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함을 인식하는 순간으로부터 고통은 시작된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연인, 가족, 집, 명예와 같은 내가 가진 것들이 나에게 영속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프랑스 작가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로 세상과 처음 조우하는 유년 시절부터 생의 중후반인 오십까지의 시간을 바라본다. 이 시간의 끝에는 결국에 '작별'의 고통을 안고 가는 인간의 숙명이 드러난다.
두 편의 글을 읽은 후, 이보다 더 나은 제목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읽기 전에는 작중 인물이 계속되는 불운한 사건들로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사건들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어림짐작해보았다. '1999년 프랑스의 베스트셀러'라는 표지문구와 비오는 날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별 이유없는 이끌림에 고른 이 책은 생각 이상으로 일상적이었다. 시시하고 지루하다는 그런 뜻이라기보다 넓은 공감의 경험을 선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진부한 말이지만 모두가 겪었을, 또는 겪을 모두의 인생의 함축이다.
어린 시절의 고향을 묘사하는 문장이 많고 다이나믹한 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대한 서사의 여운을 못 이기고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의 기분으로 있었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작별과 상실의 순간이 두려워서 일까,아니면 이미 겪어봤기 때문인 걸까.
태어난지 얼마 안된 어린 아이는 고귀하며 완전한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상실을 겪으며 머리가 커버린 소년은 어른이 된다. 그리고 세상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란 걸 깨닫는다.
해가 거듭하면서 우리는 어디가 어디인지를 차츰 알 수 있게 되었고 몇몇 장소를 우리만 아는 비밀 기지,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숲속의 마구 뒤엉킨 바위들 사이로 흐르는 시내는 책 속에서처럼 마법의 골짜기라고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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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은 마법의 고장, 온간 길들을 따라 헤매고 다니는 한 무리 아이들인 우리의 꿈이 가득 서린, 오직 우리의 상상만이 지배하는 영토로 변했다. 마을 이름, 농가 이름 하나하나가 다 수수께기요, 숨은 메시지였다.
어린 아이에게는 침범 못할 놀이의 세계가 있다. 놀이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그곳이 어두운 방 한구석이건, 작은 마을의 아늑한 아지트이건. 레몽에게는 그 유년의 공간이 트랑, 그리고 집이었다.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한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게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거야?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 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코.
놀이는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어린 레몽이 처음 자각한 충격적인 순간이다. 놀이로 만들어진 완벽한 환상과 유희의 세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 어린 날의 작은 환희를 깨부수는 것부터, 즉 울타리를 넘는 것이 앞으로 있을 수많은 작별의 시작이었다.
삶도 언젠가는 끝나야할 놀이이다. 처음에는 작은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겠지만 점점 큰 것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영원히 남아있을 줄 알았던 것은 손바닥 안의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나는 우리가 트랑에 이사와서 자리 잡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버지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의 죽음이었다.
그들 사이에 더는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술을 마셨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사랑이 죽어버린 것일까? 어린 아이는 이런 의문들을 품지 못한다.
나는 마치 무슨 주문인 양 다음과 같은 기도를 되풀이 했고 또 그 기도를 믿고 싶었다.
“하느님 부디 우리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어린 우리의 행복 속에 들어앉아 꽁꽁 문을 닫아걸었다. 우리의 온갖 의식들, 놀이들, 그 마법의 세계 속에 그것은 잊어버리기 위한, 아닌척하기 위한 한낱 비눗방울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미칠 듯한 행복을 이기지 못하며 매일 매순간을 그윽하게 음미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저녁마다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모두가 다 함게 뜨거운 가족애 속에서 진하게 살고 있는 바로 그때, 가정의 심장부는 모든 것이 타버린 재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대체 얼마 동안이나 지탱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각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후의 밤마다 되뇐 내 마법의 기도는 영원히 그만큼 덧보태진 절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생(生)으로 내던져지면서 우리는 부모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나를 믿어줄 인연을 만난다. 그 안에서 받고 자라가는 행복을 입안 가득 음미한다.
그리고 처음 말을 알게 되고, 더 많은 음식을 먹을 줄 알게 된다. 욕심이 생기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갖는 법을 배운다.
득(得)이란,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부여되는 축복인 것이다. 누군가 그랬던가. 아이가 주먹을 쥐는 이유는 세상을 모두 잡기 위해서라고. 반대로 죽을 때쯤의 사람은 주먹을 쥐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나’와 형제의 근간. 가정의 중심인 부모님의 관계는 생각보다 그리 튼튼한 것이 아니었다. 세월과 생활의 풍파 속에 사랑은 그리 견고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상실감이란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여서 어리고 순진한 아이는 결국 절망에 도달했을 것이다. 특히나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뿌리들이 흔들리는 것이란, 믿어왔던 무한한 사랑의 샘이 쪼개지는 순간이란 세상의 붕괴와 같다.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어릴 적부터 수없이 그려온 그 관계를 몇십년간 유지하는 것이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걸 깨달은 것은 막상 얼마 되지 않았다.
94쪽
나는 문득 트랑에 이사온 직후 우리가 즐겨했던 어린아이 놀이를 상기한다. 우리 어린 축의 아이들은 묘지에서 회색 돌 위에 새겨놓은 아기천사상을 훔쳐가려고 아기무덤들을 찾아다녔다. 색칠한 작은 아기천사상은 예뻐 보였기 때문에 수리한 낡은 장난감, 병뚜껑, 상표가 예쁜 깡통, 작은 장난감 자동차, 셀룰로이드제의 작은 인형 등 우리가 주워 들인 수집품 목록에 그것도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묘지는 놀이터였다. 놀이터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가장 흥미진진한 놀이터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 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126쪽
이게 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는 이 집이 우리 집이 아닐 것임을. 어린 시절의 집, 행복과 불행의 집. 다 끝났다. 나는 벌써부터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어서 떠나자. 이 집은 죽음의 냄새가 난다.
130쪽
그러나 방 하나하나는, 가구 하나하나는, 물건 하나하나는 한 번씩의 작별이다. 이 집은 이제 더는 우리 집이 아니다. 어머니의 그늘이 도처에 깔려있다. 어머니의 목소리, 어머니의 침묵, 어머니가 없는 이집은 죽은 집이다. 우리는 집 안에 바싹 붙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소리를 내지만 이제 우리가 여기서 쫓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치 지상낙원에서 쫓겨나듯.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제 레몽이 잡을 실체는 사라져간다. 과거의 행복의 집합인 집은 지금의 집과는 다른 곳이다. 이제 그것을 의지할 것은 영혼에 조각된 기억들 뿐이다. 오십년이 지나서야 이제 작별의 순간을 모두 겪은 어른이 된다. 유년의 가족은 언젠가 사라진다. 수많은 만남과 생성을 당연하게 기뻐했던 것에 반해 이별에 따르는 무게란 후회와 회한의 무게로 가혹하다.
청춘. 화양연화. 한. 그리움.
이런 말들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난걸까?
우리는 왜 애를 쓰며 '인생사진'을 남기고, 많은 것을 기록하고 저장하려 할까?
그것은 작별을 조금 더 미뤄보려는 않으려는 인간의 작은 고집이다.
그저 '순간'에 조금 더 내 남은 힘을 쏟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작별에 무뎌지기를 기다리기보다,어차피 겪을 후회의 무게는 조금이나마 가볍게 느끼고 싶다.
영원하지 않아서 더 빛이 나는 것.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