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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식탁 - 돈키호테에 미친 소설가의 감미로운 모험
천운영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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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이 막힌 코로나판국에 눈치 없이 봄바람이 났다면 이 책을 쥐어주고 싶다. 우리모두 먹는 일에 대동단결하는 한국인의 밥상이니까. 작가의 가지 유머 덕분에 가지요리하고 딸들에게 엄지척 받았다. 스페인으로 또 여행간다면 꼭 가져가야지. 메뉴주문도 문제없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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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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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죽지않고 살아남기] 

작가의 내밀한 의도를 파악하는 독서는 쉽지 않다. "매니아"라고 불리는 독자들은 그것에 일치를 맛본 사람들 일거다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예니 에르펜베크의 소설연극을 전공하고 오페라를 연출한 이력에 걸맞게 소설의 형식도 독특하다장과 장 사이에 <막간극>을 끼워 넣어 죽은 자를 부활시킨다소망이 있는 부활이 아니다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신의 선물은 더더욱 아니고. "만약에 ...다면처럼 후회를 빌려와 다시 살린 <그녀>를 전쟁과 이데올로기 피바다에 던져 놓는다.

<죽지 않은 그녀>는 죽은 친구의 애인을 짝사랑하다 자살하고 <다시 죽지 않았을 그녀>로 파시스트가 되어 핵심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하나의 사상인가아니면 단 한 명의 인간인가?// 그러나 그녀는 체제 안에서 배신당하고 팔아 넘겨져 처형된다하지만 작가는 또 다른 막간극으로 <또 다시 죽지 않고 살아가는 그녀>로 새로운 시대를 이어간다계단에서 추락한 공산주의 작가를 살려내 요양원의 치매노인으로 천수를 누리도록 소설을 완성한다.

//죽음은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일생에 걸친 전선인 걸까?// 

우리 모두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한 걸음씩 멀어져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단지 과거를 팔아서 미래를 살 수 있을 뿐이다어떤 죽음이든지 죽음은 죽음이다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다는 차이뿐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죽음과 삶을 성찰한다독특한 소설의 구성이 무거운 분위기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독서의 몰입을 끌어낸다.

이 소설에는 사람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그녀는 마지막 장이 되어서야 <호프만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였고 그녀의 딸도 그녀이다파시스트 동지들의 이름은 모두 알파벳 이니셜로 부른다익명성은 이 소설의 전면에서 마치 도전적인 자세로 독자에게 질문하는 듯하다

//인간이 무엇으로 인간을 알아보는지난 잘 모르겠다.//

작가의 독특한 문체 또한 여느 소설과 다른 매력을 지녔다쉼표와 쉼표 사이. (어떤 문장에서 나는 10개의 쉼표를 찾았다.) 첫 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문체에 당황했지만 곧 무거운 주제의 소설을 탄력 있게 이끄는 것이 독특한 매력이라는 것을 알았다쉼표와 쉼표 사이 의미에 집중하다가 시간으로 빠져들게 된다에르펜베크가 10년전에 출간한 <그 곳에 집이 있었을까>라는 절판된 소설까지 찾아 읽어보았다호숫가 집을 배경으로 역사의 이면의 인간을 깊게 추적하는 능력이 탁월한 소설이었다.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좋은 작가의 책은 독서의 여운이 진하고 길어서 작가의 다른 책을 찾게 만든다가끔 함정이 있다술술 읽혀지지 않는 함정에 빠지면 이내 책을 덮어버리는 인색한 독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 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서점에서 검색했을 때절판되어 중고 책을 구입했는데거의 읽지 않은 새 책을 받았다아마도 따옴표가 하나도 없는 페이지들을 보고 '이건 아니잖아소설인데...'하면서 책꽂이에서 오랜 시간 동면 중이었던 것은 아닐까

함정에 빠지지 않고 좋은 소설을 쓴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이어가는 것만큼 독자의 손에 들려져 읽혀지는 책의 생명도 쉽지 않다전쟁도 없는 평화의 시대에 책을 읽기란 왜 그리 쉽지 않을까

덧붙임소설에도 읽히지 않는 책이 등장한다첫 번째 //이럴 거면 내가 뭐 하러 학교에서 괴테를 암기하고 그랬을까요?//하고 과부 신세를 한탄하는, <그녀>의 죽은 남편이 부모님에게서 졸업선물로 받은 가죽장정의 괴테전집이다이 책은 매 장마다 죽지 않고 전쟁을 다 겪어낸다책은 오래 오래 산다사람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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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룻기 읽는 설교 시리즈
조영민 지음 / 죠이선교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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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미 훌륭한 이야기 / 읽는 설교_룻기 / 조영민 저/ 죠이선교회


"한 번 읽어봐요. 참 좋아요." 남편에게 권했다. "룻기는 이미 훌륭하지." 그의 명쾌한 답변처럼 그렇다. 이미 구약성경의 룻기는 그대로 훌륭하다. 어쩌면 구약성경을 읽은 모두가 동감할지도 모른다. <나눔교회> 담임목사인 저자와 그의 룻기 설교를 들은 성도들도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래서 더 이 책이 반갑다. 


우리의 지금 모습이 투영되어 나오미의 삶에 겹쳐 보인다. 텅 빈 공허와 궁핍과 고통이 느껴진다. 그녀에게 없는 빵이 우리에게는 실제 빵 일수도, 직장일수도, 건강일수도 그리고 사랑일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나오미에게 내 모습을 입히고 룻기를 읽는다. 누군가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를 기다리는 이 일수도, 누군가는 아직도 모압 땅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다. 모두 공허와 만족 없는 차가운 시대 속에 하나이다 . 


조영민 목사도 그런 시대와 더 차가워진 교회들 속의 한 목자로 성도들 앞에 서있다. 새롭게 담임목사로 부름 받고 성도들 앞에 서 있는 이의 심정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의 부활을 바라는 기도를 알 뿐이다. 누구나 그 기도로 제자의 길을 가며, 누구나 그 소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이 춥고 사사 시대처럼 혼란스런 공기를 마신다. 그들의 텅 빈 가슴에 참된 쉼으로 평안하기를 구하는 설교. 따뜻한 빵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자는 설교. 그 사랑의 이야기를 설교라는 무거운 그릇에 담아 부드럽게 나눴다.


아홉 편의 설교는 온기를 주며 다가와 열기를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인애하신 구세주를 나누고 나오미에서 보아스로 살아가려는 뜨거움을 심었다. 나오미로 머물러 있지 않고 룻이 되고 보아스가 되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는, 아주 잘 아는 이야기로 뜨거운 예수 그리스도를 살고 싶게 만들었다. 너무나 작은 것으로 울고 웃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빵집에 빵을 채워주시는 분과 함께 사는 평안이다.


룻기를 알고 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전에 믿었다, 이미. 그러나 살아내고 있는가, 지금. 나에게 준 그 사랑에 반응하고 있는가, 오늘. 지적과 비난에 빠른 그 입을 다물고 다시 읽으라. 이미 훌륭한 이 책이 입의 말보다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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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편지 쓰는 시간 -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배달된 손으로 쓴 편지
니나 상코비치 지음, 박유신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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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을에 편지를 쓰겠다면 누구라도 그대가 된다_혼자 편지 쓰는 시간/니나 상코비치/북인더갭]

일년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신의 첫 책을 쓴 니나 상코비치. 그녀는 새로 산 집 헛간에서 트렁크 속에 든 오랜 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편지를 하나씩 읽어보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100여년 전 누군가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그 삶을 엿보며 그를 상상한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읽기는 시대와 나라를 넘나들며 다채로워졌다. 12세기 중반의 수도원에서 보내지는 비밀스런 연인들의 속삭임부터 아들을 잃은 링컨대통령을 위로하는 편지들까지. 수 많은 편지 나눔의 뒤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 사이에, 또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수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 사이에, 직접 손으로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라고 그녀는 편지가 남아있는 이유를 생각한다. 버려지지 않고 보관된 편지의 존재감은 한 인간의 역사로 다시 새겨진다. 남아있는 편지가 아니면 기억되지 않았을 누군가의 이야기는 책으로 묶여지고 사연으로 읽혀지며 새로운 편지를 쓰게 한다

"때로는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연결되어 있고 그 사람들이 나를 단단히 붙잡아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한 때가 있다 ." 

편지로부터 얻게 되는 연결의 확신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저자가 소개하는 연인들의 편지에는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영혼을 내보이던 사랑으로 뜨겁다. 편지를 쓴 누군가는 쓰고 보낸 후에는 편지의 주인이 아니다. 받는 이가 주인이다. 소유권이 바뀌는 편지를 통해 주고받는 영혼의 통로를 여행한다. 온 몸으로 떠나지 않아도 인생의 모험이 가득하다

편지는 물리적인 거리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떠나있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며 숨은 고백으로 공범자가 되었다가 서로를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운명이 된다. <내부자의 시선>으로 떠남을 극복하게 하는 편지는 손으로 쓰여지고 눈으로 읽어가나 마음에 저장된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은 짧았다가 때로는 길어지고 끊어지기도 하여 애간장을 녹이지만 인생의 받아들임으로 보관된다.

저자의 읽기 욕망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편지 사연과 사람들의 이름을 읽어가기에 버거울 정도다. 구구하고 절절하다. 분명 니나 상코비치라는 작가는 욕심쟁이가 틀림없다. 누군가의 삶의 시간이 모두 의미 있게 다가와 놓치고 싶지 않은가 보다. SNS로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저녁식사 메뉴까지 알게 하고 싶은 욕심쟁이와는 다른 차원이다. 자신을 봐달라고 몸부림치는 시대에 빛 바랜 편지들을 붙잡고 있다. 지나간 이야기들 속에서 저자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한다면 당신도 찾게 될 것이다. 이미 어느 구석에 있는 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연애편지며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쥐어준 "엄마, 사랑해요."의 쪽지들을 말이다. 아마도 책의 내용보다는 잃어버린 편지들과 답장 받지 못한 친구의 소식과 차마 붙이지 못한 편지에 집중하게 될거다. 그런 편지 한 장을 보낼 만큼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쓰지 않고 쳐 박아둔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고 종이 한 장을 과감하게 펼칠 수도 있다. 설령 우표 한 장이 없어서 좌절하거나 동네 우체국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 당황할지라도 괜찮다. 간절함은 자잘한 고생들은 뛰어 넘을 테고 그렇지 못해도 잘못은 아니다.

혼자 글을 쓰고 내 이름을 적고 봉투에 넣는 순간 배달은 시작된다. 보내지기 전까지 편지의 주인은 나다. 나의 간절함이 편지를 받을 이의 간절함 보다 크다면 편지는 배달 될 테니까. 영혼의 간절함은 바다를 넘고 하늘을 날아 신대륙에 닿는다. 편지는 그렇게 배달된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의 손에서 봉인이 해제된다. 그 순간 두 영혼의 만남이 시작된다.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일주일 후에 전사했고 이 편지는 아내에게 전달되었다. 그 후에는 바람이 늘 그의 숨결을 그녀에게 배달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당신의 볼을 스치면 그것은 나의 숨결일 것이며, 차가운 공기가 욱신거리는 당신의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한다면 그것은 나의 영혼이 지나가는 흔적일 겁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혼자 편지 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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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미식수업 - 먹는다는 건,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후쿠다 가즈야 지음, 박현미 옮김 / MY(흐름출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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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끼 때운다고? 부끄러운 줄 알아_나 홀로 미식 수업/후쿠다 가즈야/흐름출판]

감히 말하겠다. 먹는 일을 스타일로 생각하지 못하는 자, 이 책을 열지 말라. 둘 중 한 가지로 반응이 분명해진다. 열 받아서 책을 집어 던지고 싶어지거나, 한 번 이렇게 살아 봤으면 좋겠다로. 나의 경우는 정확하게 전자의 반항심으로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시지."하면서 읽기 시작했고 이렇게 서평까지 쓴다고 두들기고 있다

고단샤 에세이 상까지 수상한 저술가의 책이라 기대를 가졌다고 고백하겠다. 하지만 가즈야씨도 자평한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유혹과 함정에 빠지지 않고 컨디션을 유지했다는 성취감이 기성복 같은 식사가 아니라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는 우월감과 얽혀서 정말 맛있게 만찬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저란 인간은 정말로 밉살스런 인간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가 정말 밉살스러웠다.

책을 내려놓지 않았던 것은 끈기 있게 미식에 대한 세계를 펼치는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른다 .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 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 가즈야씨는 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는 것은 정말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로 평가했지만 그의 주장처럼 "매일 무엇을 먹는가, 어떤 식으로 먹는가에 의식을 갖는 일"은 삶의 단편으로 인생을 들추는 듯 하다.

신에게 삿대질하며 본능에 충실한 조르바도 외친다. "먹는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답니다. 과히 나쁠 것도 없겠지요."

음식을 보는 순간 스마트 폰 부터 들이대는 이들에게 그는 도전한다. "살아 있음 그 자체의 기쁨을 실감하며 먹는 일에 대해 나름의 태도를 가지라." 가즈야씨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밉살스런 미식체험 뒤에 숨어있는 속내를 보물찾기 놀이처럼 제안해보는 것은 아닐까? 미슐랭 별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이들에게 욕먹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던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심오하다. "요리의 세계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만들어지고 세련되어졌습니다. 그런 역사 속에서만 일정한 미의식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미의식은 앞서 말씀 드린 문화적 축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미의식에 도달하려면 초일류의 것을 접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초일류는커녕 삼시세끼 집 밥 이라도 제대로 먹으면 다행인 형편인데 이 책을 왜 읽겠냐고 한다면, 세계 명화 한 점도 실제로 보지 못했지만 미술관은 쉽게 드나드는 마음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술책에 인쇄되어 있던 고흐를 보려고 돈을 쓰며 바다를 건너가 실제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 만족감이 그의 미식 수업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의 주장에 들썩이던  반항심은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보려는 욕망은 나도 만만치 않음을 고백하고 비로소 잦아들었다. 더구나  테이블 매너라는 불편한 소재로 자유에 대한 소신을 펼 수 있는 그의 자신감은 삶의 모든 부분에 진지한 성찰과 태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며 후한 점수까지 줘버렸다

" 오랜 세월을 거쳐 다듬어진 테이블 매너란, 다양한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 질서를 지켜 타인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배려의 축적입니다 . ... 하지만 묵묵히 규칙을 지키는 것은 식사라는 즐거움과는 충돌되는 면이 있습니다. 즐거움은 자유나 편안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까요. ... 자유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본질을 파악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본질을 파악하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자신의 머리로 판단할 수 없다면 자유 따위가 성립할 리 없습니다."

또 배웠다. [나 홀로 미식 수업]을 하는 고수에게 감히 덤비던 아줌마는 내가 누리지 못하니 얄미워서 무시하려던 옹졸한 마음을 접고 말았다. 모두가 추구하는 미의 세계가 있다. 감히 누가 그 아름다움에 돌을 던지랴. 하물며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미각을 위해 던지는 이에게는 오죽하랴. 설탕을 팍팍 쓰는 대세 집밥선생도 고개를 숙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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