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칭의 논쟁 -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ㅣ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2
마이클 호튼 외 지음, 문현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2월
평점 :
30여년 전 중등부 회장을 할 때였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정도 되었고 남다른 열심 이 있었고 나는 장차 목사를 꿈꾸는 청소년이었다. 그런 나를 지독지리 괴롭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의 언어 형태였다. 그 분들은 내가 보기에 예수 믿은 지 적어도 30여년은 넘었고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에게서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는 나를 혼란케 했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게 뭐지? 그 딜레마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신학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얕고 좁은 신학체계에 있었다는 것을 곁눈질로 알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이신칭의’라는 말을 수백번, 아니 수천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써 천국간다는 말이 우리의 모토였다. 훗날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기 보다는 절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 시인하는 수준, 말로써 예수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이해했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다. 어쨌든 천국을 갈 테니 삶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사실 천국을 간다는 것도 정확히 맞는 말이 아니었다. 천국은 이미 우리의 삶에 시작된 것이니.)
‘이신칭의’라는 신학적 주제를 루터가 들고 거대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내부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4세기에 절정을 이룬 신학 풍토인 via modrena적 관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행위를 강조하였고, 그것은 남발되어 헌금 강요, 선한 일 강요-선한 일은 결국 돈과 직결되었다-로 이어졌고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그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가 강조하고 들었던 무기가 ‘이신칭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에 있다.’ 물론 루터 역시 칭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변화된 지위로서 우리에게 수반되는 선한 행위를 간과하진 않았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오직 믿음’에 있었고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듯 하다.
최근 루터파와 카톨릭은 ‘칭의’에 대한 기초적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고 이는 또 다른 논쟁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제임스 던,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샌더스가 선구자이지만) 소위 ‘새관점’ 학파가 등장하고 이들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강조한 이유에 대한 새로운(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재해 왔던 관점의 발견일 뿐이라 주장한다.) 관점을 들고 나타났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논쟁해 왔던 것과 달리,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게다. 당시 갈라디아나 안디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정결의식(할례, 음식 규례법 등)을 행해야 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교정의 일환으로 바울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이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게다. 오히려 우리는 개혁자들의 시대(16세기)를 지나 1세기 유대적 관점으로 회귀해야 바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다.
여기에 몇몇 신학자들이 더 뛰어 들었다. 보수적 개혁파 신학자인 마이클 S. 호튼, 진보적 개혁파인 마이클 F. 버드, 루터파 후예인 벨리-마티 카르카넨, 그리고 카톨릭 신학자 제럴드 오콜린스다. 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칭의를 다룬다. 핵심은 두 가지 정도다. ‘칭의’가 법정적 선언인지, 신분의 변화인지, 칭의로 구원이 완성되는지 아니면 칭의와 함께 변화된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이다. 또 하나, 과연 바울 신학의 핵심이 ‘칭의’에 집중되는가, 아니면 ‘칭의’는 그가 가르친 ‘칭의, 구속, 화해, 양자 삼음, 성령, 연합, 종말론적 선언 등’ 의 한 단면인가? 머리는 더 복잡해 지고 이해력은 한계에 이른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혹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 각각의 신학자들은 자기 입장에서 칭의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다 맞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편적인 부분에서 다 맞는 것 아닌가? 기다란 코도 코끼리고, 강한 다리도 코끼리고, 딱딱한 상아도 코끼리 아닌가? 단 그게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법정적 선언도 맞고 신분과 지위가 바뀌었으니 의로운 삶이 뒤따르는 것도 맞지 않는가?
물론 이들 신학자들은 참으로 예의 바르고 열려 있다. 자기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과 토론은 전문적 지식과 논증에 기초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상대의 말을 공감한다.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 나가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누군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이해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강조한 신학자의 충고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울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바울 이해라기 보다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해다. 바울의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마땅할 게다. 바울조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성령의 지혜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책을 오독할 가능성이 무서워 전혀 읽지 않는다면 그게 더 오해와 맹신을 불러 일으킬 게다. 그러니 도전해 보자.
나는 지금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칭의논쟁’을 읽어 나가면서 도무지 변하지 않는 나의 한계에 대한 딜레마요, 예수 닮지 못함에 대한 탄식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30년, 40년을 예수 믿는다 자랑하는(고위 직분자들?)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돋힌 말이요, 삶에 우러나오지 못하는 신앙형태의 딜레마다. ‘칭의’를 다시 가르쳐야 할까? 우리는 ‘칭의’를 과연 알고 있을까? 마크 트웨인의 탄식이 가슴을 친다.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우리는 언제쯤 ‘칭의’를 제대로 이해할까?(톰 라이트) 아니 언제쯤 ‘칭의’에 합당한 신자가 될까?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