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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의 책을 읽을 때마다 저릿하게 느끼는 감정. 어째서 그녀는 아직도 이런 감성을 잊지 않은 걸까. 이토록 세밀하게, 마치 그때가 지금인 것처럼 그 모든 소녀 시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걸까.
까르르한 웃음과 흔들흔들하면 자칫 흘러넘칠 듯 출렁이던 농밀하던 감정의 흔들림을 집어던지고, 사회가 바라는 꼼꼼하고 딱딱한 껍질을 입은 나와 달리 아직도 그 감정의 소용돌이를 제대로 느끼며 묘사하는 그녀에게 나는 종종 그리움과 아련함 그리고 더불어 약간의 질투를 느낀다.
그렇기에 온다 리쿠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혹은 싫어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된다. 언제나 기대한 만큼의 이야기를 끌어내기도 하며, 또한 내가 필요로 했던 그 이상의 충족을 안겨 주기에.
리에코와 마키오, 아키히코, 세쓰코 이 네 명의 친구들이 떠난 여행을 그려낸 이 책, 왠지 강하게 원하는만큼 손에 잡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겨우 잡은 책 앞에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의 여행에 살짝 발을 들였다.
일본인듯 하지만 외부와의 차단된 섬에서의 여행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제3의 세계인듯도 하다. 커다란 물의 없이 흐릿하게 이어오던 그 넷 사이의 관계는 이 여행으로 그들 인생의 가장 큰 마무리가 된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하나의 완결점을 향해, 숲처럼 그립고 무섭고 힘들게 찾아든다.
사실 로맨틱과 아련함을 원하는 독자로서 리에코의 절대적인 마음을 배신한 마키오의 속마음의 고백은 결코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어른스러운 성숙함으로 꾹 눌러내리며 마키오의 마음을 읽어간다. 겉모습이 가장 어둡고 침착해 보였던 리에코가 의외로 가장 심플하고 단순한 감정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면 약간 의외일까. 하나씩 드러나는 친구들의 속사정과 감정의 어지러움은 겉보기와 정반대의 순서로 흘러간다. 어둡고 건조했던 마키오보다 싹싹하고 경쾌한 세쓰코의 마음을 읽어내기가 오히려 더 아릿했다면 답이 될까.
온순한 산을 따라, 점차 격해지는 구릉을 따라, 그리고 온몸의 쉬던 근육을 일깨워 온몸 저릿하게 올라가던 그들의 산행을 따르면 피톤치트 가득한 산림욕을 한듯 노곤하고도 생기넘치는, 기분좋은 여행을 맛볼 수 있다. 아련하고 자꾸만 뒷이야기가 궁금해 지는 것은 또 하나의 기분좋은 덤이다.
봐도 봐도 끝없이 흘러나오는 온다 리쿠와의 반가운 만남을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