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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 미투 운동에서 기후위기까지
리베카 솔닛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평점 :
실은 낙담하게 되는 소식만을 듣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자꾸만 누군가의 존재가 지워지고, 누군가의 이야기는 없던 이야기가 되고,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어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때로는 지워지는 집단에 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한 채로 타인의 지워짐을 바라보아야 하는 입장에 서기도 합니다. 해변에서 하는 모래놀이처럼 얼마나 더, 언제까지 더 곧 지워질 이야기를 써내야하는지 마냥 아득하게 느껴져 암담해질 때도 있죠.
국외로 눈을 돌려보면 수많은 사례를 쉽사리 찾아볼 수 있기에 백래시가 올 것임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것이 어떤 형태일 것인지를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만, 마주하고 나니 더욱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날들입니다.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겨울바람에 몸을 움츠리듯, 빙판길을 걷듯 이전보다도 더욱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게 되고,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리베카 솔닛의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많이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저는 언제나 솔닛의 글이 위로의 글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확고하고, 명료하고, 때로는 신랄한 솔닛의 어조와 위로는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네가 마주한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야'라고,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라고 단언하는 리베카 솔닛의 글은 그 무엇보다도 힘이 되는 위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는 현재 굉장히 거대하고 근사한 건물을 함께 건설하는 중이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리베카 솔닛의 글이 지닌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직은 형태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하게 느껴지는 '근사한 건물'이 이미 눈 앞에서 빛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요.
책 속에서 리베카 솔닛은 미국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지만 위트있게 묘사합니다. 성범죄와 가부장제, 도시의 이름 등 생활의 곳곳에 녹아있는 젠더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부터 낙태와 관련된 법안 등 미국 사회가 마주한 백래시, 그리고 트럼프를 위시한 미국의 백인 남성 중심적 정치 및 사회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드러나는 미국 사회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 꼭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마냥 답답하고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솔닛이 묘사한 바와 같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눈부시고 강렬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집단적 변화의 과정"이 책 안에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어나가며 이러한 폭풍같은 혼란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힘으로 모두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임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리베카 솔닛의 확신에 찬 어조와 함께 읽으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저는 이 책은 결국 우리가 품어야 할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하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희망의 이야기는 책 속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인종에 대한 이야기로, 기후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어나갑니다. 우리에게는 목소리를 높여야 할, 우리의 목소리를 여전히 잘 들어주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한편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두고 포기할 수 없겠다는 감상이 들게도 하고, 또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느리지만 달라지고 있음을 깨닫게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리베카 솔닛의 글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사회적 약자를 향한 헌정이자 위로라고,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현재 굉장히 거대하고 근사한 건물을 함께 건설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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