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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폭스 갬빗 - 나인폭스 갬빗 3부작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워도 재밌다. 마블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 이질적인 우주 전쟁에 계속 빠져들게 된다. 고유명사는 반복되니 그러려니 하고, 체리스-제다오 합일체에 반해 끝까지 읽게 된다. 체리스의 몸에 제다오의 의식이, 그의 근육기억마저 흡수된다는 설정은 색다르다. 몇백 년 전,  대학살을 일으킨 미치광이 상관 제다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지닌 체리스, ‘한 몸 두 영웅’은 기존 영웅 서사에선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설정이다. 


단순히 재미뿐인 SF소설이었다면 끝까지 읽지 못했다. 제국의 욕망, 숫자를 가지고 노는 전쟁터, 인류를 축소해놓은 일곱분파, 주인공(합일체)의 끝없는 내적 의심과 갈등 같은 게 없었다면 말이다.


 말은 어렵지만 서사는 가볍게 읽히고, 가볍게 읽히지만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작가 그 자신의 말로 밝히듯 <나인폭스 갬빗>은 제국주의와 이민족 탄압을 비판한다. 이질적이고 이상하고 메시지마저 강한 <나인폭스 갬빗>은 가상공간을 뛰어넘어 일상에도 손을 뻗는다. 다른 믿음, 다른 체계,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현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역법을 사용하는 존재들을 가차없이 처형하고 소멸시키는 육두정부, 거대 제국의 욕망이 이글거린다. 체리스는 점령 당한 요새를 되찾기 위해 아군에게 자살 명령을 내린다. 활활 타는 욕망 앞에 생명따윈 안중에도 없는 세계다.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단의 목숨은 또 얼마나 싼가.



 ‘등롱꾼 이단 한 명의 생명은 칠두정부 한 명의 생명과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다. 

적군의 목숨은 결코 우리 병사의 목숨보다 못하지 않다.

이 간단한 수식을 그녀는 지금에야 비로소 이해했다.

그러나 켈 사령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제국의 멈출 줄 모르는 ‘제국 지키기’, 숫자로만 기억되는 인간들…. 제국, 전쟁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우주라는 공간에 섬세한 묘사로 펼쳐내는 일, 저자의 솜씨가 놀랍다. 수학자인 저자의 이력 덕분이겠지만, ‘숫자'에 대한 생각도 꽤 재밌다. 순수성, 정수론 등 당연히 잘 모르는 수학 이야기다. 그래도 수학이 가진 체계와 연산에 의해 작동되는 진형은 ‘숫자 전쟁’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아예 새 것의 상상을 가져오게 만드는 요소들, 예를 들면 난공불락의 ‘불변성 얼음’, 충성도에 따라 효능이 달라지는 ‘경계면 탈곡기’ 같은 걸 그려보는 게 지루하지 않다.


 일곱 개의 분파를 이해하는 것도 재밌다. (니라이는 어떻고, 슈오스는 저렇고, 분파를 파악하면… 뭔가 뿌듯함)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을 매번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분파를 기억했다. 분파를 잘 알수록 체리스와 제다오 사이 긴장도 배가 된다. 켈과 슈오스의 팽팽한 줄다리기. 한껏 미쳐 수백만 명을 죽여버린 제다오이므로. 맞서 싸워야하는 것은 이단인가, 제다오인가 아니면 정부인가. 체리스의 치열한 고민은 지켜보는 입장에서 재미가 쏠쏠하다. 체리스-제다오의 케미는 <나인폭스 갬빗>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마지막, 목숨을 건 반란이 시작된다. 제국의 기계(시리즈 이름을 노린 건 아닌데...)가 드디어 눈을 뜬다. 체리스는 준비한다. 이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거대한 계획을. 체리스는 이제야 깨닫는다. 적군이나 아군이나 같은 값어치의 생명임을. 그녀는 육두정부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반란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며, 그녀는 증발해버린 병사들을 끝없이 기억할 것이다. 더 이상 ‘제국’의 무아지경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모래시계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반란 또한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남은 삶을 그에게 바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닷물은 사지가 잘려나가고 증발한 병사들을 기억하며, 

위조 동전처럼 함부로 던져진 죽음들을 애도하며 밀려들어오고 빠져나갈 것이다.’



 2부가 기대된다. 어려운 단어 고개는 넘었으니 이제 맘놓고, 목만 빼놓고 다음을 기대하면 된다. 체리스의 반란이 어떻게 전개될지, 육두정부와 불사신 쿠젠의 실체를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이 제국은 과연 무너질 것인가. 더욱 살벌하고 기이하게 펼쳐질 역법 전쟁. 마블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2부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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