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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번역된 일본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60년대. 그 시절에 폭풍같이 등장하여 ‘감수성 혁명’을 불러일으킨 김승옥의 소설은 얼마나 많은 청춘들에게 소외된 자기내면의 아름다움을 표출해낼 수 있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우리 감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많은 이들이 문학계로 뛰어들면서 한국적 문학의 시류를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서울대 문리대는 대한민국의 현대 문학사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무위자연의 공간, 무릉도원의 분위기를 화폭에 풀어놓을 때, 그 매력의 화룡점정 역할을 하던 것은 언제나 소나무와, 학과, 안개였다. 나에게 안개는 무릉도원 속의 이미지로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하지만 작가 김승옥은 안개를 무진이라는 공간에 덧씌움으로서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다시금 되살려 놓는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도시 ‘무진’과 그 무진을 ‘여귀가 찾아와서 내뿜어 내놓은 입김처럼 뒤 덮고 있는 안개’를 만들어 내었고, 이 안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에 표현되는 참으로 일본적인 ‘설경’과 비교되어, 참으로 한국적인 ‘안개’를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이 안개는 1980년대 기형도의 <안개>로 이어졌고, 2000년대 공지영의 <도가니>를 통해서 무진이라는 공간과 함께 다시금 안개가 살아나기에 이른다. 이렇듯 한 작가가 연상해 낸 이미지가 50년이 넘는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한국인들의 얼굴에는 깊게 드리운 안개가 누구에게서나 보이게 마련이다.
1960년대, 산업화 시대의 출밤점에 선 한국사회의 모습, 그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자본주의가 잠식하기 시작하는 물질주의,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개인. 속세를 벗어나서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내고 싶지만, 결국은 사회속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숨긴 채 살아내며, 내면이 아닌 표피로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이 작품에서는 표현해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주인공의 ‘무진’과 같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싶을 때 찾아가는 그러한 공간이 있지 않을까? 여기서 주인공은 그렇다고 해서 그 과거의 모습을 딱히 바꾸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모습을 현실로 가져오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용으로만 간직한 채 묻어두고만 있다.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편지에 많이 썼듯이, 지금도 쓸쓸하게 존재하고 있을 과거의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자신이 쏟아 낸 단어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느낀 소외감으로, 그 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그렇게 찾아온 것일까?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지만 얼핏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안개’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 안개속 공간을 찾아간 주인공에겐 사랑도 슬픔도 분노도 아픔도 기쁨도, 그 어떤 감정과 기분도 한 가지가 강조되거나 강요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감정으로 희미하게 존재하고만 있다.
이번에 접한 단편 모음집은, 단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복선이나 상황에 대한 암시와 같은 기법들이 많이 배제된 채 자신의 시선이 옮겨가는 곳으로, 자신의 생각이 옮겨가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격이라 쉬이 읽히지만, 여러 페이지를 다시 되돌아가서 읽고, 또 읽게 만드는 ‘도돌이표’가 여러 군데 찍혀 있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작가 특유의 문체도 한 역할을 하였다. 최인훈 작가의 문체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자신의 시선을 풀어낸다.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멋스럽게 표현하려 노력한 흔적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서양문학을 접할 때는 무언가 자신의 내면과 싸워가는 그런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다면, 한국 작가들의 글을 접할 때는 번역본에서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작가들만의 문체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하지만 이런 문체를 어떻게 감정이 없는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점점 더 한국작가들의 관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무진기행보다 <서울 1964 겨울> 작품이 훨씬 깊게 다가왔지만, 한국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문학적 표현의 혁명을 이끌어 낸 그러한 기념비적인 성격과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무진이라는 미지의 공간과, 그런 공간을 더욱 살려낸 ‘안개’라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김승옥을 대표하는 작품이 <무진기행>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