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걸스 1 걷는사람 세계문학선 3
마샤 홀 켈리 지음, 진선미 옮김 / 걷는사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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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만 하루에 걸쳐 다 읽었다. 마샤 홀 켈리의 『라일락 걸스』.
실로 오랜만에 가독성 좋은 작품을, 한동안 잃었던 듯한 나의 집중력을 되찾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작품을 만난 것이다. 작가가 미국의 대형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활약하다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지만, 그 탄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독일과 폴란드의 주요 거점을 돌며 취재한 뒤, 3년에 걸쳐서 쓴 작품이라 하니. 소설은 실재 인물과 사건을 최대한 반영하여 쓰였다고 한다. 다만,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하다 보니, 사랑과 연애의 낭만적 서사가 적절히 가미되어 있다. 결말 역시 매끈하다. 충분히 울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소설은 나치 시절 독일에 있었던 유일한 여성 수용소인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반 수용소에 있었던 노역과 처형(학살)에 더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체 실험이 이루어졌던 곳. 그 실험 대상은 ‘래빗’이라 불렸다. 실험 토끼라는 의미도 있고, 실험으로 불구가 된 다리 때문에 토끼처럼 껑충거리며 다녔던 걸 비유하기도 했다.

소설은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셋 중에는 그 수용소에 근무하면서 신체 실험을 행했던 헤르타 외버호이저도 있었다. 지면상에 할당된 부분은 가장 적었지만, 읽는 동안 가장 자주 멈춰 서서 생각하게 했던 인물. 헤르타는 그 일로 실제로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냉전 시기 독일의 비위를 맞추려던 미국 정부에 의해 5년 뒤 조용히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나는 헤르타가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기 직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헤르타는 성적이 우수했고 외과의가 되길 원했지만 당시에 여성은 외과의가 될 수 없었다. 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까지 병에 시달려 헤르타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는데, 헤르타가 가진 피부과 전문의 자격으로는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헤르타는 외삼촌이 하는 정육점에서 내장을 분리하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내장이 온전히 한 번 분리될 때마다 어떤 의식처럼 외삼촌은 선 채로 헤르타를 강간했다. 헤르타는 그 지옥을 빠져나갈 궁리 끝에, 그리고 갈등 끝에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근무하기로 마음 먹는다. 외삼촌으로부터의 도피, 경제적인 사정, 그리고 외과의로 일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가해자(전범)인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인 헤르타.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그곳 수용소였던 거라면, 우리는 그를 가해자라는 잘 재단된 이름, 단일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분명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몸 위에 저질러진 반인륜적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또 한 가지, 수용소에서의 그 끔직한 장면들보다 더 나를 힘겹게 했던 건 수용소 이후의 삶이었다. 남은 자들의 남은 삶. 수많은 죽음들 곁에서 살아남았고 '죽음을 살아낸' 것에 가까운 자들이, 그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건 정말 가능했을까. 소설 역시 남겨진 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텅 빈 눈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저 버텨내기만 해야 했는지, 수용소 시절을 떠올리거나 말하는 일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이었던지를 묘사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페이지의 끝은 어쩔 수 없이 치유와 회복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기대어 위로받았지만 한편으론 그 매끈한 결말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로 홀로코스트 증언 문학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던 프레모 레비도, 헤르타 뮐러와 함께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공동 집필하기로 했던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남은 자의 삶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듯 별안간 떠나버리고 말았지 않나.

5년 전에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1년 동안 매일같이 아버지 꿈을 꿨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나는 늘 꿈속에서 야단을 맞거나 도망을 다녔다. 내가 나를 응징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그 사실. 멀쩡하게 옆에서 걷고 멀쩡하게 서로를 부르던 어떤 한 사람이 이제 없다는 그 사실은 꼭, 세상이 나를 따돌리고 있는 기분이었달까. 니가 이상한 거야. 니가 멀쩡히 살아있는 게 이상한 거야, 하고 속삭이는 것 같은.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죽음의 명단에 네 이름이 오르고, 그게 내가 아니라 네 이름이었다는 데 아파하는 동시에 안도했다면, 그렇게 해서 너는 죽고 나는 결국 살아서 온전히 그 명단 바깥으로 빠져나왔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바로 옆에 멀쩡하게 있던 사람이 없고 그 없음/없어짐에 나의 웃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들어갔다면, 나의 귀에 세상은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을까.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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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참아야 하죠? -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제는 참교육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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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의 이번 2심 판결은 1심 판결과 다르게, 피해자다움에 대한 심문이 아닌, 가해 당사자에 대한 심문이었다는 점, 그래서 위력을 이용한, 반복된 가해의 악의적 본질이 드러났다는 것을 변화의 핵심으로 꼽는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대한 심문이었다는 데 박수를 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박수칠 일인가.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상식 아닌가. 어느 법정에서 가해자(피고인)가 아닌 피해자를 의심하고 심문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사회는 여성이 입은 성폭력 피해에 있어서는 예외적 상식을 들이대기 일쑤였다. 그것은 상식 바깥의 영역, 남성들을 위해 예비된 ‘성역’의 공간이었다. 그 성역의 한 귀퉁이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판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판결을, 상식의 승리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안희정 사건은 개인적 성폭력 사건인 동시에, 온 국민이 지켜보는 공공의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했고 더 많은 이들이 그 싸움의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기도 했을 것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례로서도 중요하겠지만, 그 판결의 장면이 이 사회를 대표하는 장면으로서 누군가에게는 용기의 메시지를, 누군가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줄 것이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아무도 봐주지 않고 함께 싸워주지 않는 고립된 공간에서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안희정 판결의 장면이 가 닿지 못하는 후미진 곳. 각자의 복잡한 사정들이 얽히고설켜 그 빛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겪어내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그곳. 『제가 왜 참아야 하죠?』를 쓴 박신영 작가 또한 그 싸움의 경험, 특히 승리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미투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자신의 싸움과 승리의 경험들을 차분하고 단단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그는 우리나라의 미투 또한 우리들만의, 우리들 스스로가 일궈낸 경험으로 정의 내린다.

“미국 할리우드 미투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에서도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 미투 운동은 2017년 10월 영화 제작사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가 기사화된 후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미투’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하면서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년 전인 2016년 10월부터 ‘OO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달아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을 고발해왔습니다.”

물론 TV에까지 얼굴을 드러내가며 서지현 검사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한 데는, 세계적인 흐름과 분위기 또한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트위터라는 엄연한 SNS 매체를 통해 공론화했던 우리 자신의 체험을 더욱 중대한 것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박신영 작가의 이 언급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안희정 사건과 판결의 그 화두이기도 했던 ‘피해자다움’과 연관하여 재미있게 읽은 챕터는 <“그러게 왜 그 시간에 그런 데 있었어”>였는데, 그 중 특히 유쾌하고 시원했던 비유를 나누고 싶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하니 조심해야 한다니요? 우리는 갓 구워진 빵이 진열대에 헐벗고 나와 있어도 훔쳐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냄새를 풍겨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배달원을 때려눕히고 치킨을 훔쳐 먹지도 않습니다. 치킨이니까 당연히 유혹적인 것이지 치킨이 우리를 유혹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 인용한 내용뿐 아니라, 이 책은 작가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여성 ‘사회인’으로서, 그리고 ‘젊은’ 여성으로서 당해온 성폭력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항해서 싸워 이겼던 경험을 주로 담고 있다. 승리의 기록은 작가가 건네받았던 ‘불기소 이유 통지문’, ‘지방법원판결문’과 함께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담겨 있기도 하다. 작가는 그것이 싸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꼼꼼한 지도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다정한 친언니의 잔소리처럼 끝없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말하지 않고 우리가 잘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꽃뱀과 마녀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내가 이렇게 앞장서고 있다고, 함께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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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터 - 나는 내 팟캐스트가 제일 재밌다 아르테 S 2
영혼의 노숙자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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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고 존경하는 김은지 시인이 저자로 참여한 책이 출판되었다. arte 출판사의 S시리즈 중 두 번째 책, 『팟캐스터』.

정의하자면 팟캐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팟캐스트를 ‘위한’ 이야기가 골고루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일러주는 문체여서 후루룩 읽기 좋다.

김은지 시인은 <세상엔 좋은 책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힘들다: “세너힘”>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 중에는, 팟캐스트를 꾸리는 과정에서 ‘결정’의 리듬을 체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 이야기 속에, 팟캐스트를 함께 진행하는 ‘서보라 씨’에 대한 신뢰와 애정의 말이 하나 가득 담겨 있어 더욱 좋았다.

“그런데 보라 씨는, 하나의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래도록 선택 장애로 살아온 제게 그 균형감각은 신선함 그 자체였습니다. 제목은 이것으로 결정. 다음 책은 이것으로 결정. 인터뷰는 이 출판사로 결정. 제작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었어요. 결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므로! 이후로 저는 팟캐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할 때도 일이 착착 진행될 때의 이 리듬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하는 동안 ‘결정’의 리듬, 일상의 리듬, 삶의 리듬을 배우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대체로는 우리가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본래의 관성으로 돌아가기가 십상인데. 리듬이 스미는 데는 누구를 만나는가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내가 유연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한다. 이건 팟캐스트 <세너힘>에 대해 믿음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연한 몸을 가진 한 사람과 뛰어난 '결정'의 리듬 감각을 가진 한 사람이 만나, 책을 듣고 사람을 듣고 책방의 이야기를 열어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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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터 - 나는 내 팟캐스트가 제일 재밌다 아르테 S 2
영혼의 노숙자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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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함이 있는 이야기.
팟캐스트에 대한 팟캐스트처럼 입말이 살아 있는 책.
특히 세너힘의 김은지 시인과 서보라 팟캐스터의 이야기를 가깝고 따뜻하게 읽었고 영노자의 세 시기에 대한 사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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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위한 행복한 아트 테라피 내 아이를 위한 아트 테라피
정승환 그림, 유경아 글 / 소라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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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그야말로 제대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아트테라피북이 아닐까 싶네요. 백지이면서 채워져 있고, 이야기가 있지만 새 이야기를 채워 나갈 수 있게 한. 무엇보다 아이가 반겨서 더 반가운 책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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