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 즉 '실서증 없는 실독증'이란 내가 글은 어려움 없이 쓸 수 있지만 정작 쓴 글은 읽을 수 없음을 뜻한다. 희귀한 질환이다.  (78쪽)

 

나는 열혈 독서광이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뼈이자 골수, 림프액이자 피다. (81쪽)

 

베스트셀러 작가인 하워드 엥겔.

인쇄된 글에 중독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할 만큼 열렬한 독서가였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글을 읽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시각 기능이 망가져 시야의 4분의 1이 보이지 않게 되고 기억 상실증까지 걸리게 된다.

이 모두는 뇌졸중 및 뇌 손상에 의한 결과였다.

 

작가로서 실독증에 걸렸다는 것은 큰 장애가 아닐 수 없다.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읽을 수 없다면  퇴고와 교정과 같은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탐정소설을 썼던 그이기에 섬세하고 정확한 글을 쓰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원망하며 지금까지 쌓아온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쓸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몇 권의 책을 더 써냈으며 '책, 못 읽는 남자'라는 자서전적인 책까지 집필했다.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 그것을 바로 글의 소재로 다룬 것이다.

 

이 책은 그가 병원과 재활원 생활을 거쳐 다시 집에 돌아와 치유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문자들이 전혀 낯선 문자로 다가오고 그것을 어렵게 배우고 나면 기억상실증이란 것에 발목을 잡혀 다시 반복해서 공부해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연민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에게 정말 죄송하다. 그러나 소설가들이 흔히 말하듯 나는 단지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내 정신 상태의 윤곽을 그리려 한다. 나의 정신은 더 이상 맑은 풀장이나 흠집 하나 없는 수정 같은 상태가 아니다. 그나마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든 글을 써내야 하는 형편이다. (146쪽)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독자를 사로잡았던 이 작가는 독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내놓았던 어떤 작품보다 진실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과 그 치유과정을 재미없게 나열해가고 있는 거 같아서 작가는 독자의 양해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병원진료카드를 보듯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병명과 상태, 치유하기 위해 시도해 보는 여러가지 방법들의 나열, 지나온 행적들이 부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독자를 지루하게 할 수도 있고 이야기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두고 읽게 만드는 것이 적어도 내겐 있었다.

 

그처럼 지독한 독서광이 아닐지라도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큰 충격이 된다.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도 실독증을 앓고 있는 그가 어떻게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책을 집필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극복하기 쉽지 않은 이 난관을 어떻게 이겨낸 것일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앞에는 색이 바랜 은제 트로피가 있다. 내 이름이 고등학교 시절인 1948년이라는 연도와 '연기상'이라는 문구와 함께 찍혀 있다. -중략- 나는 왼손 기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극 무대만 있으면 무조건 섰다. (35쪽)

 

나는 가장 가깝고도 정겨운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를 찾아온 이의 할머니가 결혼 전에 가졌던 성은 기억날지언정 내 침대 곁에 앉은 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나는 예전부터 호칭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용케도 그 사실을 들키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건망증을 실독증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이름을 잊어버리거나 다른 사람 소개를 엉망으로 하더라도 한결 느긋해졌다. (85쪽)  

 

책임 치료사는 목소리도 명랑했고 화법도 다채로웠으며 생생히 설명하는 소질이 있었다. -중략- 이 물리치료사가 적당한 격려의 말을 어찌나 잘 찾아내던지 나는 감명을 받았다. 언젠가 그녀가 책을 한 권 내면 좋겟다. (105쪽)

 

왼손 기형이라는 선천적인 장애도 그의 도전 정신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막지는 못했다.

실의와 슬픔에 빠져있을 법한 병원 생활도 그에겐 새로운 경험이며 배움의 장이었다.

실독증을 겪고도 몇 권의 책을 더 냈던 그는 재활원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그들이 떨어뜨려준 색깔 입힌 돌들을 따라 숲은 빠져나오는 길을 찾았다고 말하는 그.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그의 책을 앞에 두고도 그들에게 한평생을 빚을 졌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겸손함을 넘어선 그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읽는 연습을 하며 기억력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그가 쓴 글을 읽어 줌으로써 퇴고를 도와 주거나 가족들의 생활을 돌봐 줌)과 컴퓨터 작업을 통해 그의 책은 완성되어 갔다.

그 길고도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글쓰기에 대한 그의 열망이 아니었을까?

유머, 도전 정신, 긍정적 마인드, 침착함, 따뜻한 인간미까지 갖춘 그이기에 실독증이란 큰 장애도 작가의 길을 가로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전 뼛속까지 작가입니다. 다른 기술을 배우기엔 너무 늦었죠." (21쪽)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어린 소년의 맑은 눈망울보다 더 순수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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