다락방에 살고 있었다. 이 방들이 백과사전「고통의 사회학」의 문학 부문 담당자인 세템브리니의 서재와 침실로 쓰였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명랑한 표정으로 방을 보여주면서, 두 사람이 방에 대해 칭찬할 적절한 말을 알려 주기 위하여 방이 외지고 아늑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촌들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아주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면서, 그가 말한 그대로 외지고 아늑하다고 말했다.------ 탁자에는 장식용인지 아니면 마시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물컵을 거꾸로 얹은 물병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이것도 아무튼 썰렁한 느낌을 주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시험 삼아 잠시 책상 앞에-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문학 부문의 백과사전 작업을 하는 세템브리니의 작업장에 서 보았다.- 서서 팔꿈치를 비스듬한 책상에 대어 보고는, 이곳이 정말 외지고 아늑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세템브리니의 아버지가 사용했다는 높은 책상 옆에 서서 이제는 그의 아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머리에 그려 보면서, 아버지의 인문주의와 할아버지의 정치를 문학과 결부시켜 보았다. 이윽고 세 사람은 다락방에서 나왔다. 문필가가 사촌들을 배웅해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거꾸로 얹은 물병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적 상징이다. 물을 거꾸로 쏟는 청년의 모습인 물병자리는 계몽과 지성, 이성을 상징하는 별자리이다.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주를 만든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이라는 설화도 있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제우스에게 납치되어 동성연인 겸 올림포스 산에서 술따르는 역할을 맡게 된 가니메데라는 설이다. 즉 물병자리는 동성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명랑한 표정으로 방을 보여주면서’의 원 문장은 ‘Mit Heiterkeit zeigte er sie den jungen Freunden’ 즉 그냥 젊은이들이 아니고 젊은 친구들이라는 뜻이다. Freund에는 애인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토마스 만이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네, 네, 하지만 그는 왜 신부가 되지 않았습니까? 벌써 그럴 만한 나이가 된 것 같은데요.”


  “아까 말했듯이 때문에 당분간 신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첫째 그가 예수회 수도사이고, 둘째 그가 머리가 비상한지라 이념의 결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추가된 두 번째는 병과 관련이 있는게 아닐까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템브리니 씨. 내 말은 그저 그에게 침윤된 부위가 있어서 신부가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또 그가 이념의 결합을 좋아하기 때문에도 신부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한에서는 어느 정도 결합 능력과 침윤된 부위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 나름대로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으로, 약간 침윤된 부위가 있는 희한한 예수회 수도사인 것입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나는 젊은 두 분에게 경고합니다. 일단 알게 된 이상 여러분이 호기심을 발동하여 그와 교제한다면 나는 이를 금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귀더라도 불신의 눈초리로 마음과 정신을 무장하도록 하고, 결코 비판적 저항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마디로 이 남자의 특징을 말한다면 그는 호색한입니다.”


▶’귀여운 바구니’를 든 ‘볼이 발그레한 사환’을 데리고 초콜릿이 든 ‘뾰족탑’ 모양의 케이크를 즐겨 먹는 나프타는 ‘침윤된 부위, 병’ 즉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신부가 될 수 없었다.

 

▶세템브리니가 나프타와의 사상 대립과 성격차에도 불구하고 그와 친밀하게 지내는 모종의 이유는 역시 둘 다 '예술가',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 '침윤된 부위가 있는 병자' 바로 동성애자로서의 연대감 때문이다.

 

현학적이고 지루한 작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토마스 만이 좋아했던 영화는 놀랍게도 디즈니 밤비였다. 밤비의 원작자 펠릭스 잘텐이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로 시온주의 정서를 그려낸 것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토마스 만은 박해받는 동성애자들이 연대하는 지상낙원을 꿈꾸는 마음에서 밤비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크로커스는 축축한 풀밭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숲은 불그스름한 빛을 띠었다. 아직은 사촌들이 고문관의 유화를 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화창한 10월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요아힘이 떠나간 뒤로 한스 카스토르프는 더 이상 슈퇴어 부인의 식탁에 앉지 않았다. 이미 저세상으로 간 블루멘콜 박사가 앉았던 식탁, 까닭없이 헤실헤실 웃으며 오렌지 향내 나는 손수건을 입에 대던 마루샤가 앉았던 식탁에는 더 이상 앉지 않았다. 이제 그 식탁에는 전혀 모르는 새로운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일년하고도 벌써 2개월 반을 이곳에서 보낸 우리의 친구에게 관리실에서는 다른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앉았던 식탁 앞의 비스듬한 방향에 있는 이웃식탁, 왼쪽 베란다 문 쪽으로, 일류 러시아인 석과 자신의 옛날 식탁 사이의 식탁, 요컨대 세템브리니의 식탁에 앉았다. 그렇다, 이제는 빈자리가 된 인문주의자의 자리에 한스 카스토르프가 앉게 된 것이다.


▶크로커스가 피는 계절,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애정은 깊어져 간다. 크로커스는 헤르메스의 남자 애인이었다가 원반을 맞고 죽은 크로커스가 꽃으로 변한 것이다. 요아힘이 하산했으니 한스는 이제 더이상 마루샤의 식탁에 앉을 필요도 없고, 요아힘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세템브리니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나프타가 태형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도 역시 하등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뻔뻔스러워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성 엘리자베트도 자신의 고해 신부인 콘라트 폰 마르부르크에게 피가 나도록 태형을 당했지만, 이로 인해 '그녀의 영혼은 제3급의 천사에까지 이르렀다'고 성담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성녀 자신도 졸린 나머지 고해를 하지 못하는 어떤 불쌍한 노파에게 매질을 가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진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떤 수도회와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것의 원칙을 좀 더 깊이 가슴속에 새겨두기 위해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을 누가 감히 진심으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고상하다고 자부하는 나라들이 태형을 법적으로 금지하고는 진정한 진보라고 떠들면서 이를 확고부동하게 믿으니 이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어디 있겠는가.

 

  “당시 세템브리니 씨가 몸이 좋지 않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진보 촉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성 엘리자베트가 옆에 있다가 채찍으로...”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이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인문주의자가 발끈 화를 내려고 해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얼른 자신이 언젠가 매 맞은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가 다닌 김나지움의 저학년에는 아직 부분적으로 체벌이 남아 있어서 승마용 채찍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배려하여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동급생으로 자기보다 힘이 세고 키가 큰 어떤 녀석에게 허벅지와 양말만 신은 종아리를 나긋나긋한 채찍으로 맞은 적이 있었다. 맞아 보니 말할 수 없이 아픈데다가 치욕적이고 도저히 잊을 수 없어서, 거의 신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치감을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흐느끼는 가운데 분노와 명예를 잃은 슬픔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감옥에서 태형을 가하면 아무리 흉악무도한 강도 살인범이라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세템브리니가 다 닳아 해진 가죽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동안, 나프타는 정치가처럼 냉담하게 고문대와 채찍 없이 어떻게 반항적인 범죄인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게다가 그런 도구는 감옥에 양식상으로 아주 적합한 것으로, 인도적인 감옥이란 미학적으로 어중간하고 타협적이다. 세템브리니가 비록 말은 번드르르하게 잘하지만 요컨대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이는 분명히 성적인 메타포를 함의하고 있는 서술이다. 고문과 태형에 대한 토론에 열을 올리는 베잘은, 쇼샤 부인에 대한 욕정에 눈이 멀어 한스의 시종 노릇을 하고 자신의 상스러운 꿈 내용을 떠벌리는 사람이다.(’베잘은 태형과 고문이 더 이상 화제에 오르지 않자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베잘이 꺼낸 태형에 대한 토론은 명백히 도발적이고 음탕한 기류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채찍을 맞는 대상은 세템브리니와 한스다. (베잘은 배를 입에 틀어넣는 고문에 대해 계속해서 외설적인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는 나중에 또 다시 등장한다.)

 

'종교, 죽음, 고문, 형벌 = 에로틱' 은 서양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카라바조, 엘그레코 등 많은 동성애자 대가들의 그림이 기독교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 또한 신부가 되고자 했던 예수회 회원 나프타의 동성애 성향에 개연성을 더해준다.

 

 

 

  기회를 보아 그는 세템브리니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자 세템브리니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거의 껴안다시피 했다. “나도 메르쿠리우스처럼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당신과 함께 산에도 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갈 수 없는 몸입니다.”

 


  세템브리니가 말한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스포츠에 문외한이면서 그럴듯한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세템브리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스 카스토르프는 중심가의 전문점에서 멋진 스키를 한 벌 구입했다. 담갈색으로 래커 칠이 되어 있고, 멋진 가죽 끈이 달렸으며, 앞이 위쪽으로 뾰족하게 굽어진 질 좋은 물푸레나무로 된 스키에다가 끝에 쇠가 박히고 고리가 달린 스틱도 샀다. 그는 직접 어깨에 둘러메고 세템브리니의 숙소까지 가서, 곧장 향료 가게에 매일 맡겨 두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스키 타는 법은 여러번 관찰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붐비는 연습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크호프 요양원의 뒤쪽에서 멀지 않은 거의 나무 한 그루 없는 비탈면에서, 날이면 날마다 비트적거리면서 혼자 힘으로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때로는 세템브리니도 그곳에 나타난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두 발을 맵시 있게 모으고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스 카스토르프가 연습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실력이 쑥쑥 늘어가자 브라보를 외치며 좋아했다.


▶요양원 환자들의 이성교제 목적인 스키 타기는 세템브리니와 한스의 교제 더 나아가 눈보라 속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후에도 나오지만 지성과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하는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는 세템브리니가 제일 좋아하는 그리스 신이다. 헤르메스는 중세시대에는 연금술의 신으로 여겨졌는데 역시 마의 산의 주제인 연금술적 고양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핵심 테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헤르메스에게는 크로커스라는 남자 애인이 있었다. 세템브리니의 남자 애인 한스는 물푸레나무 스키를 타며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북유럽 신화의 오딘이 물푸레나무에 매달려 힘을 얻게 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엔지니어 양반, 이성을 좀 차리시오!” 아, 그래 이성과 반역의 교육자적인 악마 같으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아. 당신은 허풍선이이자 손풍금장이이긴 하지만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야. 당신은 날카롭고 키 작은 저 예수회 회원이자 테러리스트, 안경알이 번득이는 스페인의 고문을 하고 볼기를 치는 형리보다 마음씨가 더 좋은 사람이고, 내 마음에 더 들어. 둘이 언쟁을 벌일 때는 거의 항상 나프타의 견해가 옳기는 하지만 말이야. 신과 악마가 중세에 사람들의 마음을 둘러싸고 그랬던 것처럼 당신들은 교육자적인 입장에서 나의 가련한 영혼을 뺏으려고 서로 맹렬하게 싸웠지.

(......)
  “하지만 무슨 수를 써야지, 주저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지. 그러다간 규칙적인 육각형에 덮여 버리기 십상이야. 세템브리니가 호각을 불면서 나를 쫓아오면 나는 여기서 눈 모자를 비스듬히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겠지.” 그는 자신이 혼잣말을, 그것도 아주 이상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그런 자식을 자책했지만 다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입술이 마비되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했고, 입술을 써야 발음할 수 있는 자음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 사육제 날 밤을 뇌리에 떠올렸다. “입 다물고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나 해야지.”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헛소리를 하고 있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는걸.”
(......)
  그때 그는 생선 소스인가 뭔가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바람에 세템브리니, 교육자 로도비코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심지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미쳐 날뛰는 자에게 엄한 눈초리를 보내 이성을 지키도록 하는 그의 듣기 좋은 호각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이 언변 좋은 교육자가 골칫거리 제자,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을 미쳐날뛰는 상태에서 건져 올려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신호처럼 들렸다.......내가 그런데 이렇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니! 예를 들어 나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왼쪽 다리가 세템브리니의 손풍금을 지탱하는 나무다리를 생각나게 한다는 등의 훨씬 더 절실한 문제가 있는데도 말이다.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 눈의 비전을 보며 한스의 마음 속에 제일 많이 떠오르는 사람은 세템브리니다.

 

 

 

  그는 스키를 가게에 맡기고, 세템브리니의 창고같은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면서 자신이 눈보라에 습격당한 일을 보고했다. 인문주의자는 대경실색했다. 그는 손을 머리에 올리고 휘저으며, 그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경거망동을 호되게 나무라고는 알코올 램프에 불을 붙여 기진맥진한 청년을 위해 커피를 끓여주었다. 진한 커피도 한스 카스토르프가 세템브리니의 방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눈보라 속에서 세템브리니와 나프타 두사람의 교육자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사랑의 철학을 깨닫자고 다짐하는 한스이지만 정작 눈보라의 위협을 벗어나 다다른 안식처는 세템브리니의 방이며 충실한 제자답게 그에게 전말을 보고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사육제날 밤 세템브리니와 잔을 부딪쳤던 커피의 등장.

세템브리니가 요양원에서 나와서 기거하는 다락방은 소설 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더구나 그때는 프리메이슨에 장미 십자회 사상이 파고들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정말 이상한 단체였습니다. 이는 순전히 합리적이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개선과 행복 증진의 목표를 지니고 동방의 비술, 인도와 아라비아의 지혜, 마적인 자연 인식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당시 엄격한 계율 준수라는 의미에서 프리메이슨의 많은 지부에서 개혁과 수정이 완수되었습니다. 이러한 계율 엄수는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이며, 마적이고 연금술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그 덕택으로 스코틀랜드의 프리메이슨에 계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나프타 씨, 이제 세템브리니의 술책을 알 것 같습니다."
(......)
  프리메이슨 단의 성공이 매우 눈부셨기 때문에 속인들은 그로 인해 남자들이 가정의 행복과 아내의 고마움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개탄했습니다.------프리메이슨의 지부장은 신비한 자연 인식에 정통한 사람, 마적인 자연 인식의 소유자, 주로 위대한 연금술자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나프타는 말을 계속했다. "연금술적인 성체 변화의 상징은 무엇보다도 묘혈이었습니다."


  "무덤 말인가요?"


  "프리메이슨 집회의 경우에는 아까 내가 당신의 주목을 끈 것처럼 묘혈과 관에 대한 예배 의식이 있습니다. 교회와 프리메이슨의 어느 경우에도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상징성, 광적인 원시 종교의 요소, 사멸과 생성, 죽음, 변용 및 부활을 찬미하는 심야의 방종한 제식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시스의 신비 의식뿐 아니라 엘레우시스의 신비 의식도 심야에 어두운 동굴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은 당신도 생각나겠지요. 그렇습니다. 프리메이슨 집회에는 이집트의 제전을 추억하는 의식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남아 있어, 그 비밀 결사에는 엘레우시스적인 결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성과 논리의 현현으로 보였던 세템브리니가 온갖 마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특질을 지닌 비밀결사 프리메이슨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한스는 놀란다. 나프타가 들려주는 프리메이슨 입단의 주된 절차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단원 손에 이끌려 죽음의 공포와 부패의 세계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는 것인데, 이는 세템브리니의 손에 이끌려 죽음의 세계를 탐험하는 한스의 이야기, 바로 마의 산 전체 스토리와 일치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어김없이 각종 동성애적 상징들이 두드러진다.


▶로마 5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세기의 연인 안티노우스와 함께 동성애 아이콘이다. 서기 128년 9월(Settembre) 하드리아누스는 애인 안티노우스와 함께 아테네의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에 참가했다. 로마 황제가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는게 특이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엘레우시스 비의에 참가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기록되었다. 토마스 만이 하드리아누스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알렉산더나 프리드리히 대왕을 능가하는 너무나 노골적인 동성애 심볼이기 때문이다(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소속 화가 에두아르 앙리 아브릴(Edouard Henri Avril)은 하드리아누스를 동성애 춘화의 소재로 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동성애 작가답게 만년의 대작 파우스트 박사에서 주인공 이름을 하드리아누스에서 따온다.


이들은 제국순방을 하면서 이집트에 체류할 때도 사랑의 여신 이시스의 신비 의식에 참가했다고 하는데 이런 밀교 의식에 참석한 이유는 대체로 둘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안티노우스는 결국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이유로 나일강에 빠져 죽었는데,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안티노우스 동상을 만들어 온 제국에 퍼뜨리고 별자리로 만들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안티노폴리스를 만드는 등 신격화 작업에 열을 올렸다. 무덤(묘혈)과 관, 부활을 중요시하는 이집트 문명의 관습답게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미라로 만들어 말년을 보낸 별장 빌라 아드리아나에 감추어 두었거나 안티노폴리스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쇠락해가던 엘레우시스 비교를 부흥시킨 하드리아누스의 상이 그리스 엘레우시스 유적터에 남아있다.

 

 

 

  세템브리니는 그냥 설탕물만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빨대를 사용하여 아주 비싼 음료수라도 되는 양 우아한 태도로 맛있게 마셨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십니까, 엔지니어 양반? 무슨 소문에 내 귀에 들어오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베아트리체가 다시 돌아온다지요? 당신을 데리고 천국을 빙빙 도는 아홉 계단을 빠짐없이 안내해 준 그녀가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베르길리우스가 이끌어 주는 우정의 손길을 냉정하게 뿌리치지 않길 바랍니다!”


▶쇼샤 부인에 대한 세템브리니의 지속적인 경고.

 

 

 

  나프타는 즉각 공세로 나아가, 누구나 알다시피 세템브리니가 우상처럼 섬기며 호메로스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는 라틴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공격했다. 라틴 시문학을 전반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나프타는 벌써 베르길리우스에 대해 여러 번 노골적으로 멸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사실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악의적으로 이 기회를 이용했다. 위대한 단테가 이 평범한 엉터리 시인을 대단하게 평가해 자신의 신곡에서 그에게 고귀한 역할을 맡긴 것은 단테가 너무 선량해 시대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프타는 말했다. 저 궁정 계관 시인, 율리우스 왕가의 어용 시인, 독창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러한 세계적 대도시의 문사이자 미사여구가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혼을 갖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빌린 혼에 불과하며, 전혀 시인이라 할 수 없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길게 늘어뜨린 가발을 쓴 프랑스인이 말이다!


  세템브리니는 문학 정신의 수호자로 자처했고, 기념비를 세워 인간의 지식과 느낌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인간이 처음으로 문자를 돌멩이에 새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문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찬미했다. 그는 이집트의 신 토트에 관해 말했다. 헬레니즘의 헤르메스에 해당하는 이 신은 그보다 세 배는 위대한 신으로, 문자 발명의 신, 도서의 수호신, 온갖 정신적 노력을 장려하는 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인류에게 문학 언어와 격투기적 수사학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안겨 준 거룩한 헤르메스, 인문주의적 헤르메스, 격투기 수호신인 헤르메스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프타는 세템브리니 씨가 약간 속임수를 쓰면서 청년에게 토트 헤르메스를 아주 훌륭하게 그려 주었다고 대꾸했다. 오히려 토트 헤르메스는 원숭이와 달, 영혼의 신이었고, 머리에 초승달을 쓴 비비 원숭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헤르메스라는 이름은 무엇보다도 죽음과 망자의 신으로, 영혼의 유괴자이자 안내인이라는 것이다. 이 헤르메스 신은 고대 후기에 벌써 대마법사가 되었고, 유대적인 신비주의가 창궐하던 중세에는 신비스러운 연금술의 대부가 되었다고 했다.


  하도 혼란스러워 어둠 속으로 도망쳐 간 한스 카스토르프의 귓전에 계속 문학을 찬미하는 세템브리니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는 문학에는 관조적인 위대함뿐만 아니라 행동적인 위대함도 언제나 결부되어 있다고 외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카이사르, 나폴레옹을 들먹였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 밖의 영웅들, 심지어 라살과 몰트케의 이름도 거론했다. 그러자 나프타는 우스꽝스러운 문자를 우상화한다는 중국에 세템브리니 씨를 보내야 할 거라고 말했다. 거기서는 4만 개의 한자를 으로 쓸 수 있으면 원수(元帥)도 될 수 있다는데, 이는 인문주의자의 마음에 쏙 드는 일일 거라고 말했지만 세템브리니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헤르메스. 헤르메스의 특징인 도서, 문자, 정신적 노력, 인문주의, 영혼의 유괴자이자 안내인, 죽음과 망자(마의 산 요양원), 대마법사이자 연금술의 대부(프리메이슨) 등은 전부 세템브리니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헤르메스는 베니스로 요약되는 죽음과 동성애의 세계로 아셴바흐를 인도하는 안내인의 이미지로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도 사용되었다. 토마스 만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반복하여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토마스 만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세템브리니의 초라한 옷차림, 스키타기, 폐결핵 등)

 

형편이 쪼들려 옷을 초라하게 입는다고 해서 쉴트크납의 기사도 정신이 손상되는 법은 없었다. 초라한 옷차림에도 그의 기사도 정신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는 체격으로 보면 운동을 굉장히 잘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겨울철에 작센의 산지에서 영국인들과 스키를 타는 것 말고는 어떤 스포츠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얼굴색이 갈색인데도 어깨가 넓은 것은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성장기에 각혈을 한 적이 있고 폐결핵의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파우스트 박사

 

헤르메스가 동성애의 상징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 동성애를 상징하는 조각상인 도나텔로의 다비드. 동성애자였던 도나텔로의 다비드가 쓴 모자에서 헤르메스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다.  


▶토트 헤르메스 신에 대한 이 언쟁은 명백히 이중적인 함의를 띤 논쟁이다. 세템브리니는 동성애자 위인들의 문학적 업적과 실천적 위대함, 건전한 동성애 관계가 이끌 수 있는 정신적 발전과 행동 즉 빛의 속성을 강조하지만 나프타는 고상하게 포장하는 속임수를 쓰지 말고 동성애가 지닌 파멸적 속성과 비밀스럽고 마적인 성격, 어둠스러운 육체적 욕구를 받아들이라 하고 있다. 세템브리니더러 중국으로 가라는 발언도 괜히 나온게 아니라 붓이라는 phallic symbol의 상징성을 볼 때 당대 청 말기의 남색 풍조에 대한 은유일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세템브리니는 동성애의 긍정적 요소가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 더 나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고 나프타는 아무리 애써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베르길리우스->동성애 목가집 / 알렉산드로스 대왕->연인 헤파이스티온과 페르시아 남첩 바고아스, 퀴어 아이콘 / 카이사르->비티니아 니코메데스 4세와의 동성애 의혹 / 나폴레옹->소도미법을 폐지한 최초의 유럽 군주(나폴레옹 법전)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퀴어 아이콘, 기념비와 붓(phallic symbol)

 

나는 나무 그늘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비렁뱅이이자 게으른 도둑놈에 불과한 내가 그 옛날 알렉산더나 카이사르가 바라보던 별들을 똑같이 바라보며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이 여겨졌다. 나는 명예로운 것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유럽을 횡단했다. 그렇지만 나는 위대한 정복자들의 역사만큼 귀중한 나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세부적인 사항들은 나를 가장 기이하고 가장 희귀한 인물로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나의 길을 따라가며 지속적으로 가장 어두운 불행을 맛보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남창으로서 부끄러운 여자의 옷치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장 주네-도둑일기)

 

 

 

<제7장>


  “아, 세템브리니, 알고 있어요. 그 이탈리아인 말이지요.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생각하는 게 인간적이지 않아서요. 그는 거만해요. 그는 이제 이곳에 살지 않나요? 나는 멍청해서 라다만토스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무언가 인문적인 말이지요. 세템브리니는 이곳에서 나갔어요. 우리는 요즘 들어 장황하게 철학적인 토론을 나누었지요.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와 나, 이렇게 셋이 말예요.”


  “나프타는 누군가요?”


  “그의 논적이지요.”
  (......)
  다음으로는 쇼샤 부인, 우아하게 사뿐사뿐 걸어가는 환자이자 여행객인 클라브디아 쇼샤는 나름대로 페퍼코른의 소유물이었으며, 자신도 분명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전 사육제 날 밤의 기사가 자신의 보호자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내심 달갑잖게 생각하며 속으로 토라져 있었다. 이러한 언짢은 감정은 세템브리니에 대한 그녀의 관계를 규정짓는 언짢은 감정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녀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는 이 인문주의자를 거만하고 인간미가 없다고 혹평하지 않았는가? 세템브리니가 그녀의 모국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은근히 멸시했듯이, 그녀도 지중해 연안의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멸시했지만, 그의 멸시에 비해 자신감은 덜한 편이었다.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약간의 침윤 부분이 있는 호감 가는 이 부르주아 청년이 사육제 날 밤에 자신에게 다가오려 했을 때 그의 교육자적 친구가 지중해 연안의 말로 뒤에서 예의바른 청년에게 무슨 말로 소리쳤는지 그녀는 그에게 어떻게든 물어서 알아내고 싶었다.------ 가장 미묘한 문제는 그녀에 대한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적대적인 감정이었다. 그녀는 여성 특유의 예민한 육감으로 두 논적으로부터 그러한 적의가 자기한테 불어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의 사육제 날 밤의 기사인 한스 카스토르프도 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한스 카스토르프에 대한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역할을 방해하고 엇나가게 하는 부인에 대한 두 교육자의 불쾌감, 이러한 은밀하고 본래적인 적대감이 이 두 교육자를 결속시켜 이들에게 앙금으로 남아있는 반감을 해소해 버렸다.


▶세템브리니와 쇼샤의 연적 관계.

 

쇼샤부인(프리비슬라프 히페)의 모델이 된 빌리 팀페(Willri Timpe).

 

토마스 만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 1892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학교 교장인 요한 하인리히 팀페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이때 그는 하숙집 아들인 빌리 팀페에게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는데, 형인 하인리히 만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민했던 편지가 남아있다. 소설 속 히페에게 연필을 빌린 일과 연필 부스러기를 간직한 에피소드는 토마스 만의 일기에 의하면 전부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그는 그 연필 부스러기를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 한스가 쇼사 부인에게 덜덜 떨며 하는 사랑 고백은 토마스 만이 실제로 감행할 수 없었던, 빌리를 향한 사랑 고백이다.

 

"하지만 네가 그라는 것을 알고, 너에게 다시 사랑을 느낀 것은...... 그래, 실은 내가 너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오래전에도, 언젠가 학창 시절에 나는 너한테서 연필을 빌린적이 있었지. 마침내 너와 세속적인 의미에서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베렌스가 내 몸에서 발견한 흔적, 내가 이전에도 을 앓았음을 증명하는 흔적,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때문에 남아 있는 거야. 너에 대한 나의 해묵은 사랑이 남긴 흔적인 거지."

그의 이빨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는 헛소리처럼 지껄여 대면서 삐걱거리는 의자 밑에서 한쪽 발을 끄집어냈다. 이번에는 그 발을 앞으로 내밀고 다른 발의 무릎은 바닥에 댄 채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너를 사랑해." 그는 더듬거리며 프랑스어로 말했다. "나는 늘 너를 사랑해 왔어. 너는 나의 자기이고, 삶이자 꿈이며, 나의 운명이자 소망이며, 나의 영원한 욕망이기 때문이지."

 

 

 

  하루는 세템브리니가 단도직입적으로 제자에게 교육자로서의 우려를 털어놓았다.


  “아니, 정말, 엔지니어 양반, 그분은 멍청한 노인네에 불과합니다. 그의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겁니까? 그가 당신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자와 교류하는 게 그의 현재의 애인 때문이라서, 그를 그냥 참고 견디는 거라면 물론 이는 그리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녀보다 그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이유를 좀 속 시원히 설명해 주십시오.------ 당신은 그 인물을 신비화하면서 우상 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당신이 숭배하는 것은 가면입니다. 당신은 배우들과 교제해 본 적이 없습니까? 당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괴테 및 베토벤의 얼굴을 합친 것 같은 용모를 하고 있지만, 그러한 행운을 타고난 소유자들이 입을 떼자마자 세상에서 가련하기 짝이 없는 멍청이로 밝혀지는 이러한 광대들을 모르십니까?”


▶한스와 페퍼코른의 관계에 주의를 집중하는 세템브리니.

 

 

 
   “그 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만 훌륭한 살라미 소시지와 계란찜을 먹고, 맛좋은 이 지방 포도주를 마셨지요.”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거들었다. “우리는 모두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했지요. 베르크호프의 주방장이 그 모양을 보았다면 분명 기분이 상했을 겁니다. 우리는 예외없이 먹고 마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그것은 진짜 살라미였어요. 세템브리니 씨는 감격한 나머지 먹으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더군요.”


  "그는 명랑하게 말하는 예의 바른 사람으로 신사지요. 그런데 옷을 자주 갈아입을 처지가 못 되는 모양이지요."


  "그래요."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도저히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어 그 사람과 친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나를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이라면서 대단히 고맙게도 나를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 표현은 우리 사이에서만 통하는 말투라서 금방 이해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여름이고 겨울이고 간에 체크무늬 바지에 올이 거친 나사로 만든 더블 상의 말고는 다른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 낡은 옷가지들을 남이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우아하게, 아주 맵시 있게 입고 다닙니다. 옷맵시가 초라함을 이기고 있지요. 나에게는 키 작은 나프타의 우아함보다 차라리 이런 초라함이 더 마음에 들어요. 나프타의 우아함은 소위 악마적인 것이라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 드는 비용을 그는 뒷구멍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예의 바르고 명랑한 사람이오.” 페퍼코른은 나프타에 대한 한스 카스토르프의 지적을 깊이 파고들지 않고 따라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편견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아마 눈치 챘겠지만, 나의 여행 동반자인 마담은 그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더군요. 편견을 갖고 그녀를 대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더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젊은이. 나는 세템브리니 씨에 대한 당신의 우정에 금이 가게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
  “당신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세템브리니 씨가 당신의 여행 동반자인 마담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세템브리니 씨를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오래전부터, 수년 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은 결코 좀스럽고 속물적인 성격을 띤 것이 아님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입니다. 그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좀 더 커다란 양식의, 그러므로 비개인적인 성질을 띤 편견이며, 일반적으로 교육적인 원칙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그런 원칙을 내세우면서 세템브리니 씨는 솔직하게 말하면 나의 특성을 ‘인생의 걱정거리’라고 칭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아주 장황하게 이야기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두세 마디로 간추려 말할 수 없습니다.”


▶폭포로의 소풍 전 한스와 페퍼코른이 나누는 긴 운명의 대화 또한 동성애적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쇼샤 부인에 대한 이야기 중에도 세템브리니가 계속해서 높은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인데, 흡사 한스는 쇼샤 부인보다 세템브리니와의 우정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세템브리니가 먹고 감격한 살라미 소시지(phallic symbol).

 

 

 

  “그것은 나한테 맡겨 두게나.” 페퍼코른이 대꾸했다. “그리고 다른 일은 반복 연습과 습관에 맡겨 두도록 하지! 그럼 이제 가게나, 젊은이! 나를 두고 떠나게, 이봐! 날이 어두워졌고, 저녁이 완전히 어둠에 잠겼어. 우리의 연인이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올지 몰라. 사실 자네와 둘이 이렇게 만나는 것을 들키는 게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야.”


  “그럼 잘 있게나, 민헤어 페퍼코른!”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도 보시다시피 두렵고 꺼림칙한 생각이 당연히 들기는 하지만 나는 이를 잘 극복하고 벌써 턱없이 무모한 호칭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벌써 날이 저물었군요! 느닷없이 세템브리니 씨가 들어와 이성과 사회성이 뿌리를 내리도록 불을 켤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에게는 그런 취미가 있지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흡족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이곳을 떠납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이제부터 적어도 3일간은 열이 오르지 않겠군요.”


▶둘은 말을 놓고, 페퍼코른은 쇼샤가 들어와 둘의 만남이 들키는 것을 우려한다. 이때 한스는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세템브리니를 떠올린다.

 

 

 

  나프타는 세 사람이 타고 있는 선두 마차의 페르게 옆자리에 앉았고, 세템브리니는 기분이 무척 좋은지 경쾌한 농담을 연발하면서 한스 카스토르프와 베잘이 탄 마차에 올랐다. 베잘이 그에게 자신의 뒷좌석을 양보하자, 세템브리니는 꽃마차 행렬의 참가자처럼 아주 늠름한 자세를 취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쾌적하고 유유자적한 가운데 이렇게 흔들리며 마차를 타고 소풍 가는 즐거움을 찬미했다. 그는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는 아버지처럼 친절한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불쌍한 베잘의 뺨을 어루만지기까지 했다. 그는 남루한 가죽 장갑을 낀 오른손을 휘두르며 바깥 경치를 가리키면서 이 밝은 세상을 예찬함으로써 호감이 가지 않는 자신은 잊으라고 촉구했다. 최고로 멋진 마차 드라이브였다.


▶세템브리니와 한스의 꽃마차 나들이. 이 소풍에서 베잘은 쇼샤부인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한스에게 토로하며 음란한 꿈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한스는 베잘에게 '당신은 결혼행진곡을 잘 연주하는 재능이 있다'고 위로해준다. 외설적인 '결혼행진곡 연주자' 베잘과  한스, 세템브리니가 꽃마차에 같이 타는 것은 분명한 결혼의 모티프이다.

 

 

 

  이렇게 단순한 놀이가 얼을 빼놓을 정도로 사람을 매혹시킬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변덕을 부리는 카드 요정의 노리개가 되고, 눈부시게 변하는 운수에 농락되어 하루 온종일 어디에 있거나 카드점을 쳤다. 밤에는 별빛 아래에서, 아침에는 그냥 파자마 차림으로, 식탁이나 심지어 꿈속에서도 카드를 늘어놓고 있었다. 오싹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는 이를 그만두지 못했다.


  예전부터 한스 카스토르프의 일을 방해하는 사명을 지닌 세템브리니가 그를 찾아왔다가 청년이 혼자 카드점을 치는 것을 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가 말했다. "카드점을 치고 있군요, 엔지니어 양반."


  세템브리니는 이 몇 년 동안 여러번 그랬듯이 검은 눈으로 청년을 슬픈 듯이 바라보았다.


▶한스에 대한 애정.

 

 

 

  “그토록 많은 사랑스러운 말”, “나를 부르는 듯이”,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이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은 매혹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테너의 성악가는 밝고 열정적이며 교묘한 호흡법으로, 적절하게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세 번지적인 감정을 살려 아름답게 노래불렀다. 특히 예술가가 “언제나 그 나무에 끌리는”과 “이곳에서 그대는 안식을 얻으리”라는 구절에서 이례적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실음으로써 자신의 효과를 고조시킬 줄 알았기 때문에, 노래를 듣는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보리수 가곡과 그 창법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소개된 예들로 보아 한스 카스토르프가 야간 콘서트에서 몇몇 중요한 레코드에 얼마나 내밀한 애착을 보였는가를 독자들이 대강 이해했을 거라고 우리는 어느 정도 자처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가곡인 친근한 ‘보리수’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이해시키는 일은 물론 극히 민감한 문제이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극히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소박한 주인공이 몇 년 동안 밀봉교육을 받아 연금술적인 고양이 일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중요성과 그 사랑의 대상의 ‘중요성’을 의식할 정도로 충분히 정신적인 세계로 들어갔다고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그가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고 이야기하는 바이다. 그에게 ‘보리수’ 가곡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고, 하나의 전체 세계, 그것도 그가 사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세계를 뜻했다. 그가 그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세계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가곡에 그토록 푹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기분이 감정 세계의 매력, 그 가곡을 그토록 내적이고 비밀스럽게 통합한 보편적으로 정신적인 태도의 매력을 조금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운명이 지금과는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좀 막연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말을 덧붙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러한 의구심이 사랑에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물론 사랑의 본질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의구심은 사랑의 맛을 더하는 향료이다. 이러한 의구심이야말로 사랑에 정열의 가시 면류관을 얹어 주는 것이므로, 바로 그 정열을 회의적인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 매혹적인 가곡과 그 가곡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좀 더 고상한 의미에서 허락된 것인지의 여부에 양심상의, 술래잡기상의 의구심을 품은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양심의 예감에 따르면 금지된 사랑의 세계여야 하는 이러한 배후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죽음의 세계였다.

  (......)
  정말이지, 그는 문사 세템브리니를 사실 절대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명석한 사부로부터 언젠가, 옛날에, 즉 그가 연금술적인 인생 행로를 시작하던 무렵에 ‘복귀’에 관해 약간의 가르침을 받은 생각이 났다. 그는 당시 모종의 세계로 정신적인 ‘복귀’를 할 것을 권유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자신의 관심의 대상인 ‘보리수’ 가곡과 조심스럽게 연관지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템브리니는 이러한 복귀 현상을 ‘병’이라고 지칭했다. 세계상 자체, 이러한 복귀가 행해지는 정신적인 시점이 교육자적 기질이 다분한 세템브리니에게는 병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째서 그렇다는 말인가! 한스 카스토르프가 향수를 느끼는 사랑스러운 가곡, 그 가곡이 속하는 정서적인 영역, 그리고 이러한 영역에 대한 애착이 ‘병적’이라는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것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가장 건강한 세계였다.


▶가곡 보리수가 뜻하는 바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사랑하는 고향 요양원인 동시에 요양원이 표상하는 죽음의 세계 뒤의 더 깊고 민감한 문제 즉 동성애까지 함의하는 상징이다.(’회의적인 사랑’, ‘자신의 사랑이 허락된 것인지’, ‘금지된 사랑의 세계’)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육제날 밤 한스가 죽음(동성애)을 상징하는 마의 산 요양원의 대표자, 마의 산 그 자체로 누구를 지명했던가? 여기엔 더 깊고 ‘민감한’ 문제가 있다. 보리수의 작곡가 슈베르트 또한 앞서 언급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의혹이 있는 인물이며 보리수 열매는 9월(Settembre)에 수확한다. 거기에 덧붙여 보리수 가곡집 겨울나그네의 마지막 노래는 '손풍금 연주자' 인데 이 손풍금장이는 누구일까? 즉 '발렌틴의 기도'가 요아힘을 의미하듯 그에게 ‘친근한’ 가곡 보리수는 로도비코 세템브리니를 의미한다. (’몇년동안의 밀봉교육’, ‘연금술적인 고양’)


세템브리니는 이 보리수를 병적이라 생각한다. 세템브리니는 계몽된 인간이며 기존의 죽음=동성애 도식을 타파하고자 하는 건강한 동성애를 지향하는 인간상이다. 그런데 한스가 동성애는 파멸이자 죽음이라는 매력적이고 데카당한 아이디어를 비극적인 가곡 보리수에 연결지으니 세템브리니는 경고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보리수의 가사가 잃어버린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니 둘의 관계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가난한 슈베르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그의 친구들과의 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는 일종의 동성애 친교 서클이었다는 학설이 있다.  

 

 

 

  반면에 추타프스키의 조서는 아까 말했듯이 누구나 받아보았고, 심지어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이를 받아 볼 수 있었다. 가령 나프타와 세템브리니도 역시 그것을 배달받았던 것이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두 사람이 그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놀랍게도 이들도 이를 악물고 이상하게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세템브리니는 비웃기는커녕 구타 사건의 자극적인 유혹에 심각하게 말려 들어가 있었다.


  2월의 어느 날 오후 일동은 몬슈타인으로 소풍을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곳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지내는 장소로부터 썰매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일행은 나프타와 세템브리니, 한스 카스토르프, 페르게와 베잘로 다섯 명이었다. 이들은 한 필의 말이 끄는 두 대의 썰매를 타고 출발했는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인문주의자와 함께 탔고, 나프타는 마부 옆자리에 앉은 베잘과 페르게하고 같이 탔다.------ 이 호텔은 숙박하고 싶을 만한 곳이었다. 2층에는 호텔방처럼 번호가 달린 객실이 죽 이어져 있었다. 식당도 2층에 있었는데, 구조는 촌스러웠지만 난방은 잘되었다. 행락객들은 손님 접대를 잘하는 안주인에게 간식으로 커피, 꿀, 흰 빵과 이 지방의 특산품인 배를 넣은 빵을 주문했다.


  우리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일행인 다섯 명의 손님이 자리에 앉아 따끈하고 아주 맛 좋은 커피로 몸을 데우면서 좀 더 고상한 대화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몇 마디를 거든 후에는 나프타 혼자 거의 시종일관 떠들었기 때문이다. 이 독백은 상당히 이상하게, 사교적으로 예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즉 예전의 예수회 회원은 얼굴을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향하고 그에게만 상냥하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고, 다른 한편에 앉은 세템브리니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었으며, 다른 두 사람은 완전히 무시하듯 했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당신의 애매한 강론을 이제 좀 끝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Darf ich mir die Erkundigung erlauben, ob Sie mit Ihren Schluepfrigkeiten bald zu Rande zu kommen gedenken?)


  세템브리니는 이렇게 완곡한 어조로 물었지만, 말투는 날카로웠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고, 콧수염을 배배 꼬면서 앉아 있었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아서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반듯이, 아니 몸을 조금 뒤로 젖히고 앉아 있었다. 매우 창백한 얼굴로, 소위 발돋움을 한 상태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허벅지만 의자에 닿아 있었다. 이런 자세로 검은 눈을 번득이며 논적을 노려보자, 나프타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세템브리니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프타가 응수했다.


  "내 말은." 이탈리아인은 이렇게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말은 당신의 애매한 말로 무방비 상태에 있는 청년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말릴 작정이라는 겁니다!"


  "이보시오, 말조심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촉구할 필요 없습니다. 이보시오, 나는 언제나 말조심하고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나는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기 쉬운 청년을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뜨리고, 유혹하며, 윤리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당신의 태도는 파렴치하며 아무리 엄한 말로 징계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파렴치'라는 말을 하면서 세템브리니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자신이 앉은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섰다. 다섯 사람 모두 탁자를 사이에 두고 꼿꼿이 서 있었다.(aufrecht)


  주위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래서 나프타가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는 이것이 비데만의 머리털이 곤두선 것을 본 체험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그는 예전에 이를 간다는 것은 말로만 가능하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프타는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정말 이를 갈았던 것이다. 소름끼칠 정도로 불쾌하고 난폭하며 기상천외한 소리였지만, 어쨌든 이는 나프타가 나름대로 무서울 정도로 자제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가 큰 소리로 외치지 않고, 나지막한 소리로 헐떡거리듯 반쯤 웃는 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파렴치하다고? 징계한다고? 도덕군자도 드디어 뿔이 났나요?(stoessig) 문명의 교육자적 경비대가 칼을 뽑는 지경까지 되었습니까?(blankziehen)"
(......)


  얼마쯤 가다가 세템브리니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스 카스토르프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얹고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오, 나는 죽이지 않을 거요.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그의 탄환에 맞서겠지만, 명예가 나에게 명할 수 있는 전부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믿어 주시오!"


  그는 손을 풀고 계속 걸어갔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몇 발짝 걷다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잘 생각하신 일입니다. 세템브리니 씨. 그렇지만 상대방이... 그쪽에서..."


  세템브리니는 그냥 머리만 흔들 뿐이었다. 이들은 협곡에 걸려 있는 통나무 다리를 건너갔다. 여름에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더해 주는 이 폭포가 지금은 얼어붙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흘러내려 있었다. 나프타와 베잘은 눈이 수북하게 쿠션처럼 쌓인 벤치 앞 눈 위를 이리저리 걸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예전에 그 벤치에 누워 코피가 멎기를 기다리던 때가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데만과 존넨샤인의 싸움 그리고 폴란드인들의 결투신청 및 구타사건에 이어지는 두 교육자 간의 결투는 표면적인 의미에서는 유럽에 만연한 폭력성, 비이성적 집단주의, 반유대주의, 사상간 대립, 전쟁의 징험을 암시하는 징표지만 이는 명백히 이중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유럽 사회에서 결투의 가장 주된 원인은 치정싸움으로,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결투 역시 한스를 두고 벌이는 일종의 연적 간 치정싸움인 것이다.


토마스 만은 이를 여러가지 수법으로 구체화한다.


  1. 폴란드인의 치정싸움에 관한 자세한 문서를 두 교육자는 ‘이를 악물고 이상하게 황홀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2. 결투신청은 ‘썰매(죽음=육욕)’을 타고간 ‘숙박하기 좋은 호텔’에서 ‘배를 넣은 빵(제6장 배를 입에 집어넣는 고문에 대한 베잘의 외설적 묘사)’을 먹으며 일어난다.

 

  썰매는 작품 초반에, 눈이 자주 쌓여 오도가도 못하는 겨울철 요양원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끌고 내려가는 수단으로 아주 자세히 설명된다.


  3. 또한 결투의 발단은 낭만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시작되는데, 한스는 여름에 ‘푸른 꽃’이 만발하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소를 결투장으로 제안한다. (낭만주의는 사랑이 핵심이 되는 문예사조이며 푸른꽃 또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아이콘->노발리스의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


  4. 결투의 주된 원인은 두 교육자간 이념 대립 그 자체보단 상대가 한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프타는 ‘통상적인 사교 예의를 어겨가며 이상하리만큼 한스에게만 상냥하게’ 대한다. 이를 세템브리니는 ‘참을만큼 참았다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5.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당신의 애매한 강론을 이제 좀 끝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토마스 만은 ‘Schluepfrigkeiten’ 이라는 단어를 이탤릭체로 강조해서 사용했는데 이는 ‘애매함’ 이란 의미뿐 아니라 ‘외설적임, 음란함’ 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중적인 단어이다. 그 밖에 ‘청년을 유혹’, ‘청년을 윤리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파렴치한 행위’ 등


  6. 하늘을 찌르는 뾰족한 봉우리, 뿔이 나다, 칼을 뽑다, 꼿꼿이 서다 등 남근적 상징들


  7. 결투의 배경은 눈으로 뒤덮인 산이다. (눈의 장 한스의 눈속 비전->사랑에 대한 깨달음)


  8. 결투는 한스가 코피를 흘리며 누워 프리비슬라프 히페를 떠올린 벤치 앞에서 벌어진다.


  9.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희열’, ‘그곳에 도착한 흥분’, ‘몸안에 축적된 열과 가쁜 호흡’ 등 수식어구들


  10. 결투는 알빈 씨의 총으로 진행된다. (상권에서 알빈씨의 칼과 총에 대한 외설적인 묘사)


  11. 나프타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을 쏜다. (괴테 낭만주의 베르테르 오마주)


세템브리니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발자국을 내디디며 ‘나는 쏘고 싶은 곳에다 쏩니다’ 하늘을 향해 총을 쏘는 행위, 나프타에게서 몸을 돌리고 하늘을 응시하는 이 장면은 신을 향한 인간의 반항을 상징하는 소설의 하이라이트이다. 다시 말해 세템브리니는 인간애를 위해 신에게 반기를 드는 프로메테우스로서 휴머니즘의 정수를 구현하고 있다. 나프타는 세템브리니가 겉으로는 밝고 건강하며 이성적 교육적인 동성애 관계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본인처럼 시커먼 욕정에 굴복하여 자신과 결투를 벌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템브리니는 우리 동성애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며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라는 유일신적 헤게모니라 주장하는데 이는 신의 섭리에 무릎꿇고 동성애를 음지에 처박아 두는 나프타의 병적인 사고방식에 대비된다. 나프타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세템브리니가 옳았음을 증명하듯 사랑을 잃어버린 베르테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나프타의 죽음

 

 

 

  지중해 출신인 그의 친구이자 사부인 세템브리니는 언제나 그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고쳐 주려고 했고, 자신이 교육을 떠맡은 걱정거리 자식에게 평지의 사건을 대강이나마 가르쳐 주려고 관심을 보여 왔지만 제자인 한스 카스토르프는 그의 말을 그리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제자는 사물의 정신적인 그림자에 관해서는 '술래잡기'에 의해 이런저런 꿈을 꾸었지만, 사물 그 자체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림자를 사물이라고 생각하고, 사물을 그림자로 볼 뿐인 그의 오만한 성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해명된 것은 아니므로 그를 가혹하게 야단칠 수도 없는 일이다.


  전에는 세템브리니가 느닷없이 한스 카스토르프 방의 불을 켜고 들어와 수평 생활을 하는 그의 침대맡에 앉아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고쳐 주며 영향을 미치려고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이제는 반대로 한스 카스토르프가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인문주의자의 작은 방의 침대 옆에 앉거나, 또는 카르보나리 당원이었던 할아버지가 쓰던 의자와 '물병'이 있는 다락방, 격리되어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다락방의 휴식용 침대에 앉아 그에게 말동무를 해 주며, 세계 정세를 논하는 스승의 말에 다소곳이 귀 기울였다. 로도비코 씨가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프타의 극단적인 최후, 독하게 자포자기한 그 논쟁가의 테러 행위가 세템브리니의 민감한 체질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그 후로 완전히 쇠약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사회학적 병리학'이라는 인간의 고통을 대상으로 삼는 모든 문학 작품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그의 공동 작업도 정체 상태에 있어, 일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진보 촉진 국제 연맹은 백과사전 중에서 문학 부문의 책이 완성되기를 고대하였지만 이는 헛수고였다.


  세템브리니는 사회적 수단에 의한 인류의 자기완성에 대해 연약하긴 하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말로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투는 비둘기의 발걸음처럼 부드러웠지만, 이내 보편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해방된 여러 민족의 통합에 관해 말할 때는, 스스로는 이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아차리지도 못했지만, 독수리의 날갯짓과 같은 우렁찬 느낌을 주었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할아버지의 유산인 정치와 아버지의 인문주의적 유산인 아름다운 문학이 로도비코 자신의 내부에서 하나로 통합된 것이었다.------ 주위의 정신 상태의 영향을 받아 세템브리니의 훌륭한 신조에도 비둘기의 부드러운 요소가 사라지고 독수리의 용맹한 요소가 강하게 배어들고 있었다.


▶제우스는 호메로스가 묘사한, 인간들 중 가장 아름다운 소년 가니메데와 사랑에 빠져 ‘독수리’로 변신해 그를 납치했다. 이후 제우스는 그를 하늘의 ‘물병자리’로 만들었다. 즉 독수리와 가니메데 그리고 물병은 동성애의 상징이다. 영국의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Toilette라는 그림에서, 동성애자인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꼬기 위해 독수리가 가니메데를 납치하는 장면 밑에 그를 그려놓았다. 그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는 황도대와 ‘독수리자리’ 사이의 별들을 안티노우스 자리로 정했다.

 

미켈란젤로 또한 자신의 연인인 토마소 카발리에리(Tommaso dei Cavalieri) 에게 자신을 독수리로, 그를 가니메데로 묘사한 드로잉을 바쳤다. 카발리에리는 최후의 심판 예수, 조각상 승리 등으로 표현된 미켈란젤로 예술혼의 뮤즈이다.

 

▶깊어가는 병은 토마스 만 작품세계에서 불모, 비생식의 동성애를 표상하므로 이는 명백히 이중적이고 선동적인 분위기라 할 수 있다.

 

 

 

  최초의 동원령이 내려지고, 최초의 선전포고가 행해지던 때에 그는 자신을 찾아온 한스 카스토르프에게 두 손을 내밀어 청년의 손을 꽉 쥐곤 했다. 어리벙벙한 청년은 그게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다.


  삶이 죄 많은 걱정거리 자식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수월한 방법으로가 아니라 역시 이렇게 심각하고 준엄한 방식으로, 어쩌면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우에는 죄인인 그에게 세 발의 예포를 쏘아 올리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시련의 형태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 무릎을 꿇고,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하늘이지만 더 이상 죄 많은 마의 산의 동굴 천장이 아닌 하늘을 향해 얼굴과 두 손을 쳐들었다.


  세템브리니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렇게 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는 자명하게도 지극히 비유적인 표현이다. 정말이지 우리가 알기로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우리의 주인공이 그런 연기를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사부는 제자가 짐을 꾸리는 것을 보았다. '고향'은 공황 상태에 빠진 개미 떼 같았다. 이 위의 사람들은 5천 피트의 높이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평지로 곤두박질하여 추락해 갔다. 승강대에는 소형 열차를 타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며, 플랫폼에 산더미처럼 줄지어 쌓여 있는 짐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도 속출했다. 탄내나는 후텁지근한 바람이 평지에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역의 상공으로 불어오는 것 같았다. 한스 카스토르프도 이들과 함께 추락해 갔다. 혼잡한 가운데 로도비코는 그를 껴안았다. 문자 그대로 그를 두 팔로 껴안고, 남국인처럼 (또는 러시아인처럼) 두 뺨에 입맞춤을 하여, 무모한 출발을 감행하는 청년은 말할 수 없이 불안한 가운데 적지 않게 난처해했다. 하지만 기차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세템브리니는 그를 이름으로, 즉 '조반니'라고, 개화된 서구 문명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당신' 대신에 '너'라고 불러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하마터면 마음의 평정을 잃을 뻔했다!


  "드디어 돌아가는군."(E cosi in giu) 그가 말했다. "이제야 떠나는군! 잘 가, 조반니!(in giu finalmente! Addio, Giovanni mio!) 네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떠나길 바랐는데. 하지만 그게 다름 아닌 신의 뜻이라면 어쩌겠나. 나는 네가 일하러 가기를 바랐는데. 이젠 네 형제들 틈에서 싸우겠지. 아, 우리의 소위가 아니라 네가 싸우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조화란 말인가. 피로 맺어진 편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게! 이제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우리나라도 정신과 이기심이 명하는 편에 서서 힘껏 싸우도록 나에게 남겨진 힘을 다 쓰더라도 나를 용서해 주게나. 잘 가게!"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람들이 빼곡히 머리를 내민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이들 위로 손을 흔들었다. 세템브리니도 왼손 약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눈시울을 누르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Auch Herr Settembrini winkte mit der Rechten, waehrend er mit der Ringfingerspitze der Linken zart einen Augenwinkel beruehrte.)


(......)


  잘 가게나! 한스 카스토르프, 인생의 진실한 걱정거리 녀석이여! 너의 이야기가 다 끝났어. 우리는 너의 이야기를 끝마친 셈이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연금술적인 이야기였지. 우리는 이야기 자체를 위해 너의 이야기를 한 것이지, 너를 위해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어. 너는 평범한 청년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결국 이건 너의 이야기였어. 이런 이야기가 너에게 일어난 걸 보면 보기와는 달리 네가 보통내기가 아닌 게 분명해.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너에게 교육자적인 애착을 느낀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리고 이러한 애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앞으로 너를 볼 수도 없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손가락 끝으로 눈시울을 살짝 누르고 싶어지는구나.(zart mit der Fingerspitze den Augenwinkel zu tupfen bei dem Gedanken, dass wir dich weder sehen noch hoeren werden in Zukunft.)


▶마지막 장 한스는 요양원 사람들 틈에서 소외된 나날을 보내는데 유일한 일과는 하숙집 다락방에 누워있는 세템브리니 병문안이다. 이 기나긴 요양원 이야기의 결말에서, 처음에 기차역으로 한스를 마중나온 사람은 요아힘이었지만 이제 한스를 떠나보내기 위해 역으로 나온 사람은 세템브리니다. 여기서 역으로 불어오는 후텁지근한(schwuel) 바람은 베니스의 죽음에서도 사용된 언어유희 schwul(동성애자)를 환기시킨다. 이 때 그동안 억눌린 에너지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세템브리니는 한스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다. 이때는 그의 특기인 냉소도 독설도 없이 오로지 한스를 위한 사랑만이 느껴진다. 한스의 진정한 사랑은 쇼샤가 아니라 세템브리니였음이 ‘러시아인 같은 태도’와 ‘왼쪽 약지’로 눈시울을 누르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마지막 전쟁터에서도 한스를 지켜보는 것은 세템브리니적 시선이다. (가곡 보리수, 걱정거리 자식, 교육자적 애착,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눈시울)

 

  그런데 결말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의 아이러니적 성격이다. 결국 한스는 전쟁터에 나가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고 세템브리니는 백과사전 편찬작업을 끝마치지 못한다. 이 작품은 베니스의 죽음의 후속작으로 계획된 쌍둥이 작품답게 동성애의 불가능성과 불모성, 파국적 결말을 그린 것이다. 요아힘과의 사랑은 그의 유령을 불러내서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며, 나프타는 절망하여 관자놀이에 총을 쏴 자살하는 베르테르가 되고, 기적적으로 다시 만난 하숙집 아들 쇼샤와도 이어질 수 없으며, 두 전우는 폭탄에 터져 죽는다. 아무리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이라 해도, 세템브리니가 얼마나 청년을 아끼는지, 건강하며 교육적인 건전한 관계로 승화시키고자 하는지 작품 내내 보여진다해도 동성애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전부 쓸모없어지며 헛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동성애는 죽음만을 야기하므로 세템브리니는 둘의 사랑의 위험성을 깨닫고 한스에게 하산을 권하지만, 결국 그를 향한 애착 때문에 매몰차게 내치지도 못하며 한스 또한 세템브리니를 버리고 요양원을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죄인 한스는 이 데카당한 동성애적 마의 산 생활을 청산하고, 두 무릎을 꿇고 속죄한 다음 비로소 전쟁이라는 현실 세계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세템브리니가 자주 쓰는 표현인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동성애라는 죽음을 피해 현실로 뛰어들었지만 현실세계는 전쟁과 같이 처참하고 부조리한 곳이며 개인 위에 작용하는 거대한 힘 때문에 어떠한 폭력이나 억압도 이겨낼 수 없는 끔찍한 곳이다. 그곳에서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즉 동성애를 선택하면 병에 걸려 죽는 불행만이(사회적 매장), 그렇다고 자연적 본성인 동성애를 억누르는 것에는 바꿀 수 없는 현실에 굴복한 비참한 자기소멸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본능적인 동성애 성향과 냉혹한 현실 세계 사이에서 평생을 방황하고 고뇌하고 고통받았던 토마스 만의 딜레마와 일치하며 이는 부덴브로크 가의 소년커플 하노와 카이, 토니오 크뢰거의 토니오와 한스 한젠, 베니스의 죽음의 아셴바흐와 타지오,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과 슈베르트페거,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킬마녹 경과 펠릭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지는 비극이고, 토마스 만 작품세계의 핵심이며, 바로 그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없었던 토마스 만의 비극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만은 최후의 사랑 프란츠 베스터마이어를 향한 노년의 일기에 이 모든 명성과 부유함도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선 다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라 한탄한 바 있다.)

한스 한젠의 모델이 된 토마스 만의 첫사랑 아르민 마르텐스(Armin Martens)와 토마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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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릴케 단편선 - 문예 세계문학선 121 문예 세계문학선 121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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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이상합니다. 이곳의 옛 궁전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토로해줄 때는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건물에는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추억을 우리 자신도 그들과 나누어 가지고 온 듯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옳은 말씀이에요. 특히 이런 점에서 동감이에요. 어릴 때 이곳에 없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말하자면 이런 거에요. 좁은 거리나 정원 같은 데 있을 때, 저는 곧잘 누군가를 살며시 불러 세우고 이런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어요. '어렸을 때 저는 여기서 늘 놀았지요.'라고. 그리고 또 '이 교회에 기도하러 왔었지요'라든가. '이 그림을 보러......'라든가 그것이 사실은 모두 거짓말이거든요."

 

- 대화

 

 

 

  "어린 시절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 독립된 하나의 왕국이에요. 왕이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추방되어야만 할까요? 왜 이 나라에서 나이를 먹고 성숙할 수가 없을까요? ...... 왜 남들이 믿고 있는 것과 타협을 해야 할까요? 순진하고 굳건한 어린이의 신뢰감에서 나오는 것보다도 그것이 더 진리라는 말인가요? 저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어요. 그 무렵에는 무엇이든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있었어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지는 않았어요. 모든 것이 평등했지요. 모든 것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숙명적일 수 있었어요. 밤에 날아와서, 제가 좋아하는 나무에 검은 그림자처럼 근엄하게 앉아있던 새 한 마리, 정원 모양을 바꿔놓고 온갖 초록에 그늘과 빛을 주던 여름 소나기, 누가 꺾어놓았는지 꽃 한 송이가 끼워져 있던 책, 흔히 볼 수 없는, 무슨 의미가 있을 것같이 생긴 작은 차돌멩이. 이 모두가 어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위대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어느 하나에 닿아도 죽을 것 같았어요......"

 

- 마지막 사람들

 

 

 

  "인생이란 아득하게 먼 것이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은 아주 적어요. 영원한 것이 결국 하나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난 불안해지고 지쳐버립니다. 어렸을 때 나는 이탈리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잘 기억하진 못하나, 여하튼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길을 가던 도중에 농부에게 '마을까지 얼마쯤 남았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반 시간쯤 남았지'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다음번에 만난 농부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대답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하루 종일 걸었건만 마을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생도 이것과 같아요. 그러나 꿈속에서는 뭐든지 가까이 있거든요. 그래서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래 꿈에 맞도록 만들어졌으며, 삶을 위한 기관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물고기인 주제에 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해서 어떻게 한다는 것이죠."

 

- 에발트 트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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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시리즈 세트 - 전2권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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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멀끔한 보스턴 부잣집 아들이 편안한 삶이 지루하다며 난투켓 섬에서 포경선을 얻어 탔다. 그의 이름은 허먼 멜빌이었다.

-> 멜빌이 유서깊고 부유한 가문 자제는 맞지만, 어린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파산, 뒤이은 죽음으로 현재가치로 약 5억 8천만원의 빚더미에 앉게 됩니다. 그 후 농장일꾼, 점원, 상선 선원 등으로 일하다가 포경선에 타게 된 것이지 편안한 삶이 지루하다며 탄 것은 아닙니다.

2. 멜빌은 포경선을 타고 세계를 돌면서 만나는 원주민들에 대한 소설을 써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 작가가 되려는 꿈으로 포경선을 탄게 아니고. 항해 경험을 가족들에게 들려주다가 가족들의 권유로 그 이야기를 써보라고 하여 쓴 첫번째 소설이 타이피입니다.

3. 이 소설에는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기후 좋고 햇빛 좋은 천국같은 섬에서 벌거벗고 사는 아름다운 원주민 여자들의 러브스토리가 대부분이었다. 막장드라마가 인기가 높듯 막장소설도 잘 팔리는 법.

-> 원주민 인물들이 높은 비중으로 다루어지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기독교 선교사 비판. 그리고 문명과 야만에 대한 성찰이 중심입니다.

4. 소설의 소재를 모으기 위해 포경선을 타고 태평양 일주을 하던 멜빌은 어느날 선원들을 통해 스타벅 선장의 무용담을 듣게 되었다. 마침내 제대로 된 작품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멜빌은...(중략)

-> 위에서 말했듯 소설의 소재를 모으려고 포경선을 탄게 아니고 10년 뒤에 쓰게 되는 모비딕에 포경선 생활이 소재가 된 것입니다. 또한 모비딕은 스타벅 선장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고 1820년 침몰한 포경선 에섹스 호와 선장 조지 폴라드 주니어에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멜빌이란 작가에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도 있는 것들이고 글도 대중들 흥미를 포인트로 잡고 쓰신 것 같은데 사람들이 잘못된 지식을 가지면 안될것 같아 이렇게 쓰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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