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걷는사람 시인선 13
김은지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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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당신에게 큰 선물이 되어줄지 모르는 시집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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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프리즘 총서 11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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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타자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나 자신을 밀쳐내지도 않는 일. 손을 내미는 동시에 맞은편의 손에게 시간을 주는 일.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는 백인종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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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프리즘 총서 11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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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양식 서사의 외부에 있는 서발턴 여성, 그들은 재현될 수 있는가. 이 같은 물음으로 스피박은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답한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하나의 서사에 들어와 형상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죽음 속에서뿐"이라고. 그렇게 겨우 재현되었거나, 재현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죽음'의 예로써 등장하는 것이, 바로 스피박의 이모할머니인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죽음이다.

부바네스와리는 인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 단체의 일원이었고, 정치적 암살의 임무를 지시받았다. 그에게 그 과업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그는 대신, 정치적 신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그는 그 선택이 자신의 성적 정념에서 빚어진 임신 때문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생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런 식의 계획적인 죽음의 실행은, 사티 제도가 빚어낸 금기를 이중으로 역전시켰다. 하나는 남편을 뒤따라 죽는 것만이 예외적으로 승인되었던 여성-자살의 관습에 대한 역전이며, 또 하나는 생리 중이 아닌 '정결한' 몸을 불태워야만 한다는 금기에 대한 역전이다.

부바네스와리의 죽음이 하나의 쓰기 혹은 말하기가 될 수 있게 하는 지점은, 그 죽음이 인도 사회의 투쟁적 어머니라는 표상에도, 사티-자살이라는 서사에도 붙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여성은 일반화된 '생산양식 서사'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서발턴 여성인 것이다. 따라서 그 '바깥' 자체를 재현하는 방식(색다른 죽음)으로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와 같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 여성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삶은 사건이 되었을 때라야 간신히 언어화되고 가시화될 수 있다.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서발턴 여성'에 대해, 스피박이 논문의 행간에 심어놓은 말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일상의 모든 행위와 장면들이 생산양식 서사로 빨려 들어갈 때, 그 서사의 울타리 너머에서 멀뚱히 서 있거나 서성거리기만 하면서 울타리 안쪽을 바라보는 자. 자신의 욕망을 미처 알기도 전에 주류적 욕망을 강요당하거나, 주류적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끝내 이해하지 못한 자. 동시대 서구 유럽의 시민 주체, 혹은 동일한 사회 내의 남성 주체가 말하는 문법으로는 결코 자신의 욕망을 언어화할 수 없는 자.

그럼에도 푸코와 들뢰즈는 주체에 대한 담론은 물론 주체 비판 담론에서까지 '하나의' 단일하고 투명한 주체를 도입하고 있다. 그들은 권력/욕망/이해관계의 네크워크들이 너무 이질적이므로 하나의 서사로 환원하는 걸 경계해야 하며, 지식인이란 사회의 '타자'에 대한 담론을 알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주변 세계의 이데올로기 문제와 그들 자신의 입지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주권적 주체를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항적 욕망의 발현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 투쟁이다. 노동자 투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식민지로 활용되는 '제3세계'에서는 감행되기는커녕 상상될 수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스피박은 계속해서 푸코와 들뢰즈의 투명한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권력과 지식』에서 푸코가, 대중들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완벽하게, 잘,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기만당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할 때, 스피박은 이것이 서발턴에 대한 좌파 지식인들의 상투적 '복화술'이라고 지적한다. 재현이란 없으며 행동만 있을 뿐이라 말하면서 'representation'의 두 가지 의미, 재현하기/대표하기를 뒤섞어 버리는 들뢰즈에 대해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비판을 가한다. 소자작농들이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으며 오로지 "대표되어야만 한다"고 맑스가 말할 때 그가 represent의 자리에 vertreten(대표)를 기입하고 있다는 점을 참조하면서.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피억압' 주체를, 자신의 욕망을 알며 그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투명한' 주체로부터 분리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스피박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피억압 주체, 즉 서구 지식인들의 타자는 자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름 없는 주체 속에 거주할 법한 권력과 욕망을 지식인들이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바로 그 타자들에게 집중하는 '서발턴 연구회'조차도 간과하는 것이 있다고 스피박은 지적한다. 그들의 연구 과제는 세 번째 집단(전체 인도 인구에서, 지배적인 외국인 집단과 엘리트를 재현하는 토착 집단구성원들을 뺀 나머지)의 특수한 본성을 조사하고 측정하는 것인데, 이 프로그램이 지니는 본질주의적 오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목소리-의식(본성)은 필연적으로, 사회관계를 둘러싼 지식을 포함(차우두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고유한'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명확하게 제시될 수 없으며 또한 조사되거나 측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서발턴 주체가 지워지는 여정 내부에서 성차의 궤적은 이중으로 사라지게 된다. 역사 기술의 대상이자 봉기 주체는 남성인데, 서발턴 남성이 역사와 말을 상실한 자라면 여성으로서의 서발턴은 훨씬 더 깊은 어둠 속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포스트포드주의와 국제적 하청 하에, 영원한 비정규직 노동에 복무하면서 가난의 최하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제3세계 여성은, 앞서 언급한 부바네스와리와는 다른 '새로운' 서발턴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박은 여기서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이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집단과 대면하는 것이 "그들을 지구적으로 대표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재현(묘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이때 스피박은 분명 부바네스와리와는 다른 새로운 서발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 그가 부바네스와리를 두고 그가'말하기'의 윤리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스피박이 부바네스와리의 사례를 읽어냈으며(해독), 그 때문에 부바네스와리는 말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부시아의 지적. 그리고 모든 말하기란 해독의 차원을 담지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해독이 성급하게 서발턴의 '말하기'와 동일시되어서도 안 된다는 스피박의 느린 성찰.

뒤이어 그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에 대해 고민하기에 이른다. '서발터니티를 보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그는 서발턴 집단의 구성원과 시민권과 제도성의 회로들 사이에 소통의 선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통의 선이란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단단해지는 것이 아닐까. 지치지 않고 서발턴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집단과 대면하는' 과정 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대표하기와 재현하기를 급히 한 데 묶지 않으면서도, 대표를 통한 재현에 힘입어 우리 안의 타자, 동일성 내부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일 것이다.

웅크린 타자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나 자신을 밀쳐내지도 않는 일. 손을 내미는 동시에 맞은편의 손에게 시간을 주는 일.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는 백인종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즉, 서발턴 여성을 구제의 '대상'이 되게 하거나 욕망을 '아는 주체'로 의미화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들의 언어가 등 뒤로 사라져 그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그러면서 그들의 곁에 서서 천천히 따라 걷거나 크게 끄덕이기. 그렇게 그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리기. 그들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기다린다는 의미이리라. '소통의 선'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서툴고 거친 언어가 건너오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기 위해서, 대표하면서 재현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바로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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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회적 구성 - 지식사회학 논고 우리 시대의 고전 21
피터 버거 외 지음, 하홍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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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보장은?""그 보장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이고··· 네가 지금 너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집착은 너를 계속해서 제약한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두 인물,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대화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리메이크한 2017년 실사판 영화에서 각색된 대사.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보장은?'의 의미를 풀어보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와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이는 곧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헤겔은 자의식의 기초가 타인의 시선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하는 것이 동시에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타자의 메시지가 곧 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 달리 말해 이것은 동화(identification)이다. '정체성(identify)'과 '동화'가 동일하다(idem)라는 뜻의 같은 라틴어 어원을 취한다는 사실에서도, 한 인간의 정체성의 근거는 그 자신이 아닌 그의 외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터 L.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 또한 그렇게 말한다. "인간의 자기 생산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회적 기획"(87)이라고. 그런데 마찬가지로 그 사회라는 것 또한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인간과 사회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거칠게 설명해 본다면 이렇다. 두 사람 사이에서, 혹은 그 이상에게서 형성된 전형과 습관들이 지속적인 외재화 과정을 통해 제도로서 고착될 때 이것이 하나의 사회 즉 외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외부는 다시 한 개인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인식하게 하는 토대와 틀이 된다. 버거와 루크만은 사회 질서가 사물들의 본질적 부분이 아니고, 자연의 법칙들로부터 유래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89) 정체성과 관련된 언급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사회들은 역사를 가지는데, 그 역사의 과정에서 구체적인 정체성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역사는 구체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262)

이 진술만 놓고 보자면, 역사와 정체성 간의 변증법적 관계가 마치 팽팽한 힘겨루기의 양상을 띠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 사회의 제도와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대물림되는, 이 장대하고 힘센 역사 속에서 개인들이 한 토대를 다른 토대로 변형시키기란 쉽지 않다. 버거와 루크만도 외부로부터 조여들어오는 이러한 역사적 정의의 막중한 힘을 알고 있다.

정체성은 상징적 세계의 맥락 안에 놓임으로써 궁극적으로 정당화된다. 신화적으로 말해서, 개인의 '진짜' 이름은 그의 신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화의 우연성과 한계적 경험의 악의적인 자기 변형으로부터 보호된 우주적 실재 안에 고정시킴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이웃이 그가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그리고 심지어 그 자신마저 악몽의 고통 속에서 잊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진정한 자아'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세계 안에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재확인시킬 수 있다. 신들이, 정신병리학이, 또는 정당이 알고 있다.(157)

내가 누구인지, 꿈과 환각 속에서 잠시 잊었다 해도 내가 예전의 나로 돌아오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은, 신과 정신병리학과 정당이 부여하는 사회적 의미, 즉 객관적 실재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 안으로 스스로를 외재화"하면서 자신의 의미들을 '실재' 쪽으로 투사한다.(162) 이 과정은 대개 거의 자동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계가 왜 있으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고 당연시하면서 살아가는, 일상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듯 당연시되고 당연시되어야만 하는 세계를 저항과 의심 없이 수용하는 상태를 일컬어 성공적인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성공적인 사회화는 특히 '단순한' 사회, 즉 노동 분업이 단순하게 이루어지고 지식 분배가 최소화된 사회들에서 보다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이 "되어야 하는 바로 그 존재가 되"는 것. 농부는 농부가 되고 제사장은 제사장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의식에서 떠오를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에 보다 복잡한 지식 분배가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출몰할 가능성이 보다 짙어지는 것이다. 나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중재하는, 실제적·물리적·심리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는 '중요한 타자'들이 각각 다른 가치와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물음은 튀어오를 수 있다. 버거와 루크만은 여기서, 아버지의 부재 상황을 그 예시로 들고 있다. 중요한 일차적 사회화의 시기에 아버지가 부재할 때 그 가정에서 길러진 남자 아이는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에 의해서 여성적 세계의 '부적절한' 요소들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예시는 상당히 문제적이다. 친부-친모와 자식 관계라는 정상가족 모델을 신화화하고 남성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초역사적, 초맥락적으로 물화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두 번째 상황의 예시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듯하다. 그것은 일차적 사회화 시기에 중요한 타자들에 의해서 날카롭게 모순되는 세계들이 중재됨으로써 비롯되는 상황이다. 한 아이가 부모뿐 아니라 유모에 의해서도 키워지게 될 때, 그 아이는 지배적인 귀족정치의 세계(부모)와 예속된 농민들의 세계(유모) 사이의 모순을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세계 역시 후자에 해당하는, 복잡한 지식 분배가 행해지는 사회이다. 내 안에 수많은 모순되는 정체성들이 등을 움츠리거나 가시를 숨기고 있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가 아이일 때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을 '공적'인 생애로 내세우며 살아갈 수 있지만, 공적인 생애와 사적인 생애 사이의 비대칭을 내면적 갈등과 죄책감 등으로 감싸 안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버거와 루크만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들 자신에게 "잠재적인 배반자"일 수밖에 없다. 모순되는 세계 중에 한 세계를 선택하는 순간마다 다른 한 세계를 품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배반자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보다 성공적이지 못한 사회화의 세 번째 상황에 주목하게 된다. 일차적 사회화와 이차적 사회화 사이의 모순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하나의 실패. 누군가의 한 사회적 지위가, 기사가 되려 했던 그의 갈망을 어리석은 야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상황을 말한다. 이렇듯 한 개인이 맞닥뜨리게 된 사회구조가 주관적으로 선택된 정체성의 실현을 허용하지 않을 때, 흥미로운 발전이 일어난다고 버거와 루크만은 말한다. 주관적으로 선택된 정체성은 개인 의식 안에 '진정한 자아'로서 객관화되는 "환상의 정체성"이 되는 것. 이런 현상이 보다 폭넓게 퍼지면 제도적 프로그램들과 당연시되는 실재를 위협하면서 사회구조 안에 긴장과 불안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259)

나는 앞에서, 역사와 한 개인의 정체성이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도, 이 장대하고 힘센 역사 속에서 한낱 개인들이 한 토대를 다른 토대로 변형시키기란 쉽지 않다는 언급을 했다. "신들이, 정신병리학이, 또는 정당이 알고 있다"는 버거와 루크만의 서술도 이를 뒷받침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와 역사가 축적한 지식(knowledge) 체계라는 외부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의내리도록 강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과 관련된 기성적 체계에 대한 질문이 솟아오르게 하는 매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매듭은 바로 한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 객관화하는 "환상의 정체성" 속에 있다. 버거와 루크만은 이런 현상이 확대되면 당연시되는 이 세계, 즉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실재에 위협이 되고 사회구조 안에 긴장과 불안이 생기게 되리라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진술 안에서 나는 오히려 정체성에 관한 열림과 변혁의 가능성을 본다.

버거와 루크만 역시 이미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저서 3부의 3장 <정체성의 이론들>에서 정체성과 관련된 심리학적, 정신병리학적 이론들과 정의들, 그리고 수많은 병명들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이며, 사회적 맥락에 의존적일 수 있는지를 논증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중립'으로 중무장한 그 이론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소위 탈가치적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등이 얼마나 가치담지적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일한 양태에 대해 이름 붙여지는 '증상'은 사회나 시대마다 다르다. 외지의 아이티인들은 악마에 홀려 있고, 뉴욕의 지식인들은 신경과민인 것처럼. 물론 귀신에 홀림과 신경과민은 둘 모두 객관적/주관적 실재의 구성 요소이다. 하지만 각각의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면 그런 정의들은 즉각적으로 무용지물이 된다.

새로운 심리학적 이론의 도래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특히 흥미롭다. 현재적으로 당면한 경험적 현상들을 기존 심리학이 설명하지 못할 때, 또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어떤 '사실 이전에' 권위 있는 이론이 요청될 때, 새로운 이름의 증상이 출현하게 된다고 그들은 꼬집어 말한다. 그러한 새 '증상'은 변태(變態)한 정체성의 새 이름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정체성이란, 실재라는 '무대의 조명'에 따라 다른 컬러의 옷을 입게 되는 '가변의 의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위로부터의 조명이 지배 계급의 정치적 공작이라면, 아래로부터의 조명은 대중들이 품은 "환상의 정체성"을 외부를 향해 지속적으로 열어 보이는, 운동의 확대에 있지 않을까. 한 개인의 '성공하지 못한 사회화'가 '실패'로, 혹은 교정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정체성으로 기입되게 하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 해도 기입 역시 고착이며 고착은 곧 제도화로 이어진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입의 운동을 강조하는 이유는, 한 사회의 객관적 실재가 규범 및 가치의 절대적 척도가 될 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사회가 정의하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구도 아래에도 놓이기 때문이다. 정상성이라는 규범의 울타리 안에 포함되지 못한 '탈락들'은 실패로서 각인된다. 그런데 한 사회의 필요충분조건인 규범의 울타리를 쳐낼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속적인 기입의 운동밖에는 없지 않은가. 들뢰즈·가타리를 참조한다면, 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필연적인 포섭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도주와 탈영토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 "환상의 정체성"을 정치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또한 필요할 것 같다. 버거와 루크만은 이러한 환상의 정체성을 두고,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야기될 수 있는 우연적 현상으로만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흑인여성 페미니스트이자 이론가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는 "정체성이란 스스로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스스로를 정의할 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해석할 권위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그럴 권리가 있는지를 의심하며 그렇다고 보는 가정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흑인여성이 실제로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정의하든지 간에, 자기정의는 인간주체로서 흑인여성의 힘을 긍정하는 행위이다.

콜린스는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으로써 '자기정의'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조여들어오는 정의가 나를 억압하고 주변화시키기 위한 가치로만 범벅되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의 억압적 정의들을 뛰어넘어 내가 나일 것이라고 믿는 그것, 내가 되기로 한 바로 그것(환상의 정체성)을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기입의 운동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열등한 자/배제된 자로 정의된 '나'를 새로운 것으로 정체화하고 긍정하는 힘 기르기(empowerment)이기도 하다.

콜린스는 이때 존중respect을 강조하는 흑인 페미니스트 사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무도 흑인여성을 존중할 의무가 없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자기를 존중해야 한다고 권고했으며 타인 역시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고. 존중respet은 그 어원을 리스피케레re-spicere에 두고 있다. '거듭 새롭게 보고, 보여진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글의 첫머리에 제시했던 헤겔의 말, 자의식의 기초가 타인의 시선에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그런데 헤겔이 말하는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은 콜린스에게로 와서는 '자기로부터의 시선'이 된다. 자기 정의와 자기 존중 말이다. 타인의 시선이 온통 어둠뿐일 때, 자기 정의와 자기 존중을 통해 나는 스스로에게 빛을 선물할 수 있다. 물론 내가 '나'들이 되고 우리가 될 때 그 '힘 기르기'는 더 큰 힘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웹진 쪽 https://zzok.co.kr 에도 송고했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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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의 주장 동문선 문예신서 288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 동문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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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가 우리에게 내린 ‘저주’의 말들로부터의 일탈은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는 어떻게 ‘다른 것’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이 책 『안티고네의 주장』을 통해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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