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 운명과 선택 - 한국 근대 페미니즘 문학 작품선
백신애 외 지음 / 에오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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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당당히 말하고 표현한 ‘신여성들’

[서평] 『신여성 (운명과 선택)』(백신애, 이선희, 나혜석, 강경애, 김명순, 임순득, 지하련, 에오스, 2019.02.11)

 

각 사회마다 ‘신여성’은 존재해왔다. 신여성이란 불평등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표명하는 일군의 여성 집단이다. 여기서 신여성은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초기 세대들로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지녀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고 기존의 결혼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부류다. 지금까지 다양하고 뜨거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왔다.

 

‘신여성’은 우리나라의 경우 주로 일제강점기에 많이 사용된 용어다.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전통적인 여성에 대립되는 신여성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구한말에서 1910년대까지가 신여성층의 형성기라고 볼 수 있다. 신여성은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서구 사상과 본격적으로 접합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역할에 눈을 뜨게 하였다.

 

식민지 시기 여성 작가는 ‘선각자’라 불리는 1세대와 이어 해방 이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인 2세대로 구분된다. 책 『신여성』은 이러한 1, 2세대 여성작가들을 망라한 선집이다. 해방 이전에 사망하거나 해방 이후 월북한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책은 조망되었다.

 


강단 있는 여성 묘사와 세련된 어휘

 

처음 소개할 작가는 백신애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여성 최초로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백신애는 1933년 대구에서 결혼한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하여 스무 편이 넘는 작품들을 완성했다. 이후 췌장암으로 만 31세에 사망했다. 비록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작품 활동을 했지만 소설 22편과 수필 및 기행문 33편을 남겼다. 오늘날 ‘백신애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백신애 작가의 소설 <꺼래이>는 1934년 발표된 작품이다. 작품은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만주에 간 순이를 통하여 만주로 떠난 조선인들의 현실을 그렸다. 꺼래이는 고려, 즉 조선 사람을 가리킨다. 작가는 ‘순이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조선인 모두를 당찬 여성 순이로 대표해 작품에 그려 넣은 것이다.

 

<순이는 벌떡 일어나 “우리도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테니 선실 안으로 들어갑시다.”하고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들어오라고도 않는데 공연히 들어갔다 봉변당하면 어찌 하게.”하고 젊은 사내는 손을 흔들며 반대했습니다.>

어린 여성 순이는 오히려 겁에 질린 어른들과 남성들을 달랬고, 손수 잠자리 배정을 요구하고, 먹을 빵을 나누는 강단을 보였다.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고 마치 로봇같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 길인지, 죽음의 길인지, 삶의 길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얼어붙은 혼(魂)만이 가물가물 눈을 뜨고 엎어지며 자빠지며 총대에 휘몰려 쩔름쩔름 걸어갔습니다.>

 

이 부분에는 ‘로봇’이라는 어휘가 등장한다. 당시 시대와 비교하자면 정말로 급진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선희 작가의 소설 <계산서>는 1937년 발표된 것으로, 식민지 근대화 시기의 도시에 생성된 가부장적 이념들과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보였다. 백화점 여점원이나 카페 여급 같은 도시 서비스직 여성의 내면 묘사를 보인 점이 좋았다. 소설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과거에 대한 화자의 감정을 토로하면서 시작한다.

 

<내가 집을 떠난 지가 벌써 일곱째의 밤. 앞으로 몇 조각의 밤을 더 누릴 목숨인지 모르거니와 밤의 펄럭이는 휘장 속에서 불길한 까마귀와 같이 떨고 있다……. 두만강을 끼고 며칠이고 왔다. 두만강의 돌들은 검은 개흙을 뒤집어쓰고 누런 강물 밑에 말없이 엎드려 있었다.>

 

당시 남성 작가들도 ‘감정 토로’를 소설 첫 부분에 내세우기 일쑤였다. 여기서 묘사는 매우 섬세하고 생생한 편이다.

 

이혼녀와 여성 작가라는 시대의 딱지

 

나혜석 작가는 1927년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 여행길에 오른 뒤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의 유명한 신여성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도 꼽힌다. 여성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였고 식민지 조선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했으나, ‘이혼녀’라는 낙인 속에 냉대 받는 삶을 살았다.

 

대표적 작품인 <경희>는 1918년 발표된 소설이다.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점이 눈여겨 볼 부분이다.

 

<아아, 경희는 어느 길을 택하여야 당연한가? 어떻게 살아야만 좋은가?>

 

<아버지며 어머니며 그 외 여러 친척 할머니 아주머니가 저를 볼 때마다 시집 못 보낼까봐 걱정들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도 같다. 경희는 이제까지 비녀 쪽진 부인들을 보면 매우 불쌍히 생각하였다. ‘저것이 무엇을 알고 저렇게 어른이 되었나. 남편에게 대한 사랑도 모르고 기계같이 본능적으로만 저렇게 금수와 같이 살아가는구나. 자식을 귀애하는 것은 밥이나 많이 먹이고 고기나 많이 먹일 줄만 알았지 좋은 학문을 가르칠 줄은 모르는구나. 저것도 사람인가…….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의 딸보다 먼저 하나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

 

강경애 작가는 1924년 단편소설 <파금(破琴)>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 속에서 외면당하곤 했다. 김명순 작가는 여성 유학생이자 여성 작가로서 한국문학 최초로 에드거 앨런 포를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시, 소설, 수필, 희곡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여성의 자유연애론에 대한 사회적 배척으로 인해 불우한 삶을 살았다. 김명순 작가의 작품 <탄실이와 주영이>는 1924년 발표된 것으로 마치 고전 홍길동전과 같은 문체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때 구골 사는 최 소사는 난리 틈에 20이 넘은 장성한 아들을 죽이고 딸 둘을 데리고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그러므로 철없고 아는 것 없는 여편네 생각에 그 고을에서 흔히 중류 이하 가정에서 하는 것처럼 딸 둘을 기생에 넣었다. 그래서 최 소사는 나중까지 그 딸들을 의지하고 살려했던 것이다. 언니를 산월이라 하고 동생을 영월이라 하였다…….>

 

불평등이 남아있는 한 외침은 계속된다

 

1940년대는 대다수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서거나 침묵해야 했던 엄혹한 시기였다. 이 시기 임순득 작가는 일제 말기의 파시즘 속 성, 계급, 민족을 아우르는 여성 해방론을 외친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였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것을 강조하며 이를 문학 속에 담아냈다.

 

신여성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와 조선의 가부장제의 이중 억압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7명의 신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자신이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 애썼다. 이들은 교육받을 권리, 결혼할 권리, 이혼할 권리, 투쟁할 권리를 외쳤다. 그 결과 자신의 욕망을 말하고 글로 표현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외국물을 접한 신여성들이 당시 ‘여성들’의 아픔만을 강조했다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시대적인 아픔을 담은 흔적을 작품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신여성들의 입장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는데, 외국문물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상도 원인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가부장이라는 한민족의 유산을 신여성들의 작품만보고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 비판가들의 입장이다.

 

오늘날은 여성의 활동이 과거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불평등한 위치가 남아 있는데, 이를 인지하는 여성들로 인해 여성 평등에 대한 외침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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