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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경심 세트 - 전3권
동화 지음, 전정은 옮김 / 파란썸(파란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엄밀히는 동명의 드라마의 위엄을 알고 있었다. 원작이 있다는 얘기에 역시 원작을 볼까말까 고민하다 우연히 1권을 읽게 되었다. 처음엔 3권까지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책을 손에 잡은지 1시간만에 반쯤 남은 책을 덮었다. 1권을 다 봐버리면 3권이 손에 들어올 때까지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이나 책으로 향하는 손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세계를 끊어냈는지 모른다. 3권까지 도착할 사이에 다른 책을 다 봐야지 싶었는데 딴 생각에 책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더라
드디어 3권까지의 책과 밤을 새지 않고도 충분히 책을 볼 수 있는 주말이 갖춰졌다. 덮어뒀던 책을 펼치고 비로소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현대에서 평범한 25살 회계사였던 장효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3백여 년 전 청나라 강희 43년, 팔황자 윤사의 저택. 그녀는 이제 팔황자의 처제이자 곧 궁녀가 될 열세 살 소녀 약희다.
만주족 13살 소녀, 마이태 약희,가 된 장효는 당찬 품성과 특유의 기지로 황자들의 사랑과 신의를 얻는다. 그리고 황자들 중 실세였던 팔황자의 처제이자, 최고 권력자의 궁녀로 살았던 시간은 사람 좋아하던 말괄량이 열셋 소녀를 목숨으로 친구를 구하고 물처럼 흘러가는 사랑을 알게도 된 스물여덟 여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랜 시간을 집중하며 봤던 1권과 달리 2권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약속 때문에 억지로 끊은 3권을 들고 집밖으로 나왔지만, 무겁게 넣어온 책을 단 한번도 가방 밖으로 꺼내지 않고 돌아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더 이상의 방해는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나는 이 책의 대충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다. 늘 응답받지 못했던 약희의 오랜 사랑이 드디어 짝을 만났다. 그것도 근 10년 가까이 끌어온 애절한 마음이었다. 겨우 찾은 이 행복한 시간이 지나면 약희의 사랑은 또 다시 갈 곳을 잃게 된다. 약희의 시점으로 이뤄진 책을 읽으며 그녀의 마음에 공감해온 내가 그녀의 마음이 찢겨지고 배신당하는 것을 겪는 것은 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양 아프고 괴롭다. 그래서일까. 밖에서 3권을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은.
제3자인 내 마음이 이런데 그녀는 오죽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보게 될까. 뒷이야기의 축축한 감정은 미뤄두고 방금까지 읽었던 윤진, 옹정제와 약희의 평온한 하루를 떠올렸다. 끌어안은 황제의 품에서 눈을 뜨고 함께 식사를 하고 의장을 챙기고 황제가 공무를 보는 동안 그의 일을 돕도록 서류를 정리하고 돌아온 황제와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피곤한 황제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품에서 잠이 든다. 팽팽히 이어진 신경이 끊기듯 고단한 하루 끝에 그렇게 둘은 잠이 든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흘러간다.
하지만 꿈과 같던 평온함도 잠시. 초원을 누비며 말을 달리던 약희에게 자금성과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윤진은 무겁기만 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무서워해야 하니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주변에는 매일매일 사람이 죽어가고 사랑이 스러진다. 녹무, 옥단, 약란... 역시 사랑보다는 존중을 얻어야 했던 걸까. 팔황자가 결국 삶의 마지막에 찾는 것은 정부인 명혜의 이름이었던 것처럼.
그래도 얼핏 알던 것과 달리 떠난 것이 약희 자신의 결정이어 다행이다. 남은 것은 황제여서 다행이다. 모든 것을 주고 싶었지만 마음이 다였던 남자, 그리고 둘만의 세계를 깬 남자가 보여준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약희. 사라진 아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진다. 십사황자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궁을 나온 약희는 사라진 장벽에 다시 꿈을 꾸지만 그건 찰나일뿐 현실에선 또다시 반복될 문제였기 때문일까. 약희의 마지막은 윤진과 어긋나고 만다. 그리고 그 엇갈린 사랑을 사라진 심장 대신 품고 사는 옹정제는 언제나 혼자였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보았다. "결국 사황자를 택하고 황제가 된 그를 가까이 모시게 되지만, 다시 헤어지고 십사황자의 측복진이 된다. 그리고 쓰린 마음으로 옹정제를 그리워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하아 이렇게도 요약이 될 수 있구나, 그 수많은 말이...
약희는 권력을 버리지 못했다고 팔황자를 비난하며 이별을 고했지만 윤진 역시 그녀에게 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에게 내침받으며 그가 택한 것은 자신의 야망. 그리고 그녀의 손을 놓았지만 약희는 오래도록 윤진만을 바라보았다. 근 10년간의 사랑에 그들이 함께한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황제이기에 가져야만 했고 황제이기에 지킬 수 없었던 사랑이었다. 황제이기에 유일한 여자가 되지 못했고 마음을 주었으나 버림받았고 자유를 갈망했지만 궁 깊은 곳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사랑. 사실 끝은 예정된 수순이었으리라.
그는 말했다. 아이를 낳아달라고. 그 아이들과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그러나 그들이 꿈꿨던 미래는 깨어졌고, 나눴던 마음은 눈물로 남았다. 죽음으로 이어진 사랑. 그래서 윤진, 행복했나요...?
하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그 남자, 사랑을 줄 수밖에 없던 그 사람. 나만이 안아줄 수 있고, 나만을 전부로 여기고 살았던 그 남자였기에.
"약희 네 마음을 내게 다 주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구나.
내가 끝없이 줄 수 있는 것은 네가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기억해 둬."
그가 내 손을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에 얹으며 말했다.
"이것만은 전부 다 네게 주었다는 걸."
승환은 어쩌면 윤진의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툭 '고모가 보고 싶어요'를 내뱉고 가슴속 아련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다. 약희가 윤진의 글씨체를 쓰며 그를 그렸듯, 윤진은 약희의 편지를 보며 둘만의 공간에서 약희를 되살린다.
하지만 약희는 모르는 이야기다.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그는 오지 않고, 쓸쓸히 죽어갔다.그래서 더 아프다. 그 사랑의 어긋남이.
뒤늦게 알게 된 책의 제목의 뜻, 보보경심(步步驚心),
한걸음 한걸음 다가설수록 놀라는 마음
이라고 했다.
하지만 윤진의 심장을 가진 약희는 아마도 알았을 테니,
그 한마디로 되었다. 이 질긴 사랑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