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프리즘 총서 11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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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양식 서사의 외부에 있는 서발턴 여성, 그들은 재현될 수 있는가. 이 같은 물음으로 스피박은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답한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하나의 서사에 들어와 형상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죽음 속에서뿐"이라고. 그렇게 겨우 재현되었거나, 재현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죽음'의 예로써 등장하는 것이, 바로 스피박의 이모할머니인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죽음이다.

부바네스와리는 인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 단체의 일원이었고, 정치적 암살의 임무를 지시받았다. 그에게 그 과업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그는 대신, 정치적 신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그는 그 선택이 자신의 성적 정념에서 빚어진 임신 때문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생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런 식의 계획적인 죽음의 실행은, 사티 제도가 빚어낸 금기를 이중으로 역전시켰다. 하나는 남편을 뒤따라 죽는 것만이 예외적으로 승인되었던 여성-자살의 관습에 대한 역전이며, 또 하나는 생리 중이 아닌 '정결한' 몸을 불태워야만 한다는 금기에 대한 역전이다.

부바네스와리의 죽음이 하나의 쓰기 혹은 말하기가 될 수 있게 하는 지점은, 그 죽음이 인도 사회의 투쟁적 어머니라는 표상에도, 사티-자살이라는 서사에도 붙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여성은 일반화된 '생산양식 서사'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서발턴 여성인 것이다. 따라서 그 '바깥' 자체를 재현하는 방식(색다른 죽음)으로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와 같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 여성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삶은 사건이 되었을 때라야 간신히 언어화되고 가시화될 수 있다.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서발턴 여성'에 대해, 스피박이 논문의 행간에 심어놓은 말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일상의 모든 행위와 장면들이 생산양식 서사로 빨려 들어갈 때, 그 서사의 울타리 너머에서 멀뚱히 서 있거나 서성거리기만 하면서 울타리 안쪽을 바라보는 자. 자신의 욕망을 미처 알기도 전에 주류적 욕망을 강요당하거나, 주류적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끝내 이해하지 못한 자. 동시대 서구 유럽의 시민 주체, 혹은 동일한 사회 내의 남성 주체가 말하는 문법으로는 결코 자신의 욕망을 언어화할 수 없는 자.

그럼에도 푸코와 들뢰즈는 주체에 대한 담론은 물론 주체 비판 담론에서까지 '하나의' 단일하고 투명한 주체를 도입하고 있다. 그들은 권력/욕망/이해관계의 네크워크들이 너무 이질적이므로 하나의 서사로 환원하는 걸 경계해야 하며, 지식인이란 사회의 '타자'에 대한 담론을 알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주변 세계의 이데올로기 문제와 그들 자신의 입지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주권적 주체를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항적 욕망의 발현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 투쟁이다. 노동자 투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식민지로 활용되는 '제3세계'에서는 감행되기는커녕 상상될 수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스피박은 계속해서 푸코와 들뢰즈의 투명한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권력과 지식』에서 푸코가, 대중들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완벽하게, 잘,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기만당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할 때, 스피박은 이것이 서발턴에 대한 좌파 지식인들의 상투적 '복화술'이라고 지적한다. 재현이란 없으며 행동만 있을 뿐이라 말하면서 'representation'의 두 가지 의미, 재현하기/대표하기를 뒤섞어 버리는 들뢰즈에 대해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비판을 가한다. 소자작농들이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으며 오로지 "대표되어야만 한다"고 맑스가 말할 때 그가 represent의 자리에 vertreten(대표)를 기입하고 있다는 점을 참조하면서.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피억압' 주체를, 자신의 욕망을 알며 그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투명한' 주체로부터 분리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스피박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피억압 주체, 즉 서구 지식인들의 타자는 자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름 없는 주체 속에 거주할 법한 권력과 욕망을 지식인들이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바로 그 타자들에게 집중하는 '서발턴 연구회'조차도 간과하는 것이 있다고 스피박은 지적한다. 그들의 연구 과제는 세 번째 집단(전체 인도 인구에서, 지배적인 외국인 집단과 엘리트를 재현하는 토착 집단구성원들을 뺀 나머지)의 특수한 본성을 조사하고 측정하는 것인데, 이 프로그램이 지니는 본질주의적 오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목소리-의식(본성)은 필연적으로, 사회관계를 둘러싼 지식을 포함(차우두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고유한'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명확하게 제시될 수 없으며 또한 조사되거나 측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서발턴 주체가 지워지는 여정 내부에서 성차의 궤적은 이중으로 사라지게 된다. 역사 기술의 대상이자 봉기 주체는 남성인데, 서발턴 남성이 역사와 말을 상실한 자라면 여성으로서의 서발턴은 훨씬 더 깊은 어둠 속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포스트포드주의와 국제적 하청 하에, 영원한 비정규직 노동에 복무하면서 가난의 최하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제3세계 여성은, 앞서 언급한 부바네스와리와는 다른 '새로운' 서발턴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박은 여기서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이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집단과 대면하는 것이 "그들을 지구적으로 대표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재현(묘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이때 스피박은 분명 부바네스와리와는 다른 새로운 서발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 그가 부바네스와리를 두고 그가'말하기'의 윤리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스피박이 부바네스와리의 사례를 읽어냈으며(해독), 그 때문에 부바네스와리는 말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부시아의 지적. 그리고 모든 말하기란 해독의 차원을 담지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해독이 성급하게 서발턴의 '말하기'와 동일시되어서도 안 된다는 스피박의 느린 성찰.

뒤이어 그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에 대해 고민하기에 이른다. '서발터니티를 보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그는 서발턴 집단의 구성원과 시민권과 제도성의 회로들 사이에 소통의 선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통의 선이란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단단해지는 것이 아닐까. 지치지 않고 서발턴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집단과 대면하는' 과정 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대표하기와 재현하기를 급히 한 데 묶지 않으면서도, 대표를 통한 재현에 힘입어 우리 안의 타자, 동일성 내부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일 것이다.

웅크린 타자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나 자신을 밀쳐내지도 않는 일. 손을 내미는 동시에 맞은편의 손에게 시간을 주는 일.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는 백인종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즉, 서발턴 여성을 구제의 '대상'이 되게 하거나 욕망을 '아는 주체'로 의미화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들의 언어가 등 뒤로 사라져 그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그러면서 그들의 곁에 서서 천천히 따라 걷거나 크게 끄덕이기. 그렇게 그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리기. 그들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기다린다는 의미이리라. '소통의 선'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서툴고 거친 언어가 건너오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기 위해서, 대표하면서 재현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바로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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