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에 담긴 기독교 진리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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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신앙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다. 지식 사회에서 정보는 곧 힘이고 권력이며 경제력이다. 생각해 보니 신앙도 비슷하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아니 아는 만큼 살아낼 수 있다.’ 확실히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1세기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너희는 나를 오해하였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넘겼다. 역사의 수많은 이단들의 발흥도 결국 잘 못 암에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무엇을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 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라고 경고했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고, 바로 믿어야 바로 살아낸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던 차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를 집어 들었다. 칼 바르트,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요,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투하한 자요, 신정통주의의 기치를 든 사람이다. 걸어다니는 신학자요, 사상의 결정체다. 우선 책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이해하기에 너무 힘들지는 않을까? 몇 페이지나 읽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의외로? 책이 너무 술술 읽혀지고 한 장 한 장이 기대되면서 흥분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지적 호기심이야말로 최고의 쾌락이라고,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바르트는 이 강연을 2차 대전 직후에 했다고 한다. 폐허가 되어 버린 교정의 한 복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그것도 강의안 없이, 교재 없이 했다.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의 관심은 무너진 교회의 재건에 있었다. 주지하는 바 독일교회는 나찌 정권에 부역 했다. 그 폐해가 심히 컸다. 결국 그 원인은 잘못된 신학, 잘못된 신앙고백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와 제3제국을 구분하지 못했다. 하여 그는 우리가 믿는 바 가장 기본인 사도신경의 해석이 필요했다. 사도신경이야말로 2천여년 교회역사가 지켜온 바요, 시대마다 교회의 오류를 바로 잡아 준 고백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사도신경 해설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새 나의 시각이 교정된다. 우리가 매 주일 외우며 고백하는 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형식적인 되새김에서 깊이 있는 고백으로 나아간다. 그게 바르트의 이 책이 갖는 힘이다. 바르트도 말했듯이 신앙고백은 결국 믿음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하며 그 믿음은 나의 지, , 의를 동반한다. 우리의 공적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 우리의 삶과 연결되며 이는 곧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우리가 함께 믿는 바 대로 우리는 우리가 위치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는다.

 

한 구절, 한 구절의 해석을 따라 가다 보니 어느 한 구절도 버릴 게 없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요 주옥이다. 해서 책이 온통 줄긋기가 되어 버린다. 그게 바르트의 힘이요, 독일인의 특징인 듯 하다. 한 구절도 허튼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핵심 중 핵심을 뽑으면, ‘예수가 우리 주시다.’로 귀결된다. 이는 초대 교회의 핵심 고백이며, 이 고백 위에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로 위치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의 위로자로, 예수의 증거자로 계신다.

 

아무튼 우리 주이신 예수님의 아들되심과 동정녀 탄생,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심, 죽은 바 되었다 부활하심, 그리고 심판의 주로써 다시 오심의 주제들이 깊이 있고 명확하게 펼쳐진다. 어렵다 생각한 책은 의외로 잘 읽혀지고, 읽혀질 뿐 아니라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리하여 곱씹으며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프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주일에 사도신경을 다시 고백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고백을 통해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낸다. 아니 살아내야 한다.

 

지금 미지근한 신앙 가운데 있는 자, 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자, 대 사회적 책임을 하려는 자 이 책을 권한다. 읽어가는 동안 가슴이 뛰며 삶이 쿰틀거림을 경험하게 될 터다. 이 주옥같은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재확인하며 나의 지식으로 확립하여 바로 살아내어야 할 터다. 모처럼 가슴이 뛰며 흥분되는 좋은 경험이다. 이 어려운 책을 쉽고 명확하게 번역해 준 역자에게 감사하고 출판사에게 감사하다. 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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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 - 그리스도인을 위한 길 위의 신학
요르그 리거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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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문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난다. 심지어 여행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여행에 관련된 책들도 많이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여행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여행을 많이 떠난다. 나도 해마다 해외로 가족여행을 떠났었고, 교회에서는 단기선교여행을 떠났었다. 지난 20여년간 20여 차례 해외여행을 했던 것 같다. 여행은 이제 또 다른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여행에 만족하는가? 우리가 떠났던 그리고 떠나는 여행은 만족스러운가?

 

 

요르거 리거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하는 자신만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들려주는 첫 번째는 곧 인생의 근본적 여행이다. 리거가 제시하는 이론이 새롭고 흥미롭다. 아니 그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잊혀졌던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 한다. 그게 무엇인가? 인생 자체가 곧 여행이라는 점이다. 이는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머리로 하는 의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실제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온통 여행 이야기며, 아니 여행을 떠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스토리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평생 여행한 사람이다. 그의 자손들도 여행을 했다. 이삭도 옮겨 다녔으며, 야곱은 평생 떠돌았다. 요셉은 급기야 이집트로 여행한 사람이고 후에 그의 온 가족들이 이주를 했다. 그들은 잠시 이집트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착은 곧 대립과 반목, 고통을 수반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출애굽을 감행하고 광야 여행을 했다.

 

 

예수도 여행자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셨다. 이스라엘 전역을 여행 다니셨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로마 제국 전역을 다니며 활동했던 사람들이고, 바울은 평생 여행하면서 그의 임무를 완수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 역시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던 방랑자들이었다.

 

 

이런 방랑자로서의 인생, 여정으로서의 인생은 무엇보다 믿음과 관련 있다. 그들은 안정적 주거지와 보호시설이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여행자들이었기에 소유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방랑자적 삶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역동적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리거는 이러한 통찰에 힘입어 현대교회가, 현대 그리스도인이 한 곳에 정착하는 삶 대신 역동적이고 여행자적인 삶, 영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일리 있다.

 

 

리거가 주장하는 여행자로서의 삶 가운데 인상적인 것이 바로 이주와 선교여행에 대한 부분이다. 이주는 직업을 갖고 생활을 하기 위해 나라를 옮겨 가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이러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1세기 전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 여행을 많이 했었고 미국은 이주민들의 나라가 되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로 제3세계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 조금 더 낳은 삶을 위해 이주를 한다. 리거는 바로 이 문제를 우리가 심각하게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이주자들에 의한 여행은 한 국가의 사회와 문화에 상당히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타적 시선이 아니라 통합적 시선은 시너지를 일으켜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 제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또 하나, 리거의 제안에서 우리가 고찰하고 반성해야 할 점은 선교 여행에 대한 부분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양한 목적과 이름으로 소위 선교여행을 한다. 우리에게도 단기선교란 이름으로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다닌다. 리거는 이 사안에 대해 묻는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된 선교여행을 하는가? 그가 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선교여행은 현지인들에 대한 우월의식에서 비롯된다. 수혜자로써 그들은 행동하며 깊이 있는 통찰을 가지지 못한 채 자기 만족에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 그가 제안하는 단기선교 중 참 인상적인 것이 역 선교여행이다. 소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갈 것이 아니라, 후진국 사람들을 역으로 초대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 사회를 경험하자는 게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경제와 자립에 도움이 되고 우리도 배울 수 있는 여행을 하자는 게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천편일률적인 단기선교 여행의 재고를 요하는 사안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새로운 통찰을 많이 얻는다. 우리 인생 자체가 여행이라는 점, 오늘날 관광 산업이 관광지 사람들에게 미치는 악 영향, 그리고 선교 여행에 대한 재고가 그러하다. 허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어정쩡하게 된 느낌이다. 전자의 주제에 천착하든지, 후자의 주제에 천착해서 더 깊이 있게 다른 책으로 구성했으면 더 좋을 뻔 했다. 전자와 후자가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다음 계획 속에 있을지 기대가 되고, 아니면 독자의 몫이리라. 어쨌든 지금 여행을 계획하거나 여행 중인 사람, 특히 단기선교 여행 등을 준비하는 독자에게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상당히 계획이 수정되어 있으리라 확신한다.

 

, 열심히 떠났던 당신, 이제 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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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논쟁 -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2
마이클 호튼 외 지음, 문현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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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 중등부 회장을 할 때였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정도 되었고 남다른 열심 이 있었고 나는 장차 목사를 꿈꾸는 청소년이었다. 그런 나를 지독지리 괴롭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의 언어 형태였다. 그 분들은 내가 보기에 예수 믿은 지 적어도 30여년은 넘었고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에게서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는 나를 혼란케 했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게 뭐지? 그 딜레마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신학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얕고 좁은 신학체계에 있었다는 것을 곁눈질로 알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이신칭의라는 말을 수백번, 아니 수천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써 천국간다는 말이 우리의 모토였다. 훗날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기 보다는 절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 시인하는 수준, 말로써 예수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이해했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다. 어쨌든 천국을 갈 테니 삶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사실 천국을 간다는 것도 정확히 맞는 말이 아니었다. 천국은 이미 우리의 삶에 시작된 것이니.)

 

이신칭의라는 신학적 주제를 루터가 들고 거대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내부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4세기에 절정을 이룬 신학 풍토인 via modrena적 관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행위를 강조하였고, 그것은 남발되어 헌금 강요, 선한 일 강요-선한 일은 결국 돈과 직결되었다-로 이어졌고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그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가 강조하고 들었던 무기가 이신칭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에 있다.’ 물론 루터 역시 칭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변화된 지위로서 우리에게 수반되는 선한 행위를 간과하진 않았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오직 믿음에 있었고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듯 하다.

 

최근 루터파와 카톨릭은 칭의에 대한 기초적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고 이는 또 다른 논쟁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제임스 던,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샌더스가 선구자이지만) 소위 새관점학파가 등장하고 이들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강조한 이유에 대한 새로운(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재해 왔던 관점의 발견일 뿐이라 주장한다.) 관점을 들고 나타났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논쟁해 왔던 것과 달리,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게다. 당시 갈라디아나 안디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정결의식(할례, 음식 규례법 등)을 행해야 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교정의 일환으로 바울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이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게다. 오히려 우리는 개혁자들의 시대(16세기)를 지나 1세기 유대적 관점으로 회귀해야 바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다.

 

여기에 몇몇 신학자들이 더 뛰어 들었다. 보수적 개혁파 신학자인 마이클 S. 호튼, 진보적 개혁파인 마이클 F. 버드, 루터파 후예인 벨리-마티 카르카넨, 그리고 카톨릭 신학자 제럴드 오콜린스다. 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칭의를 다룬다. 핵심은 두 가지 정도다. ‘칭의가 법정적 선언인지, 신분의 변화인지, 칭의로 구원이 완성되는지 아니면 칭의와 함께 변화된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이다. 또 하나, 과연 바울 신학의 핵심이 칭의에 집중되는가, 아니면 칭의는 그가 가르친 칭의, 구속, 화해, 양자 삼음, 성령, 연합, 종말론적 선언 등의 한 단면인가? 머리는 더 복잡해 지고 이해력은 한계에 이른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혹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 각각의 신학자들은 자기 입장에서 칭의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다 맞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편적인 부분에서 다 맞는 것 아닌가? 기다란 코도 코끼리고, 강한 다리도 코끼리고, 딱딱한 상아도 코끼리 아닌가? 단 그게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법정적 선언도 맞고 신분과 지위가 바뀌었으니 의로운 삶이 뒤따르는 것도 맞지 않는가?

 

물론 이들 신학자들은 참으로 예의 바르고 열려 있다. 자기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과 토론은 전문적 지식과 논증에 기초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상대의 말을 공감한다.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 나가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누군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이해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강조한 신학자의 충고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울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바울 이해라기 보다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해다. 바울의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마땅할 게다. 바울조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성령의 지혜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책을 오독할 가능성이 무서워 전혀 읽지 않는다면 그게 더 오해와 맹신을 불러 일으킬 게다. 그러니 도전해 보자.

 

나는 지금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칭의논쟁을 읽어 나가면서 도무지 변하지 않는 나의 한계에 대한 딜레마요, 예수 닮지 못함에 대한 탄식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30, 40년을 예수 믿는다 자랑하는(고위 직분자들?)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돋힌 말이요, 삶에 우러나오지 못하는 신앙형태의 딜레마다. ‘칭의를 다시 가르쳐야 할까? 우리는 칭의를 과연 알고 있을까? 마크 트웨인의 탄식이 가슴을 친다.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우리는 언제쯤 칭의를 제대로 이해할까?(톰 라이트) 아니 언제쯤 칭의에 합당한 신자가 될까?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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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는 네 거야 - 하나님의 양치기개로 평생 무슬림을 섬겨온 한 선교사의 유쾌하고 솔직한 인생과 사역 이야기
그렉 리빙스턴 지음, 손현선 옮김 / 좋은씨앗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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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근자에 성경을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드라마로 보는 시각이 많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6막으로 된 연극으로 설명하였고, 바르톨로뮤는 성경은 드라마다고 말했다. 가만 보니 그러했다. 감독은 당연 하나님이시고, 주연배우는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보이지 않는 무대감독이시며, 여기에 수많은 조연들과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무대는 전 세계며 적어도 6천년 이상 이어져 온 최장기 드라마이며 언제 끝이 날지 감독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동안 훌륭한 배우들이 이 드라마에 등장했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사무엘, 다윗, 솔로몬, 이사야, 에스겔, 음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마리아 등이다. , 바울을 빠트리면 서운하겠지. 바울이야말로 극적인 드라마의 흥행배우다. 악역이었던 그는 감독에게 캐스팅되어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한다.

, 물론 이 드라마의 대본은 약 2천년전에 완결되었으나, 드라마는 계속되고 있다. 로마에서 기록이 멈추었지만 여전히 드라마의 원본을 숙지한 다양한 배우들이 계속 자신들의 지역과 상황에서 즉흥 연기를 펼쳐 나가고 있다. , 그동안 수많은 배우들이 이 드라마에 등장하였다. 어거스틴이라는 극적 회심자도 있었고, 대본을 교정했던 아퀴나스라는 사람도 보인다. 루터나 칼빈이라는 멋진 배우들도 있었고, 존 웨슬리, 무디라는 배우도 등장했었다.

그리고 그렉이라는 멋진 배우가 등장했다. 탄생이 좀 불행한 이 배우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가 밤무대 가수와 사랑에 빠져 하룻밤을 보내고 되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여자는 버림 받는다. 그리고 이 여자는 무슨 영문인지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불행하게 태어난 아이는 업소 여인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독특한 유년기를 보낸다. 물론 제대로 된 교육이나 양육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그렉이라는 이 배우는 아버지 없이 자란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 아버지를 만났다고 한다. 아하, 바로 감독이신 그 분이시다. 감독이 눈여겨 보시고 그렉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이 멋진 가능성을 가진 배우를 키워내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붙여주고 미완의 인물을 만들어 가신다.

감독과의 멋진 조우를 경험한 그렉은 이 드라마에서 자신의 역할이 리비아라는 것을 들었다. 리비아, 아프리카, 그리고 무슬림이라는 사람들에게 가서 감독을 소개하고 이 드라마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역할이다. 그렉은 참 멋지게 이 역할을 감당한다. 가만 보니 감독을 철저히 믿은 것 같다. 이 감독은 전지전능해서 모든 필요한 물자와 인적 자원을 다 배치해 놓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 드라마의 조연들과 엑스트라들을 불러모으고 각 역할을 주고 드라마가 진행되도록 한다. 그러고보니 그렉은 캐스팅 스텝이라 불러야 하겠다.

그렉과 함께 무대를 돌아다니다 보니 참으로 흥분되고 가슴이 뛴다. 이 드라마는 참으로 극적이다. 재미가 있다. 에피소드가 넘친다.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런데 그렉의 드라마를 가만 보니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흘리고 다닌다. “나는 이 드라마에서 양치기개 같습니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작달막한 양치기개 같습니다. 나도 이 드라마에서 한 가지 역할을 했으니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렉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이 드라마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렉의 드라마를 살펴보니 그렉은 출연료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캐스팅하는 자들에게도 출연료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것은 감독이 다 책임진다고 한다. 솔깃하다.

이제 그렉은 미완의 드라마를 보완하고자 한다. 감독은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드라마를 끝내고 싶어하신단다. 그 드라마에 모험을 할 스텝들과 배우들을 소집 중이다. 그렉의 말이 참 솔깃하다. 나도 이 드라마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가슴 뛴다. 나도 그렉이 소개하는 그 감독님께 캐스팅되어 이 위대한 드라마에 엑스트라라도 한 자리 하고 싶어진다. 이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며 가슴 뛰게 하는 드라마에 나처럼 당신도 초대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그렉의 대본을 집어 든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멋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슴이 뛸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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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 너머 통합적 천국을 소망하며

스캇 맥나이트, 예수신경, 새물결플러스

 

우리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이분법은 본능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과 여를 나누고, 노인과 소인을 나누고, 여당과 야당을 나누고, 교인과 비교인을 나눈다. 누가 가르치지 않는데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데는 도가 텄다. 신앙도 그러하다. 신앙도 나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을 나눈다. 믿음과 행위가 나뉘어 있다고 여긴다. 과연 그러한가?

믿음과 행위는 구분되지 않는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다. 자신이 믿는 대로 행할 뿐이다. 그것이 어찌 분리되겠는가? 말과 행동이 분리된다 하지만 사실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말은 곧 행동이며, 행동은 말에 다름 아니다. 믿음과 행위가 구분되지 않는다. 믿음은 행동이며 삶이다. 믿는 것과 살아내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믿는 대로 살던지, 아니면 안 믿는 것이다.

맥나이트는 이 점에 집중한다. 그는 성경 전체를 단순하게 집약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간단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삶에 다름 아니라는 것, 간단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 알아 들을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내지 못함에 있다.

맥나이트가 깨달은 바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은 이것을 회복하러 오셨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하나님께 회복시킨다. 자녀로 회복시킨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한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아바로 부르는 이웃은 가족이다. 어렵지 않다. 단순한 공리다.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본다. 회복의 은총을 입은 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회복의 일을 한다. 그것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예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포용하셨다. 건강한 자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자도 안으신다. 심지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문둥병자도, 유출병으로 고생하는 여인도 접촉하신다. 그리고 그 접촉은 회복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예수 가족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 단순한 공리에 헌신한 자들이 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초기 제자들이다. 그들은 이 공리에 이끌렸으며 헌신하였다. 훗날 이는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자리잡는다. 후기 제자에 속하는 바울은 이 예수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주인과 종의 경계가 무너지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 공동체는 로마 사회의 대안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예수 신경은 단순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다. 그 사랑에 헌신된 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식사하여 그 사랑을 전염시켜 나간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켜 나간다. 이것이 제자도요 예수를 따름이다. 이 단순공리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것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의 단숨에 읽힐 것이다. 눈으로 읽는 데 그치지 말고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읽어내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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