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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묵상집
찰스 링마 지음, 권지영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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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회퍼를 읽고 본회퍼를 따르기를

찰스 링마, 본회퍼 묵상집, 죠이선교회

 

성경은 읽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함이라 했다. 신앙의 위인이라 함은 말씀을 체화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낸 사람에 다름 아니다. 일례로 장기려 박사는 매일 아침 요한일서를 읽었고 요한일서의 사람이 되었고 요한일서의 삶을 살아내셨다. 그를 우리는 위인이라 한다.

 

톰 라이트는 제2의 천성에 대하여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비행기 조종사를 언급하며, 생각하기 전에 몸이 반응하는 조종기술의 훈련에 대하여 말한다. 조종사에게 조종기술은 체화된 제2의 천성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제2의 천성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녹아내려 우리의 생각과 영을 사로잡아야 한다. 말씀이 본능으로 작용해야 한다.

 

 

본회퍼가 그런 사람이라 생각된다. 본회퍼는 누구보다 말씀을 사랑했고 말씀대로 살아낸 사람이다. 그는 예수를 본 받아 산 사람이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세상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대신 예수께 사로잡혔다. 예수를 본 받아 그렇게 살기를 강렬히 원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본회퍼가 예수의 사람이 된 것이 묵상의 결과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는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원하는 바를 삶에 적용했다. 그런 결과가 바로 이 묵상집일테다. 그의 글에 제자도가 배여 나온다. 예수를 본받고자 함이 스며있다.

 

 

본회퍼의 글을 묵상집으로 엮은 찰스 링마는 이렇게 말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에서 발췌한 이 묵상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혼란을 일으키고 경건하다기보다는 세상적일지 모릅니다. 본회퍼는 성경적인 영성을 정치적인 현실성과 결합했고, 믿음을 순종과, 평화를 저항과, 공동체를 소탈한 개인주의와, 기도를 행동주의와 결합했습니다.]

 

 

그렇다. 삶과 분리된 신앙이 어디 있겠으며 현장이 결여된 신학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링마의 소개대로 본회퍼는 삶과 신앙, 현장과 신학을 결합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더욱 기대가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나를 따르려면가족과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게 된다. 먼저 혼란이 따르고 그 혼란의 너머에 진정한 제자도가 있다.

 

 

[본회퍼의 글들은 학구적이지만, 그는 체계가 잡힌 작가라기보다는 목사이자 신학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씨름하는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역시나 본회퍼는 목회자였다. 예수님도 목회자였다.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였다는 점이 더욱 감사하다. 윌켄은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모두 신학자이기에 앞서 목회자였다고 소개한다. 그들은 공동체를 섬겼으며 목양했으며 예배하고 심방하던 분들이었다. 목회적 현실의 요구에서 신학이 나온 것이다.

 

 

2015년 새해가 기대된다. 링마는 일년을 주기로 매일 매일 본회퍼의 글을 통해 묵상하도록 잘 정리해 주었다. 참 감사하다. 링마가 소개하는 길을 따라 본회퍼를 묵상하고 그를 따라, 그가 묵상하고 살아낸 예수를 따를 생각에 가슴 벅차고 기대가 크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나의 순종여부지만... 성령께서 내 가슴이 내 머리를 따라잡도록 기도하며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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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읽는 설교 시리즈
화종부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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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읽다가 설교를 살다

화종부, 갈라디아서를 읽고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제목이 참 흥미로웠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인데 읽는다니. 참으로 생경하였다. 개인적으로 설교집은 거의 읽은 적이 없기에 더욱 머뭇거리기에 충분하였다.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엔 한 가지 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설교라는 게 기본적으로 현장이 중요하고, 그 현장에서 호흡함이 기본인데, 그런 게 전혀 없이 과연 설교가 내 맘에 어떤 감동일까 하는 기본적 의문이었다. 그렇게 망설이다 집어 든 책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우선 책이, 아니 설교가 쉬웠다.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게 저자의 장점인 듯 하다. , 물론 쉽다고 해서 내용이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내용이 빈약한 것을 쉬운 것으로 우기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풍성한 내용을, 어려운 교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해서 더욱 아쉬웠다. 저자의 설교 현장에 함께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갈라디아서를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아니 들려준다. 1세기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다른 복음, 즉 유대식 율법 준수 여부였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교회 안에 스멀스멀 파고 들었다. 바로 그 1세기의 현장에서 우물을 길어 오늘 우리의 삶을 적신다. 오늘 우리 시대의 거짓 가르침들을 주의하라고 외친다. 진짜 복음은 자격이 아니라 은총이며,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고 그것을 믿으라고 외친다.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아니 들으면서 한국교회의 심각한 현실적 왜곡들이 떠오른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자격이 아니라 하지만, 교회는 자격을 따진다. 따져도 너무 따진다. 공공연하게 석사 학위가 있어야 설교를 할 수 있고, 박사 학위가 있어야 담임목사가 될 수 있고, 책을 낼 수 있는 것처럼 만연해 있다. 사울이 그렇게 따르고 주장하던 것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요, 십자가의 공로임을 외쳐대는 부르짖음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퍼지듯, 오늘 우리들의 교회를 위해 퍼지기를 기도한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우선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쉽게 풀어써서 참 고맙고 감사했다. 반면 책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흘러가는 조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해서 이제 나라도 이 책을 더욱 읽고 책대로 살아내야 겠다. 아니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를 읽고 살아내는 것을 넘어 원전 갈라디아서를 내 목소리로 읽고 내 삶으로 살아내야겠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자 찬사가 아닐까? 그렇게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의 바른 복음을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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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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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앞에 서서

(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읽고)

 

내 나이 35살 때 나는 불편한 진실 앞에 서게 되었다. 그 때까지 솔로로 있던 나를 향하여 한 선배가 비수를 꼽는 한 마디를 던졌다. “꼴에 눈이 높아서 못 가는 거잖아. 눈이 머리 위에 있으니.” 그 말이 참 듣기 싫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말을 던지는 선배가 참 미웠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난 여전히 배우자에 대한 기준이 높았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외모를 많이 따지는 편이었다. 그러니 장가를 못 간 거지. 불편한 진실 앞에서 참 많이 울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이도 울었다. 이제까지 지켜온 자존심을 내려놓기 싫어서 떼를 썼고 억울해서 울었다. 그렇게 한 참을 울며 기도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주님 제 기준을 다 내려놓습니다. 외모, 학벌, 센스 다 필요없습니다. 그냥 여성이면 족하니 하나님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한 여성을 소개 받았고 결혼에 성공하였다. (내 아내가 이뻤을까? 그건 상상에 맡기겠다.)

 

오늘 난 다시 불편한 진실 앞에 서게 된다. 그건 내가 몸 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내용이다. 한 명의 목사로서 인정하기 싫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사실 앞에 서게 된다. 양희송 대표가 쓴 가나안 성도/교회 밖 신앙을 읽어 가면서 참 마음이 불편하다. 우선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그렇다. ‘안나가의 역행어인 그 말이 참 불편하다. 교회를 안 나가는 데 성도라니 내가 배운 신학과 상식에 어긋난다. 그리고 교회 밖 신앙이라니 그게 어디 있을 법 한 말인가?

 

그런데 양 대표는 조목조목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글을 전개한다.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는 가나안성도의 수가 백 만에 육박한다고 통계를 내 놓는다. 이들은 교회가 싫어서, 예수가 싫어서 가나안 성도를 택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비 민주적, 비 성경적 권위에 싫어서 나갔단다. 목회자의 독단적 의사결정, 독단적 예산 집행, 탈선, 교회 물려주기 등 그들이 제시한 내용 하나하나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어서 더욱 불편하다. 반박할 수 없는 현상과 현실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누가 그랬던가? 체제 안에 있으면 그 체제의 모순이 보이지 않는다고. 혁명은 다 변방에서 잃어 난 것이라고. 양 대표는 최근 한국 교계에 일어나고 있는 가나안성도의 현상을 창조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그들의 선택에 관심을 가지라고, 그들의 고민에 동참하라고 부르짖는다. 에클레시아는 어차피 절대적인 게 아니라 유동적이며, 오히려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가 경직화 되면서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고 있지 않냐고 신학적 해법도 제시한다.

 

그 예전 개혁가들 역시 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 사람들 아니냐고 주장한다. 루터도, 칼빈도, 에라스무스나 존 밀턴도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공교회를 떠난 자들이 아니었냐고, 결국 그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 운동이 일어난 것이었음을 제시한다.

 

참 불편하다. 엉터리 주장이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다 맞는 말이어서 불편하다. 인정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어 불편하고, 어쩌지 못하고 어정쩡 눈치만 보고 있는 나 자신이 불편하다.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 어정쩡함이 불편하다. 어쩌면 양 대표의 말처럼 나 또한 성 안에 들어앉아 무너지기 직전의 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불편하다. 아니 불안하다.

 

사실 누구라도 이 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을 테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을 터다. 양 대표는 그 현상에 자신의 표현대로 화살을 겨누고 힘껏 당겨 과녁을 향해 쏘았다. 그의 표현대로 과녁에 맞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그 방울소리가 계속 울린다. 위험이 앞에 있으니 치즈 한 조각에 어리석게 목매지 말고 떠나라고 울린다.

 

불편하지만 진실을 인정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그건 다행이었다. 이제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할 때인 듯 싶다. 그 자기 포기, 자기 부정이 곧 자기 개혁이요 구원임을 알기에.. 이제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겠다. 시위를 떠난 화살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야 할 때다. 그 화살이 과녁에 제대로 명중할 지 지켜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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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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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는 곳에 이해가 있다.

(로버트 루이스 윌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을 읽고

 

오늘날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들 한다. 비기독교인 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참 무식하단다. 당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내가 봐도 그렇다. 최근 떠들썩한 12월 전쟁설을 주장하는 어떤 이나, 청와대 땅굴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보면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전문적 지식은 고사하고 상식이 안 통한다. 그런데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을 뿐 아니라 확신 가운데 기도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복음전파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냥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한다. 만사형통이라 한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데 잘 못 살더라고 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묵살한다. 더욱이 강단에서 나오는 설교들도 가만 보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많다. 더욱이 정치적 발언이나 타종교에 대한 발언들은 어찌 보면 무식 그 자체다. 간혹 무슨 토론회 같은데 나온 기독교인은 논리적 발언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해서 우길 뿐이다. 그러니 비기독교인 들이 어찌 기독교를 무식하다, 무례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런 고민과 갈증 속에서 제대로 된 변증을 만났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캐낸 기분이다. 윌켄은 2천여 년 전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연구하여 우리에게 내어 놓았다. 그가 전착한 시기 (1세기-7세기) 또한 비기독교인 들과 어울려 지낸 시기였고,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에 교부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바르게 변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기독교를 말하고자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고 이제 역전된 정치적 상황에서 또한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고민에서 위대한 신학자들이요 영적 스승들이 나타났다.

 

윌켄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초기 교부들을 연구하여 그들의 사상을 주제별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이레나이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락탄티우스, 아타나시우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을 언급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윌켄은 서두에서 밝히듯이 네 명의 중요 교부에게 집중하였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 4세기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7세기의 고백자 막시무스다.

 

이 네 명의 교부들을 통해 윌켄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의 형성과정과 변증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천지창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힘썼고, 로고스의 성육신에 대하여, 삼위일체에 대하여,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사회 정의에 대하여 논한다. 윌켄이 연구한바 초기 교부들은 모두 그리스, 로마 문화와 학문에 상당한 전문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글을 알고 있었고 수사학을 공부했기에 적어도 일반 학문에 대하여도 결코 무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알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독특한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이 공부한 그리스, 로마의 지식은 사유와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계시에 의해 알려지며, 계시에 대한 순종 및 계시하는 자에 대한 사랑으로 획득한다는 점이다. 특히 어거스틴이 가르친 바, 우리의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신 그 분을 사랑함에 기인한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귀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다. 허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연합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은 사랑과 함께 하며 리샤르 드 생 빅토르가 말한 바, “사랑이 있는 곳에 이해도 있다.” 교부들은 그렇게 뜨겁게 사랑함으로 그들의 지식을 확립하였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윌켄이 주장하는 바, 교부들이 그리스 문화에 의해 기독교를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속화(secularization) 되지 않고 오히려 세속을 성화시킨다. 교부들은 세속화(kenosis)를 통해 신성화(theosis)를 이룬 뛰어한 학자들이었다.

 

또한 교부들은 무엇보다 목회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룬 자들은 서재에서 책만 읽고 연구한 사람들로 예상했는데, 교부들은 실제 교회를 돌보고 예배와 성찬을 집례 했으며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들이었다. 목회적 관심, 목회적 필요에서 신학적 성찰을 한 사람들이었기에 굉장한 도전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신선한 도전이 생겨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윌켄이 소개해 준 바 교부들을 모방하고 배우는 작업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분의 계시의 은총에 의한 학문을 연구하며, 그 연구한 바로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의 헌신이 진정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 임을 깨닫는다.

 

이런 멋진 연구를 해서 책으로 출간해 준 저자에게 감사하고, 이런 멋진 책을 번역해 준 역자에게 감사하고, 이런 멋진 책을 추천해 준 존경하는 목회자이자 연구자인 김기현 목사님에게 감사한다. 이 시대 교부들이신 그 분들을 존경하며 그렇게 나도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빅토르의 말이 계속 되뇐다. “사랑이 있는 곳에 이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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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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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건축가의 집 짓기에 대하여

 

(칼 바르트, 개신교신학 입문, 복있는 사람)을 읽고. 김양현 (로고스 연구원)

 

   자고로 집을 잘 지으려면 우선 설계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건축에 있어 설계는 전부나 다름 없다. 훌륭한 설계도가 있어야 훌륭한 집이 나온다. 그것은 인지 상정이다. 그 다음 무엇이 중요할까? 설계도를 판독할 줄 아는 건축가다. 훌륭한 설계도가 있어도 읽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는 설계도 대로 건물을 지어내는 현장 전문가의 손길이 따른다. 인부를 데리고 실제로 건물을 지어내야 한다. 건물을 지어가면서 피치 못할 변경이 따를 수 있다. 자재가 달라질 수 있고, 인테리어가 조금씩 변경될 수는 있을 터이다. 그러나 원 설계자가 계획한 대로 그 뼈대와 골조는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집이 지어진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집으로 명하였다. 그냥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다.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성전으로 완성되어 가는 공동체가 교회다. 이 집의 설계자는 하나님이시다. 설계도는 계시로서의 성경이다. 설계도를 판독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학자다. 신학자는 집 짓는 자다. 그런데 혼자 짓지 않고 공동체와 함께 지어 나간다. 그런데 잘 지어야 한다. 설계도를 잘 해석해 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설계도인 계시를 해석해 내는 것이 신학자의 몫이다.

 

  칼 바르트는 신학함에 있어 이 부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신학자는 설계자가 아니다. 주어진 도면을 판독해 내는 자다. 신학도 마찬가지,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판독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독특하고 특수한 위치에 있다. 설계도를 가지고 있지만 원 설계자는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계자의 의도를 더듬어 찾아 가야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설계에 동참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물론 이 하나님의 집은 실제로 지어져야 한다. 설계도만 쳐다보면서, 설계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판독해 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설계도의 목적은 집을 짓는 데 있다. 바르트의 주장처럼, 설계자이신 야훼는 존재하면서 존재케 하는 자시다. 설계하신 바 대로 당신의 집을 완성해 가시는 분이시다. 계시는 행해질 때 비로소 온전해 진다. 그러므로 신학의 자리는 공동체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고독한 공동체요, 신학자 역시 세상 속에 고독하게 존재하는 자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설계자의 의도를 알지 못하여 엉터리로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해서 원 설계자가 직접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설계의 의도를 설명하시고 기초를 놓으셨다. 반석 위에 잘 지으라 당부하시고, 직접 반석이 되셨다. 이제 그 분의 증인들로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위에 지어 온 것을 우리가 이어 받아 지어야 한다.

 

  물론 이 집을 지으면서 우리는 놀라고 당황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면대로 집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설계자이신 야훼의 위대하심을 만나고 놀라게 된다. 신학은 놀람, 그리고 놀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경배에 다름 아니다.

 

  이 세상에 없는 독특한 집을 지어가기에 고독을 경험하고, 이 집을 제대로 지어 가는 것이 맞는지 의심도 든다. 이 집을 짓기가 너무 힘들어 절망하기도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도면을 보면서 완성된 집에 대한 희망, 거기서 살게 될 기대 속에 다시 힘을 얻는다.

 

  이제까지 지어온 이 집을 완성하기 위해 건축자로서 신학자는 자신의 미천함을 인정하고 설계자이신 야훼께 기도로 나아간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 집을 제대로 지어나가는 지 끊임없이 설계도면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물론 집을 함께 지어가는 인부들인 성도를 끊임없이 섬기고 봉사하며 사랑으로 다독인다. 언젠가 완성될 그 집, 하나님의 집을 향해 끊임없이 매진해 가야 한다.

 

  수 많은 건축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바르트 역시 하나의 매뉴얼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 집을 잘 짓기 위한 도면 해석 기술이다. 이 기술인 이 책을 다시 읽고 분석해서 집을 잘 지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진리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가시적 건물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자들이 도면을 잘 못 읽어 가시적 건물을 짓고 있으니, 그것도 빚더미에 앉으면서 짓고 있으니 안타깝고 애석하다. 다시 바르트를 읽고 제대로 해석할 일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을 제대로 짓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도면대로 잘 짓자. 반석 위에 잘 짓자. 그리하여 고독하지만 희망을 가진 행복한 건축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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