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한국 재벌 흑역사 상.하 세트 - 전2권 한국 재벌 흑역사
이완배 지음 / 민중의소리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재벌들 민낯을 보여준다.

 한 편씩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있어 읽기에 부담도 없고,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삼성, 현대, 롯데, SK. 다만 LG가 없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만큼 깔끔한 기업이라 그런 것은 아닐텐데... 지금 탈세가 밝혀지고 있는 중이니까.


 4개의 재벌로 끝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업들 흑역사가 공개되어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 효성 등... 소재는 차고 넘칠 테니까.

 후속작을 기대해 본다.


"절망은 희망을 이길 수 없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화된 무기력‘이라는 실험을 통해 희망과 절망의 차이를 우리에게 알려줬다. 셀리그만은 24마리의 개를 세 집단으로 나눈 뒤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 A방에는 전기 충격을 멈출 수 있는 버튼이 있었고, B방에는 전기 충격을 멈추는 어떤 장치도 없었다. C방에는 전기 충격 자체를 가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극심한 고통에 A방과 B방의 개들은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고통에 몸부림치던 A방의 개들은 우연이었건 무엇이건 고통을 멈추는 스위치를 발견했다. 실험이 반복될수록 A방의 개들은 쉽게 버튼을 찾았고, 고통을 더 쉽게 멈췼다.
24시간이 지났다. 이번에는 A, B, C 세 방 모두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 이번 실험에서는 A방에 주어졌던 ‘고통 멈춤용 스위치‘가 제거됐다. 대신 세 방 모두에 담벼락을 만들어 놓고, 그 담벼락을 넘으면 전기 충격이 멈춰지는 새로운 장치를 설치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 A방의 개들은 과연 담벼락을 넘어서서 고통을 멈췄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당연히 A방의 개들은 처음에 버튼부터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첫 번째 실험을 통해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아로새겨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을 멈출 방법이 반드시 어디엔가 있을 거야‘라는 희망 말이다.
그렇다면 난생 처음으로 고통에 직면한 C방의 개들은 담벼락을 넘어서서 고통을 멈췄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다‘이다. 이들에게는 고통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A방의 개들이 첫 번째 실험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연이건 뭐건 고통을 멈추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마지막 B방의 개들은 담벼락을 넘어서서 고통을 멈췄을까?

B방의 개들은 두 번째 실험에서 전기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 극심한 고통을 온 몸으로 다 받아들였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절망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도전하지 않았다. ‘이 고통을 없앨 방법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아‘라고 절망했을 뿐이었다.
희망을 가지면 고통은 멈추고 세상은 변한다. 하지만 절망에 사로잡히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역사가 늘 진보하는 이유는 인류가 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프랑스 시민들의 혁명 이야기.
지금은 쉽게 이야기하지만 혁명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문 당하고,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공포를 이겨냈다. 그들은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냈을까? 원동력은 바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들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희망의 승리를 거뒀다.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새겨지는 데는 한 번의 승리만으로 충분했다. 이 한 번의 승리는 프랑스 시민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원동력이 됐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는 더디지만 조금씩 진보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는 기술의 진보나 물질적 풍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인류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다. 인류 발전의 역사는 도덕적 권리와 공감의 확대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처음에는 왕만 누렸던 권리가 귀족들에게 확대됐고 그 권리는 점차 민중들에게 전파됐다. 남성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여성에게,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노예에게 전달됐다. 이것이 바로 진보하는 역사의 본질이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자본의 지배 아래 놓여 살지만, 자본가만이 누리는 그 권리는 결국 노동자, 농민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이긴 해도 역사는 그렇게 도덕적 권리와 공감의 영역을 넓히며 앞으로 전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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