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
박이도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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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 시인의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을 읽고

 

1. 나의 기록

 

저는 태어난 날부터 입대할 무렵까지, 목회자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참 많이 이사를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충북 괴산에서 졸업하고, 청주로 유학을 갔지요. 열여섯 살,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생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는 초등학생 시절 개학 직전 몰아 해치우는 방학숙제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을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에게는 오히려 정체성을 이루고 자아를 확립하는 유용한 도구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왜 썼느냐?

 

딱 잘라 말해, 아주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이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등이 감옥에서 쓰인 걸작으로 유명하죠. 당시의 저로서도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새카만 밤, 아무도 없는 탓에 이불과 그릇의 배치까지 아침에 나갈 때 그대로인 모습의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면 무척 쓸쓸하여 나는 부모와 자연으로부터 유배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당시 느꼈던 외로움은 이전까지 자아 밖의 세계와, 친구들과의 시덥잖은 장난질에 몰두하던 스스로의 시선을 존재의 내면으로 강하게 잡아 끌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고독의 인도를 따라 어쭙잖고 거친 표현으로나마 삶과 죽음, 성애와 허무, 사람과 사회 등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고뇌하고, 또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느덧 삼십대, 일기쓰기에 익숙해진 지금, 기록에 대한 저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니체의 말대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기 바쁜 사람은 기록 따위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고교 3년 간 노트 8권 분량의 일기를 썼는데,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4년 간은 반 권의 노트를 간신히 채웠어요. 다시 군생활 2년 동안은 노트 7권 분량의 일기를 남겼고, 제대 후부터 지금까지는 자유와 속박의 양극 사이 어딘가에서 비틀거리며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매일을 붙잡아둡니다.

 

둘째, 하루하루 기록을 남기는 게 당장은 귀찮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모두 미래의 자신을 위해 사료(史料)를 마련해두는 중요한 일이더군요. 가끔 1년 전의 오늘, 2년 전의 오늘 ... 10여 년 전의 오늘까지 일기를 따라 거슬러가보는 버릇이 있는데, 그때마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초봄마다 어김없이 꽃가루 알레르기에 시달린다던지, 이별이나 투자손실 등 뼈아픈 사건을 겪을 때면 온갖 슬프고 비참한 어구들을 끌어와 자기연민에 빠졌다가도, 이듬해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행복을 찾아나서며 여러 기대에 부풀어 있다던지 등등.

 

2. 시인의 기록

 

박이도 시인이 모으고 엮은 이 책도, 저의 일기처럼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의 기록이 저의 사사로운 기록보단 훨씬 높은 상징성과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 다르겠네요.

 

시인은 1938년 생으로, 경희대 국문과 졸업 후 모교에서 교수로 20여 년 간 일했습니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등단하여, 같은 해 소설 부문에서 유명한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김승옥 작가와는 문단 동기입니다. 저처럼 목사님 아들이시기도 하구요.

 

그 후로 50여 년 간 시인께서 얼마나 많은 문인들과 문학을 논하고 우정을 나누셨을지, 한참 뒤에 태어난 저로서는 아득히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따름이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이 책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을 통해 문단 내에서 평생 가꾸어온 교류의 자세한 실체와 시대의 면면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들을 모으고 엮어 출판했습니다.

 

3. 책의 구성과 읽기의 맛과 멋

 

책은 1부 시담, 2부 편지, 3부 엽서와 메모, 4부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1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년 말 펴낸 개정판에 추가된 내용입니다. 시담만으로 이루어진 개정 이전 판본의 제목은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구성이 이러한 까닭에, 분량이나 내용의 중요도 면에서 1부 시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큽니다. 시인으로 지내오며 연락을 주고 받은 문인들마다 너댓 페이지 씩을 할애하여, 일일이 안부를 묻는 가상의 편지, 주요작품 일부 구절의 소개, 마지막으로는 그들 각자와 얽힌 추억에 대한 회고담을 빼곡하게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시인께서 연세가 지긋하시다 보니 개중에는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많아서, 위에 언급한 가상의 편지가 이 세상에 남겨진 이의 이야기로 되어갈 때면 가슴 뭉클한 대목이 많습니다. ‘형님 떠나신 그곳에도 소주가게가 있으신가’, ‘먼 길 가신 형의 아드님도 이번에 의젓한 시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온 세계가 괴질(코로나19)로 신음하는 지금, 그대가 시로 힘차게 노래하던 생명의 약동이 꿈만 같소하는 등의 구절을 읽을 때면, 절절하면서도 운치있게 노래하는 시인의 그리운 마음이 느껴져 절로 콧잔등이 시큰해져왔어요.

 

동료 및 선후배 문인들의 시와 소설을 평하는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안목도 살아있음은 물론입니다. 우리 문단의 산 증인 그 자체와 같은 분이더군요. 서정주, 이청준, 황순원, 박목월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분들도 여럿 있지만, 식견이 좁은 저에게는 그렇지 않은 이름들도 많았는데 그분들에 대해서도 새로이 이모저모 알아가는 읽기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 이 서평은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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